연하가 어때서 9회
방학이 시작된지 열흘 가량 지났다.
철수는 이른 아침 바깥의 소란스러움 때문에 일어 났다.
날씨는 점점 더워져 자고 일어 나면 이마에 땀이 맺혔다.
'잠 좀 자자.'
철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창 밖 풍경은 검은 아스팔트 도로가 나 있었고, 그 주위로 가정집들이 모여있었다.
멀리 언덕에는 높은 건물들이 보인다.
"니가 이 차 주인이가? 차를 요로코롬 세워 놓으면 어쩌란 말이고. 니 이 동네 사는 사람 맞나?"
철수 뒷집 대문 앞에 하얀 차가 한대 세워져 있었다.
'쌈쟁이 할매, 아마 저 차 주인이 나올 때까지 이를 갈며 새벽부터 기다리고 있었겠지? 잘한다.'
철수의 방은 삼층이다.
하지만 쌈쟁이 할매의 목소리는 바로 곁에서 듣는 것 처럼 선명했다.
철수는 창 밖으로 고개를 내 밀어 쌈 구경을 했다.
쌈쟁이 할매의 저력은 대단했다.
상대방이 반격할 틈을 주지 않았다.
차 주인은 반격할 기회만 찾으며 말이 없다.
"차도 흰 고무 딸딸이처럼 고물이거만, 이 딴걸 여기 세워 놓는 배짱은 어디서 나왔노? 까 봐라카이."
철수는 그 할머니를 보면서 감탄을 하고 있다.
"쌈쟁이 할매 화이팅!"
"뭐이 디런 놈아!"
철수는 창 밖으로 고개를 내 밀어 괜히 한 소리 했다가 욕만 들어 먹고 방안으로 몸을 숨겼다.
'저 할매하고 은정이 누나를 비교했던 것은 내 잘못인 것 같다. 미안해요 누
나. 아이, 시끄러워 죽겠네. 자취방이 다 그립다.'
철수는 아침밥을 먹고 난 뒤, 늘 하던대로 일층 아버지가 경영하는 한의원으로 내려 왔다.
철수가 집에 온 뒤의 일과였다.
철수는 오전을 한약방에서 사람들 구경하며 보내고 오후에는 집에서 음악을 듣고, 책도 보며 자기 감성에 빠져서 살았다.
학기 중 자취할 때와는 다르게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집에만 틀여 박혀 지냈다.
철수는 손님 대기실 소파에 앉아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의미없는 미소만 짓는다.
건물 입구 쪽에 세워져 놓은 감청색 승용차 한대는 먼지가 쌓인 채 몇 일을 움직이지 않고 세워 놓았는지 차 밑의 땅 색깔이 주변의 땅 색깔과 달랐다.
철수는 그 차를 보면서 갑자기 외출 생각이 났다.
"할 일 없으면 집에 올라가 책이나 봐라. 그렇게 앉아 있으니 처량해 보인다.
이놈아."
철수의 아버지가 약재를 정리하다 그런 철수를 보고 한 말씀 하셨다.
"아버지."
"왜?"
"차를 왜 사셨어요?"
"타고 다닐려고 샀지."
"어디로 타고 다니실건데요?"
"그건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매일 일층하고 삼층만 들락 거리시잖아요."
"너도 요즘은 그래."
"저거 그래도 명색이 제법 고급차인데, 저대로 썩히기 아깝지 않아요?"
"왜? 타고 다니고 싶냐?"
"네."
"면허증은 있냐?"
"없는데요."
"그럼 나 말고는 운전할 사람 없네. 썩일 수 밖에."
"아버지."
"왜?"
"20만원만 주세요."
"난 그렇게 큰 돈 없다."
"보약 한 재 가격을 제가 아는데요. 저에게 보약 주실 생각하지 마시고 현금을 주세요."
"너에게 주는 보약이야 팔다 남은 거 주는거구. 20만원이 왜 필요한데?"
"자동차 학원 등록하게요."
"넌 아르바이트 같은 거 안 하냐?"
"예?"
"다른 집에 있는 너 또래 자식들은 자기 용돈은 자기가 번다고 하던데."
"너무 하십니다 아버지. 안 그래도 적은 용돈 그것마저 안 주실려구요?"
"니가 한의대만 갔어도 내가 이러지는 않지."
"그러시지 마시고 20만원만 죠요."
아버지는 뒷짐을 지신 채 철수를 꼬아 보다가 지갑을 꺼내었다.
"자동차 학원 등록비가 20만원이냐?"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 정도일거에요."
"갑자기 면허증 딸 생각은 왜 한거냐?"
"저 차가 불쌍해서요."
"면허증 따면 차는 빌려 줄 수 있지만 기름값은 니가 충당해라."
"그러실 때 마다 제가 이집 아들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너 우리 집 귀한 아들 맞다. 그렇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라고는 17만원 뿐 인데?"
"뒤져서 나오면 제가 가져도 돼요?"
"아버지에게 무례하다 이놈아. 17만원 받고 물러 날래? 아니면 땡전 한 푼 못받고 물러 날래?"
"17만원 주시고 엄마께는 20만원 줬다 그럴거죠?"
"당연하쥐."
"너무 하십니다. 그거라도 주세요."
"한 두푼 씩 모아나야 나중에 니 장가갈 때 집이라도 하나 사주지."
"나중에 잘 안해 주셔도 되니까 지금 잘해 주시면 안될까요?"
"가 봐."
거리의 공기가 덥다.
하늘에 걸려 있는 해님은 따가운 햇살을 놀리 듯 내리 쬐고 있었다.
철수의 이마와 목에는 땀송이가 피어 났다.
'졸라 덥네. 집에 있을 걸.'
철수의 외출은 즐겁지 않았다.
번화가에서 별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집 때문에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거기에는 아니꼬운 장면도 많았다.
'저 아가씨 참 시원하게 입고 다닌다. 옆에 놈 조오컸다.'
극장가 앞에는 벌써 연인들의 데이트가 시작되고 있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어느 놈은 집에서 외로움과 싸우고 있고, 또 어느 놈들은 직장에서 쌔가 빠지게 일하고 있을 텐데, 저 놈들은 대낮부터 여자들과 희희낙낙 거리냐. 나는 왜 만날 여자가 없는거냐? 정희 누나는 수원에 있겠지?'
철수는 자동차 학원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나왔다.
머리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나 바본가 봐.'
철수는 자동차 학원이 어디 있는지도 알아 보고 잠시 휴식을 취할 겸 더운 햇살을 피해 어느 커피샾으로 들어 갔다.
"아가씨, 팥빙수 하나."
철수는 팥빙수를 들면서 자리에 앉아 시원한 에어콘 바람을 맞았다.
그러다 자기가 무엇 때문에 외출을 했는지도 까먹었다.
주위를 둘러 보며 예쁜 여자가 있으면 유심히 쳐다 보았고, 공대생처럼 보이는 남자가 보이면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혼자서 와도 괜찮네. 음악도 있고 잡지도 있으며 시원하기까지 하다. 근데 내가 왜 여길 혼자 들어 왔을까?'
철수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극장가가 멀지 않은 탓일까, 영화 얘기를 하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참 많이 보였다.
자리는 연인들이 하나 둘 메워 갔다.
저기 남자 둘이가 마주 보며 앉아 있는 것을 제외하곤 모두 연인들이었다.
'이래서 내가 외출하기가 싫다는 거여. 불쌍한 놈들. 남자 둘 보다는 차라리 남자 하나가 낫다.'
철수는 팥빙수가 팥 덩어리가 든 물이 되도록 앉아 있었다.
철수는 두가지를 잊고 있었다.
'나도 어딘가에 만날 수 있는 여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오늘 내가 외출한 목적이 뭐더라?'
철수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환한 웃음에 가까운 미소였다.
'불쌍한 놈들, 나는 생각해 보니까 만날 수 있는 예쁜 여자분이 계시더라.'
철수는 공중 전화 앞에서 남자 둘이만 앉아 있는 테이블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보세요."
"전데요. 누나."
"철수?"
"네."
"목소리 잊어 먹겠다. 내가 전화 번호 가르쳐 준 남자 중에 너처럼 전화하지 않았던 사람은 첨이야. 아, 첨은 아니구나."
"그러면 누나가 연락을 좀 하지."
"나는 체질상 내가 먼저 연락을 못해요."
"공주 티 내는 거에요?"
"응."
"편히 살겠네요."
"그러니까 니가 연락 좀 자주 해."
"잠시 잊었어요."
"뭘 잊어?"
"누나도 여자라는 거."
"무슨 말이야? 나같은 예쁜이 보고."
"에이, 진짜 동전 빨리 떨어지네."
"또 통화 중에 동전 얘기다. 무슨 일로 전화 한거야? 누나가 보고 싶디?"
"아, 보고 싶었다기 보다 누나가 여자라는 걸 기억하고선 전화하는 거에요."
"너 놀리는 거지?"
"그게 아니고 오랜만에 외출을 했는데, 온통 연인들 투성이잖아요."
"그래서?"
"배가 아팠어요. 왜 내 곁엔 만날 여자가 없는거야. 이렇게 배가 아파했었는
데, 한참만에 누나를 생각해 냈지 뭐에요."
"훗! 홍은정, 값이 참 많이 떨어졌나 보다. 나 제법 예쁘다는 소릴 듣는 여자니까 잘 기억해 둬. 그건 그렇고 지금 어디야?"
"여기요? 우리 동네요. 누나 안 바빠요?"
"응? 내가 왜 바빠?"
"남자들 만나러 다니지 않아요?"
"그런 말 하지 말랬지. 나 그런 식으로 취급 받는 거 싫어."
"전 누나가 예쁘니까 당연히 남자들이 불러 낼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이이에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그래도 그런 말 하지 마."
"진짜 안 바빠요?"
"응. 나 요즘 거의 집에서만 살아. 혼자 있으니까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어 좋
아. 여유도 만끽하고."
"나도 거의 집에서 살았는데."
"너야 만날 사람이 없었던거구, 난 나만의 자유를 느끼기 위해 애써 외출을 피한거야."
"좋으시겠수. 근데 전화비는 자꾸 떨어지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못한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잠깐만요. 아, 혹시 우리 동네 근처에 자동차 학원 아는 데 있어요?"
"자동차 학원?"
"네, 나도 면허증이나 따 보려구요."
"자동차 학원에 등록하게?"
"그러니까 물어 보잖아요."
"면허 시험 접수는 했어?"
"자동차 학원 등록도 안했는데 무슨..."
"접수 해놓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 거기 너네 동네 어디 쯤이야?"
"여기요? 씨네마 천국있는 곳 건너 편 어느 커피숍이에요."
"혼자 있는거지?"
"네."
"혼자라면서 커피숍에 왜 갔는데?"
"더워서요."
"오랜만에 외출이나 해볼까 그럼."
"하세요."
"한 시간만 시간을 줘. 한 시간 뒤에 그 곳 길가에 나와 있어."
"나 보러 오려구요?"
"응."
"그럼 조심해서 오세요. 안녕."
"야, 바로 끊을거야?"
'오면 만나서 얘기하면 되지. 우쒸, 고거 얘기했다고 오백원이 날아 갔네. 핸드폰 있는 사람은 가급적 사귀지 말자. 쩝.'
철수는 그냥 있기가 미안했는지 팥빙수를 하나 더 시켜 먹었다.
아까 보다 표정엔 너그러움이 보인다.
커피숍으로 들어 오는 여인들을 보면서도 다소 관조적일 수 있었다.
'나도 여자 만날 건데 뭘. 저들이 우릴 보면 누나, 동생 사인 줄 어떻게 알겠냐. 헤헤.'
팥빙수를 두그릇을 해치운 철수가 바깥으로 나갔다.
햇살을 여전히 놀리 듯 따갑다.
철수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은정이를 만날 수 있었다.
"하하, 누나 참 예뻐 보이고 좋은데."
"무슨 말 하려고 그래?"
"선글라스는 더 멋있어요. 나도 한 번 써보고 싶어요."
"집에 있으면서도 변한 게 없구나."
"누나 반가워요."
"그래. 타라."
"그러지요."
은정이는 아무말 묻지 않고 차를 몰았다.
"어디 가는데요?"
"너 사진은 있니?"
"사진도 필요하나요?"
"하긴 거기서 찍으면 되지."
"어디 가는데요?"
"면허 시험장."
"아직 자동차 학원 등록도 안했다니까."
"오래 기다려야 된댔잖아. 자동차 학원 다 마쳐도 시험 보기 힘들거야."
"그래요?"
"너 누나 보고 싶었지?"
"에이, 아까 지나가는 여자들 보고 겨우 생각해 냈다니까."
"내게 잘한다고 얘기 했던 거 같은데?"
"아, 맞다. 이른 새벽을 그리워 하는 샛별같은 심정으로 누나를 보고 싶어 했었어요."
"호호."
"근데 누나는 애인 없어요?"
"잘 나가다 왜 삼천포로 빠지니?"
"그 생각해 보니까 말인데요."
"뭘?"
"내가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 나오는 것 봐서는 누나 인기인 아닌 것 같어."
"쪼르르 달려 나와?"
"요즘은 사귀는 사람 없어요?"
"없다. 됐니?"
"누나 좋다고 따라 다니는 사람도 없어요?"
"없어. 참한 남자 하나 소개 시켜 주게?"
"누나에게 맞는 상대는 찾기가 힘들겠어요."
"누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이승주씨요?"
"응, 그 사람 곧 제대할 거야."
"그 사람 군대 가있는 동안 다른 남자 사귀고 그랬던 거였어요?"
"너 차에서 내리고 싶니?"
"아니요. 그 사람에게는 차였다면서요."
"차인 거 아니라니까."
"어떤 사람이에요?"
"궁금하니?"
"별로 궁금하지는 않지만, 응 누나가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다면 아주 잘난 놈 같아서요."
"놈? 그 사람 잘나지 않았어.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는데 나보다 한 학년 위였었어. 그 사람이 재수하고 나서부터는 그냥 친구처럼 지냈지."
"운전이나 해요."
"왜 듣기 싫어?"
"뻔한 스토리네. 친구에게 감정이 생기면 어색해 진다. 남녀간에 친구가 어딨냐. 그냥 처음부터 연인으로 사귀지 친구는 무슨."
"그래 말 참 잘한다."
"차였는데 만날 용기가 나요?"
"쌓였던 정이 있잖아. 나 그 사람처럼 오래 알고 지내는 남자가 없어."
"다음에 내가 교육을 좀 해 드릴게요."
"어린 게 뭘 안다고. 여자친구도 없으면서."
"없기 때문에 생각을 많이 해서 이론에는 밝아요."
"잘났다."
"정희 누나도 내 시간나면 교육을 좀 시켜야 되는데, 수강생이 둘로 늘었구만 쩝."
"정희 걔, 아무래도 남자친구 때문에 상처 받을거야."
"왜요?"
"그런 느낌이 들어. 나와 비슷하거든."
"무슨 말이에요?"
오후의 햇살이 기울거리고 있다.
방학을 맞이하고 철수가 첫 외출을 한 것은 은정이와 함께였다.
## 이글은 이현철님의 '연하가 뭐 어때'라는 글을 퍼온 것입니다...##
방학이 시작된지 열흘 가량 지났다.
철수는 이른 아침 바깥의 소란스러움 때문에 일어 났다.
날씨는 점점 더워져 자고 일어 나면 이마에 땀이 맺혔다.
'잠 좀 자자.'
철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창 밖 풍경은 검은 아스팔트 도로가 나 있었고, 그 주위로 가정집들이 모여있었다.
멀리 언덕에는 높은 건물들이 보인다.
"니가 이 차 주인이가? 차를 요로코롬 세워 놓으면 어쩌란 말이고. 니 이 동네 사는 사람 맞나?"
철수 뒷집 대문 앞에 하얀 차가 한대 세워져 있었다.
'쌈쟁이 할매, 아마 저 차 주인이 나올 때까지 이를 갈며 새벽부터 기다리고 있었겠지? 잘한다.'
철수의 방은 삼층이다.
하지만 쌈쟁이 할매의 목소리는 바로 곁에서 듣는 것 처럼 선명했다.
철수는 창 밖으로 고개를 내 밀어 쌈 구경을 했다.
쌈쟁이 할매의 저력은 대단했다.
상대방이 반격할 틈을 주지 않았다.
차 주인은 반격할 기회만 찾으며 말이 없다.
"차도 흰 고무 딸딸이처럼 고물이거만, 이 딴걸 여기 세워 놓는 배짱은 어디서 나왔노? 까 봐라카이."
철수는 그 할머니를 보면서 감탄을 하고 있다.
"쌈쟁이 할매 화이팅!"
"뭐이 디런 놈아!"
철수는 창 밖으로 고개를 내 밀어 괜히 한 소리 했다가 욕만 들어 먹고 방안으로 몸을 숨겼다.
'저 할매하고 은정이 누나를 비교했던 것은 내 잘못인 것 같다. 미안해요 누
나. 아이, 시끄러워 죽겠네. 자취방이 다 그립다.'
철수는 아침밥을 먹고 난 뒤, 늘 하던대로 일층 아버지가 경영하는 한의원으로 내려 왔다.
철수가 집에 온 뒤의 일과였다.
철수는 오전을 한약방에서 사람들 구경하며 보내고 오후에는 집에서 음악을 듣고, 책도 보며 자기 감성에 빠져서 살았다.
학기 중 자취할 때와는 다르게 바깥 출입을 하지 않고 집에만 틀여 박혀 지냈다.
철수는 손님 대기실 소파에 앉아 창 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의미없는 미소만 짓는다.
건물 입구 쪽에 세워져 놓은 감청색 승용차 한대는 먼지가 쌓인 채 몇 일을 움직이지 않고 세워 놓았는지 차 밑의 땅 색깔이 주변의 땅 색깔과 달랐다.
철수는 그 차를 보면서 갑자기 외출 생각이 났다.
"할 일 없으면 집에 올라가 책이나 봐라. 그렇게 앉아 있으니 처량해 보인다.
이놈아."
철수의 아버지가 약재를 정리하다 그런 철수를 보고 한 말씀 하셨다.
"아버지."
"왜?"
"차를 왜 사셨어요?"
"타고 다닐려고 샀지."
"어디로 타고 다니실건데요?"
"그건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매일 일층하고 삼층만 들락 거리시잖아요."
"너도 요즘은 그래."
"저거 그래도 명색이 제법 고급차인데, 저대로 썩히기 아깝지 않아요?"
"왜? 타고 다니고 싶냐?"
"네."
"면허증은 있냐?"
"없는데요."
"그럼 나 말고는 운전할 사람 없네. 썩일 수 밖에."
"아버지."
"왜?"
"20만원만 주세요."
"난 그렇게 큰 돈 없다."
"보약 한 재 가격을 제가 아는데요. 저에게 보약 주실 생각하지 마시고 현금을 주세요."
"너에게 주는 보약이야 팔다 남은 거 주는거구. 20만원이 왜 필요한데?"
"자동차 학원 등록하게요."
"넌 아르바이트 같은 거 안 하냐?"
"예?"
"다른 집에 있는 너 또래 자식들은 자기 용돈은 자기가 번다고 하던데."
"너무 하십니다 아버지. 안 그래도 적은 용돈 그것마저 안 주실려구요?"
"니가 한의대만 갔어도 내가 이러지는 않지."
"그러시지 마시고 20만원만 죠요."
아버지는 뒷짐을 지신 채 철수를 꼬아 보다가 지갑을 꺼내었다.
"자동차 학원 등록비가 20만원이냐?"
"잘은 모르지만 아마 그 정도일거에요."
"갑자기 면허증 딸 생각은 왜 한거냐?"
"저 차가 불쌍해서요."
"면허증 따면 차는 빌려 줄 수 있지만 기름값은 니가 충당해라."
"그러실 때 마다 제가 이집 아들이 아닌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너 우리 집 귀한 아들 맞다. 그렇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라고는 17만원 뿐 인데?"
"뒤져서 나오면 제가 가져도 돼요?"
"아버지에게 무례하다 이놈아. 17만원 받고 물러 날래? 아니면 땡전 한 푼 못받고 물러 날래?"
"17만원 주시고 엄마께는 20만원 줬다 그럴거죠?"
"당연하쥐."
"너무 하십니다. 그거라도 주세요."
"한 두푼 씩 모아나야 나중에 니 장가갈 때 집이라도 하나 사주지."
"나중에 잘 안해 주셔도 되니까 지금 잘해 주시면 안될까요?"
"가 봐."
거리의 공기가 덥다.
하늘에 걸려 있는 해님은 따가운 햇살을 놀리 듯 내리 쬐고 있었다.
철수의 이마와 목에는 땀송이가 피어 났다.
'졸라 덥네. 집에 있을 걸.'
철수의 외출은 즐겁지 않았다.
번화가에서 별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한 집 때문에 얼마 걷지 않았는데도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거기에는 아니꼬운 장면도 많았다.
'저 아가씨 참 시원하게 입고 다닌다. 옆에 놈 조오컸다.'
극장가 앞에는 벌써 연인들의 데이트가 시작되고 있었다.
'세상은 참 불공평하다. 어느 놈은 집에서 외로움과 싸우고 있고, 또 어느 놈들은 직장에서 쌔가 빠지게 일하고 있을 텐데, 저 놈들은 대낮부터 여자들과 희희낙낙 거리냐. 나는 왜 만날 여자가 없는거냐? 정희 누나는 수원에 있겠지?'
철수는 자동차 학원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나왔다.
머리를 잘래잘래 흔들었다.
'나 바본가 봐.'
철수는 자동차 학원이 어디 있는지도 알아 보고 잠시 휴식을 취할 겸 더운 햇살을 피해 어느 커피샾으로 들어 갔다.
"아가씨, 팥빙수 하나."
철수는 팥빙수를 들면서 자리에 앉아 시원한 에어콘 바람을 맞았다.
그러다 자기가 무엇 때문에 외출을 했는지도 까먹었다.
주위를 둘러 보며 예쁜 여자가 있으면 유심히 쳐다 보았고, 공대생처럼 보이는 남자가 보이면 바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혼자서 와도 괜찮네. 음악도 있고 잡지도 있으며 시원하기까지 하다. 근데 내가 왜 여길 혼자 들어 왔을까?'
철수는 주위를 둘러 보았다.
극장가가 멀지 않은 탓일까, 영화 얘기를 하며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참 많이 보였다.
자리는 연인들이 하나 둘 메워 갔다.
저기 남자 둘이가 마주 보며 앉아 있는 것을 제외하곤 모두 연인들이었다.
'이래서 내가 외출하기가 싫다는 거여. 불쌍한 놈들. 남자 둘 보다는 차라리 남자 하나가 낫다.'
철수는 팥빙수가 팥 덩어리가 든 물이 되도록 앉아 있었다.
철수는 두가지를 잊고 있었다.
'나도 어딘가에 만날 수 있는 여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고 오늘 내가 외출한 목적이 뭐더라?'
철수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환한 웃음에 가까운 미소였다.
'불쌍한 놈들, 나는 생각해 보니까 만날 수 있는 예쁜 여자분이 계시더라.'
철수는 공중 전화 앞에서 남자 둘이만 앉아 있는 테이블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보세요."
"전데요. 누나."
"철수?"
"네."
"목소리 잊어 먹겠다. 내가 전화 번호 가르쳐 준 남자 중에 너처럼 전화하지 않았던 사람은 첨이야. 아, 첨은 아니구나."
"그러면 누나가 연락을 좀 하지."
"나는 체질상 내가 먼저 연락을 못해요."
"공주 티 내는 거에요?"
"응."
"편히 살겠네요."
"그러니까 니가 연락 좀 자주 해."
"잠시 잊었어요."
"뭘 잊어?"
"누나도 여자라는 거."
"무슨 말이야? 나같은 예쁜이 보고."
"에이, 진짜 동전 빨리 떨어지네."
"또 통화 중에 동전 얘기다. 무슨 일로 전화 한거야? 누나가 보고 싶디?"
"아, 보고 싶었다기 보다 누나가 여자라는 걸 기억하고선 전화하는 거에요."
"너 놀리는 거지?"
"그게 아니고 오랜만에 외출을 했는데, 온통 연인들 투성이잖아요."
"그래서?"
"배가 아팠어요. 왜 내 곁엔 만날 여자가 없는거야. 이렇게 배가 아파했었는
데, 한참만에 누나를 생각해 냈지 뭐에요."
"훗! 홍은정, 값이 참 많이 떨어졌나 보다. 나 제법 예쁘다는 소릴 듣는 여자니까 잘 기억해 둬. 그건 그렇고 지금 어디야?"
"여기요? 우리 동네요. 누나 안 바빠요?"
"응? 내가 왜 바빠?"
"남자들 만나러 다니지 않아요?"
"그런 말 하지 말랬지. 나 그런 식으로 취급 받는 거 싫어."
"전 누나가 예쁘니까 당연히 남자들이 불러 낼 거라 생각하고 한 말이이에요. 다른 뜻은 없었어요."
"그래도 그런 말 하지 마."
"진짜 안 바빠요?"
"응. 나 요즘 거의 집에서만 살아. 혼자 있으니까 생각을 많이 할 수 있어 좋
아. 여유도 만끽하고."
"나도 거의 집에서 살았는데."
"너야 만날 사람이 없었던거구, 난 나만의 자유를 느끼기 위해 애써 외출을 피한거야."
"좋으시겠수. 근데 전화비는 자꾸 떨어지는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못한 것 같아요."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잠깐만요. 아, 혹시 우리 동네 근처에 자동차 학원 아는 데 있어요?"
"자동차 학원?"
"네, 나도 면허증이나 따 보려구요."
"자동차 학원에 등록하게?"
"그러니까 물어 보잖아요."
"면허 시험 접수는 했어?"
"자동차 학원 등록도 안했는데 무슨..."
"접수 해놓고 기다리는 시간이 길어. 거기 너네 동네 어디 쯤이야?"
"여기요? 씨네마 천국있는 곳 건너 편 어느 커피숍이에요."
"혼자 있는거지?"
"네."
"혼자라면서 커피숍에 왜 갔는데?"
"더워서요."
"오랜만에 외출이나 해볼까 그럼."
"하세요."
"한 시간만 시간을 줘. 한 시간 뒤에 그 곳 길가에 나와 있어."
"나 보러 오려구요?"
"응."
"그럼 조심해서 오세요. 안녕."
"야, 바로 끊을거야?"
'오면 만나서 얘기하면 되지. 우쒸, 고거 얘기했다고 오백원이 날아 갔네. 핸드폰 있는 사람은 가급적 사귀지 말자. 쩝.'
철수는 그냥 있기가 미안했는지 팥빙수를 하나 더 시켜 먹었다.
아까 보다 표정엔 너그러움이 보인다.
커피숍으로 들어 오는 여인들을 보면서도 다소 관조적일 수 있었다.
'나도 여자 만날 건데 뭘. 저들이 우릴 보면 누나, 동생 사인 줄 어떻게 알겠냐. 헤헤.'
팥빙수를 두그릇을 해치운 철수가 바깥으로 나갔다.
햇살을 여전히 놀리 듯 따갑다.
철수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은정이를 만날 수 있었다.
"하하, 누나 참 예뻐 보이고 좋은데."
"무슨 말 하려고 그래?"
"선글라스는 더 멋있어요. 나도 한 번 써보고 싶어요."
"집에 있으면서도 변한 게 없구나."
"누나 반가워요."
"그래. 타라."
"그러지요."
은정이는 아무말 묻지 않고 차를 몰았다.
"어디 가는데요?"
"너 사진은 있니?"
"사진도 필요하나요?"
"하긴 거기서 찍으면 되지."
"어디 가는데요?"
"면허 시험장."
"아직 자동차 학원 등록도 안했다니까."
"오래 기다려야 된댔잖아. 자동차 학원 다 마쳐도 시험 보기 힘들거야."
"그래요?"
"너 누나 보고 싶었지?"
"에이, 아까 지나가는 여자들 보고 겨우 생각해 냈다니까."
"내게 잘한다고 얘기 했던 거 같은데?"
"아, 맞다. 이른 새벽을 그리워 하는 샛별같은 심정으로 누나를 보고 싶어 했었어요."
"호호."
"근데 누나는 애인 없어요?"
"잘 나가다 왜 삼천포로 빠지니?"
"그 생각해 보니까 말인데요."
"뭘?"
"내가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 나오는 것 봐서는 누나 인기인 아닌 것 같어."
"쪼르르 달려 나와?"
"요즘은 사귀는 사람 없어요?"
"없다. 됐니?"
"누나 좋다고 따라 다니는 사람도 없어요?"
"없어. 참한 남자 하나 소개 시켜 주게?"
"누나에게 맞는 상대는 찾기가 힘들겠어요."
"누나 좋아하는 사람 있어."
"이승주씨요?"
"응, 그 사람 곧 제대할 거야."
"그 사람 군대 가있는 동안 다른 남자 사귀고 그랬던 거였어요?"
"너 차에서 내리고 싶니?"
"아니요. 그 사람에게는 차였다면서요."
"차인 거 아니라니까."
"어떤 사람이에요?"
"궁금하니?"
"별로 궁금하지는 않지만, 응 누나가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을 했다면 아주 잘난 놈 같아서요."
"놈? 그 사람 잘나지 않았어. 고등학교 때 처음 만났는데 나보다 한 학년 위였었어. 그 사람이 재수하고 나서부터는 그냥 친구처럼 지냈지."
"운전이나 해요."
"왜 듣기 싫어?"
"뻔한 스토리네. 친구에게 감정이 생기면 어색해 진다. 남녀간에 친구가 어딨냐. 그냥 처음부터 연인으로 사귀지 친구는 무슨."
"그래 말 참 잘한다."
"차였는데 만날 용기가 나요?"
"쌓였던 정이 있잖아. 나 그 사람처럼 오래 알고 지내는 남자가 없어."
"다음에 내가 교육을 좀 해 드릴게요."
"어린 게 뭘 안다고. 여자친구도 없으면서."
"없기 때문에 생각을 많이 해서 이론에는 밝아요."
"잘났다."
"정희 누나도 내 시간나면 교육을 좀 시켜야 되는데, 수강생이 둘로 늘었구만 쩝."
"정희 걔, 아무래도 남자친구 때문에 상처 받을거야."
"왜요?"
"그런 느낌이 들어. 나와 비슷하거든."
"무슨 말이에요?"
오후의 햇살이 기울거리고 있다.
방학을 맞이하고 철수가 첫 외출을 한 것은 은정이와 함께였다.
## 이글은 이현철님의 '연하가 뭐 어때'라는 글을 퍼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