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가 어때서 14회
가을의 향기 짙은 10월이 중순을 넘어 섰습니다.
하늘은 더욱 높아 고왔고, 그에 반한 초목의 색깔은 울긋불긋해 졌지요.
승주는 아직도 연락이 없습니다.
한 주가 새로 시작되었습니다.
시험이 끝난 다음 주라 맘 편하게 등교를 했지요.
나처럼 착한 선배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그냥 지나치는 후배 하나를 뛰어가 붙잡고서는 밥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감사 할 줄도 모르는 나쁜 놈이지만 녀석하고 밥을 먹으면 그냥 재밌어요.
"아, 올해도 눈오는 마로니에 거리를 나 혼자 걸어야 하는구나. 어떤 여자는 후배하나 소개시켜 준다더니 여태 깜깜 무소식이다. 아마 후배를 만들어서 소개시켜 주려나 보다. 아, 풍성한 수확의 계절 가을이라더니 나는 홀로 가슴만 태우는 구나."
"궁시렁 거리지 말고 밥이나 먹어."
철수 녀석은 내가 후배 소개시켜 준다는 말을 뱉은 후로 계속 후배 언제 소개시켜 주냐고 치근됩니다.
말을 했으니까 소개 시켜주어야 겠죠.
시험도 끝이 났는데, 이 번 주말에 녀석에게 소개팅이나 주선해야 겠네요.
녀석이 좋아할 만한 예쁜 후배가 하나 있긴 하지요.
근데 저 녀석이 걔의 눈에 찰까요?
시간이 갈수록 정이 가는 녀석이니까, 첫인상만 잘 심어 주면 후배가 녀석에게 호감을 가질 수도 있겠군요.
앞에 나같이 예쁜 숙녀를 앉혀 놓고 저기 미니 스컷 입고 가는 여학생을 쳐다 보는 녀석에게 소개팅 시켜 주기가 꺼림직 하긴 하지만요.
"그럼 너, 이번 주말 오후에 시간 비워 놔."
"저 항상 시간 비워 놨었어요. 왜? 진짜 소개팅 시켜 주게?"
"그래. 예쁘게 꾸미고 나와."
"사내에게 예쁘단 말이 뭡니까? 멋있게, 쌈박하게, 섹쉬하게... 가만, 섹쉬하게는 좀 그렇다."
"알았어. 멋있고 쌈박하며 섹쉬하게 꾸미고 나 와. 만날 장소로 어디가 좋을까?"
"섹쉬하게는 빼요. 플라타너스 마른 잎이 날리고, 무명 가수의 기타 소리가 좋은 곳.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나기로 하죠."
"엉? 공원에서 만나게?"
"그 근처 커피샾 말이죠. 공대생도 아닌데, 꼭 끝까지 설명을 해야 알아 들어
요? 케에프씨 뒤편에 세커피샾에서 만나죠. 저녁 다섯 시 정각 작전을 수행합시다."
"후후, 그래. 그 시간, 그 장소로 약속을 잡으마."
"꼭 약속 지켜요. 근데, 누나도 나올 거에요?"
"그럼, 내가 소개 시켜 주는건데."
"예전부터 내려 오는 정설이 있지요. 소개팅이나 미팅에서 주선자는 항상 자기보다 미모가 떨어지는 애들을 데리고 나온다."
"나는 어쩔 수 없잖아. 나 보다 예쁜 여자를 아직 못 봤거든."
"그렇게 한 평생 살다 가세요. 우리 뒷 집 쌈쟁이 할머니도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을 거에요. 그러니까 아무에게나 시비 걸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지."
"치, 한번 더 너네 뒷집 할머니 얘기하면 소개팅이고 뭐고 없다? 그리고 내가
소개시켜 주는 걔 예뻐. 그러니까 많은 기대하고 나와도 돼. 쯧쯧, 니가 좀 많이 딸리겠다."
"이 봐요 홍은정씨. 제가 진짜 여자 애들에게 인기가 없게 생겼나요? 왜 미팅
나가서 계속 죽을 쑤는 지 모르겠어요."
녀석이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 보네요.
아픔이 있나 보지요?
철수는 생긴거 뭐 그렇게 나무랄 데 없고, 키도 그런대로 작은 편은 아니고, 하는 짓도 귀여운 구석이 많지요.
그리고 글도 잘 쓰는 것 같고, 또 순진한 것도 맘에 드는 괜찮은 애지요.
내가 느낀 녀석에 대한 평가는 좋은 쪽이에요.
근데 뭐, 홍은정씨? 맞먹어라 짜샤.
"이 봐요. 박철수군."
"네, 제 앞이라 거짓말 하지 말구요. 솔직히 말해 주세요. 제가 진짜 인기 없
게 생겨 먹었어요?"
"응. 생긴 거 떨어지지. 키 작지. 이상한 말들 잘 하지. 너 잘하는 건 있니? 여
자에게 매일 밥이나 얻어 먹는 주제에."
"밥 사준게 아까웠어요? 매일은 아니잖아요."
"누가 아깝대? 그래 하는 짓도 얄밉잖아. 나에게 하는 짓 보면 미팅 나가서 죽쑬만 해."
"그렇군요. 밥 잘 먹었습니다."
철수는 밥 숟가락을 턱 내려 놓았습니다.
불쌍한 표정을 짓고선 고개를 푹 숙이고 일어 났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군요.
"왜 그래? 밥 그만 먹을거야?"
"누나에게 진실을 듣고 나니 밥 맛이 없네요. 나 먼저 갈게요."
"야, 같이 가. 소개팅은 어떡 할거야?"
"당연히 해야지요.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잊어 버릴 거에요."
"뭘?"
"누나가 나 씹은 말이요. 누나는 잘나서 좋겠수."
상당히 속이 좁은 녀석이네요.
내가 한 말을 모두 그대로 받아 들였나 보네요.
어떤 때는 상당히 똑똑해 보이다가도, 녀석은 자주 상당히 바보스럽습니다.
녀석은 어깨가 쳐진 초라한 모습을 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생 식당을 나갔습니다.
"야, 박철수."
"왜요?"
"어디가?"
"누나는 수업 들어가세요. 나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요."
"너 그렇게 인기 없게 생기지 않았어."
"한 번 내뱉은 말은 줏어 담을 수가 없지요. 밥 잘먹었어요."
"어디가? 나 수업 시작하려면 조금 더 있어야 된다 말이야. 자판기에서 커피 뽑아 줄까?"
"당구장에도 커피는 줘요."
"뭐?"
"밥을 먹었으니께, 한 게임 해야지요."
철수는 어깨가 쳐진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당구장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저 녀석 불쌍한 표정에 넘어 가지 말아야 겠다는 각오를 해 봅니다.
이번 주도 목요일까지 생각없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시월달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녀석이 시험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도서관을 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저녁 시간 열람실을 가 보았지요.
철수를 찾기가 힘들었어요.
엎어져 자고 있었거든요.
저럴 걸 왜 열람실에 나왔는지 모르겠네요.
녀석의 등뒤에 서서 그가 연습장에 적어 놓은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내가 가을이 되고, 가을이 내가 되니
가을 속에 내가 있고, 가을 또한 내 마음 같다.
그리움을 잡고자 내가 그리움이 되니
그리움이 내 곁에 있어 나는 행복하다.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다.
뭘까요.
전공 책 옆으로 연습장에는 시 한편이 적혀 있었습니다.
"은정아."
누군가 내 등을 쳤습니다.
"어? 정희구나. 약사 고시 때문에 바쁘지?"
"응, 도서관에는 어쩐 일이야?"
"응? 이 녀석 보러 왔지. 동아리방에 갔더니 요즘 얘가 계속 도서관 나 간다고 해서."
녀석이 엎드려 자는 좌석의 옆자리는 정희의 자리였습니다.
그럼 아까 철수가 적어 놓았던 시는 정희를 위한 시였나요.
이 녀석 연상은 싫다더니, 정희를 흠모하고 있었던 거 아닙니까.
기분이 좀 나쁘네요.
"커피 한 잔 할래?"
정희가 나를 보자 다시 밖으로 나가자 하는군요.
철수야 침은 흘리지 말고 자라.
"저 녀석 깨워서 갈까?"
"얘는 놔 둬. 나오기 싫은 도서관 나 때문에 억지로 나오고 있는데."
"왜?"
"요즘 내가 좀 외롭다 했거든."
"그 좀 조용히 합시다."
어머, 내게 조용히 하라고 하는 남학생도 있네요.
남자들은 나에게 저런 말 잘 못하는데.
도서관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바깥 공기가 제법 쌀쌀하네요.
"나, 당분간 그 사람 잊을거야."
"누구? 철규씨."
"응. 저번 주에 싸웠어. 투정을 좀 부렸더니 나보고 너는 왜 네 생각만 하니, 그러더라. 그 사람도 요즘 힘든가봐. 편해질 때까지 잠시 잊기로 했어."
"그게 무슨 잊는거니? 아예 헤어져라."
"넌 친구에게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니?"
"아휴, 그렇게 유지되는게 좋니?"
"몰라. 이렇게 사귀어도 없는 것 보단 나아."
"그건 그렇고 철수 쟤는 왜 도서관에 나오는 거야?"
"저 녀석이 월요일 밤에 내 방을 찾아 왔었어. 내가 녀석에게 넋두리를 좀 늘
어 놨었지. 훗훗, 자기가 곁에 있어 주겠다더군. 너무 외로워 하지 말라면서 말이야. 그리고서는 자주 날 찾아 왔어. 저렇게 도서관에서도 내 옆에 앉아 자다가곤 해."
"시를 하나 적어 놨던데?"
"심심하니까 그랬겠지. 레포트 있으면 레포트 쓰다 가고, 그렇지 않으면 연습장에 시를 쓰거나 당구대 그려 놓고 이론 연습을 하기도 하지. 날 배웅해 주기 위해 내가 자리에서 일어 날 때까지 도서관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면 대단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
"그 녀석 참... 혹시 널 좋아하는 거 아냐?"
"모르지 뭐. 쟤가 내 입술을 처음 뺏은 애야."
"엉?"
"장난으로 한 입맛춤. 녀석은 그게 내 첫 입맞춤인 걸 모를거야. 너한테도 혹
시 눈감아 보라고 그러면 눈 감지 마."
"엉?"
"눈감아 보라기에 눈 감았다가 당했어."
"너하고는 오랫동안 친했나 보다?"
"어릴 때 같은 동네서 살았댔잖아. 녀석이 개구장이였거든. 옷이 헝클어져 있으면 내가 바로 잡아주기도 했고, 코를 흘리고 얼굴이 지저분하면 씻어 주기도 했지. 녀석은 날 친누나처럼 생각했을거야."
"너 그러다 연하 사귀게 되는 거 아냐?"
"훗, 남자같은 느낌이 들어야 사귀지."
"하여튼 챙겨 주는 사람 있어서 좋겠다?"
"응, 저 녀석 때문에 마음에 위로가 되긴 해. 참, 넌 어때? 승주씨와는 깨진거야?"
"좀 더 기다려 봐야지."
"너 요즘엔 같이 다니는 남학생이 없다? 승주씨 제대할 때만 기다리면서도 남학생 하나는 꼭 붙이고 다니던 너였잖아. 승주씨가 한 말 때문에 그러니?"
"아니야, 나 남학생 하나 달고 다니잖아."
"누구? 못봤는데?"
"철수 있잖아. 걔는 남학생 아니니? 걔 깨워서 밥이나 먹으러 가야 겠다."
"그러다 니가 연하 사귀는 거 아냐?"
"그 녀석이 연상은 죽어도 싫다는 데 뭘."
"나는 예외적으로 고려해 볼 맘이 있다던데?"
"내가 녀석에게 너만큼 고운 존재는 아닌가 보지 뭐."
솔직히 정희에게 질투가 나긴 했습니다.
내가 정희보다 예쁘고, 세련되고, 맘씨도 곱고.
맘씨 고운 건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잘하는 것도 많은데, 철수 고것이 나보다 정희를 더 좋아하고 있단 말이지요?
확 진짜 연하고 나발이고, 그냥 철수를 꼬셔 버릴까?
에그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 승주 때문에 내 마음이 공허해 졌기 때문일겁니다.
저녁 가을도 한 몫 거드네요.
"뭐해요? 출발 합시다."
"오늘은 바로 앞으로 와서 앉네?"
"누나 운전하는 거 잘 봐야지요. 곧 주행 시험이 있는데."
"엿 사줘야 되니?"
"당연하죠. 그게 이만 저만 어려운 시험이 아니잖습니까. 참, 누나 면허증 잠깐 줘 봐요."
"왜?"
"줘봐요 좀."
백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면허증을 빼 주었습니다.
"푸헬헬, 뭐야 이거? 이종 보통이잖아. 푸하핫, 전 일종 보통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 누나 맞아요?"
"그렇다."
"푸헬헬, 누나 성형 수술 했어요? 아니면 화장발인가? 이 사진 대학 갓들어 갔을 때 찍은 사진이죠? 누나도 이때는 뭐 별로 예쁘지 않았네요."
"그때는 급히 찍은 사진이라 그래. 내 주민등록증 보여줄까?"
"됐어요. 출발 합시다 이종 기사."
"아직 면허증도 없는게."
"곧 생깁니다. 일종 보통으로 말이지요. 출발해요, 이종 보통 홍기사."
"너 자꾸 날 그런식으로 부를래? 확, 내일 소개팅 취소 시킨다?"
"쩝! 출발하세요 예쁜 누나님."
짜식이 말이야.
면허증에 붙은 사진도 그런대로 예뻐 보이는데...
면허증 다시 만들어야 겠네요.
철수에게는 말을 그렇게 했지만, 후배에겐 괜찮은 놈이라 해 주었죠.
솔직히 철수 자랑을 좀 많이 했죠.
그랬다고 후배 이 기집애가 이런 예쁜 모습으로 나올 줄이야.
나는 그냥 청바지에 스웨터 하나 걸치고, 화장도 하지 않고 나왔는데 후배는 미니 스컷 세미 정장에 세련된 화장을 하고 드라이를 곱게 했는지 긴 머리칼이 여린 바람에도 찰랑찰랑 흔들리네요.
제가 좀 위축되는군요.
하기야 뭐 전 주선일뿐인데요.
근데 이 자식은 왜 안나오는거야.
후배와 마주 앉아 십여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얘도 상당히 공주네요.
철수는 지딴에는 아주 꾸미고 나왔습니다.
그런대로 봐 줄만 하네요.
나와 내후배를 보고 나서 이 녀석의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뻣뻣하게 서서 인사를 하더니 수줍게 내 옆으로 와 앉았습니다.
"누나, 정설을 깨셨군요."
뭐야 임마?
내가 꾸미면 어디 얘 정도겠냐. 녀석이 내 외모를 몰라 주네요.
"서로 소개들 해."
"아, 안녕하세요. 참 예쁘시네요. 전 섹스바이러스하우스 유니버시티 정보 공학과 93학번이구요. 박철수입니다."
어이가 없다.
딱딱하게 굳어서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애한테 학교 이름가지고 유머랍시고 말하는 철수가 어이가 없다.
후배에게 내가 대신 미안하다는 웃음을 던져 주었다.
"안녕하세요. 전 명륜동에 있어요. 국문학과 93학번이구요. 이름은 송춘옥이에요."
"아 네, 이름도 참 예쁘시네요."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내 뱉었을까요.
철수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주었습니다.
후배가 자기 이름에 대해 컴플렉스가 많아요.
철수가 오고 난 뒤 십 여분 동안 엄청 썰렁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 됐습니다.
"전 콜라요."
메뉴판을 갖다 준 서빙 아가씨가 왔을 때, 후배는 콜라를 시켰어요.
철수는 후배를 빼꼼히 쳐다 보다가 넌지시 말을 뱉었습니다.
"코,콜라는 상대가 맘에 들지 않을 때 시키는 건데요. 다른 거 시키시면 안될까요?"
"네? 전 모르고 시킨건데, 그냥 갈증이 나서요. 그럼 닥터 페퍼로 할게요."
"그것도 콜라거든요?"
"네?"
나는 또 후배에게 웃음을 띄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철수의 허리를 쿡 찔렀지요.
"누나는 집에 안가요?"
이게, 후배에게는 발음도 제대로 못하며 떨고 있는 주제에. 내게는 큰 소리를 치는군요.
내 앞에서 식은 땀을 흘리던 남자들이 다 그립네요.
내가 가 봐라, 이 어색한 분위기 완전 파토나지.
주문 할 때 오고 갔던 말들은 참 재미난 말들이었군요.
철수 녀석은 아주 썰렁했습니다.
지나간 농담 어쩌다 한 마디 뱉고선 혼자 웃었습니다.
그리고 후배 가족 조사 할 일 있습니까?
보약 얘기는 왜 했을까요?
취미는?
당구는 쳐요?
소용없는 질문만 던지는 철수가 무척이나 안타깝습니다.
또 왜 저리 떤답니까?
후배는 답만 간단히 하고 자꾸 저만 쳐다 봅니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후배가 대견스럽습니다.
철수는 더 이상 물어 볼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골똘히 머리를 굴리다가 십초동안 말을 하고 간단히만 답을 하는 후배를 보고 웃습니다.
그리고 삼 분 정도 침묵하는 군요.
십초 정도 말을 걸고, 이 삼분 침묵하고...
내가 만약 철수 같은 애와 소개팅을 했다면, 난 그냥 아무 말없이 나가 버립니다.
저 녀석이 왜 미팅에서 죽만 쑤는지 이해가 되네요.
재미 진짜 없는 놈이에요.
가만 나랑있을 때는 재밌는데?
"저 담배 펴도 돼죠?"
어머 얘 좀 봐. 언제 담배를 배웠지? 후배는 한쪽으로 비스듬히 자세를 고쳐 앉고서는 다리를 꼬았습니다.
참, 섹쉬하네요.
그리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습니다.
철수는 정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담배는 몸에 좋지 않은데..."
"야아."
허리 찌르는 것만으로는 이제 안되겠더군요.
"누나는 집에 안가요?"
"이런 분위기 만들어 놓고선 나보고 집에 가라구?"
"처음엔 다 이런 거죠 뭐."
"처음에 이러면 누가 다시 만나 주니?"
"나보고 어떡하라구요?"
후배가 담배 피는 동안 철수는 나와 얘기했습니다.
나한테는 얘기 잘 하네요.
"뭘 어떡해? 재밌게 좀 해 봐. 어색하고 따분해서 앉아 있기 진짜 싫다."
"하, 그럼 가세요."
"이 자리 파토나게?"
"내 잘못만은 아니잖아요. 저 분도 별로 말을 안해요."
"니가 그렇게 형식적인 질문만 하니까 그렇지. 서로의 공통적인 관심사가 뭔지 알아보고 그 쪽으로 대화를 이끌어야지. 그리고 넌 유머 감각도 없니?"
"아, 내가 말을 많이 하면요. 싸가지 없다 그래요. 상대도 뭔가 내 관심사에 대해서 물어 보면 좋잖아요. 말을 않고 가만히 있어도 뭐라 그러고, 말은 많이 하면 촉새같다 그러며 촐랑되지 말아라 하고. 나보고 어떡하란 말인데?"
후배는 둘이서 잘 논다는 식으로 쳐다 보네요.
"말도 더듬고, 재미 없는 질문만 하고 그렇다고 매너가 좋냐? 쯧쯧, 넌 여자 사귀기 진짜 힘들겠다."
"재수 없는 말 하지 마요. 안 그래도 뼈아픈 현실 때문에 고민이 쌓여 가는데
누나는 이제 집에 가요. 주선이 염치도 없이 끝까지 개기고 있어 씨."
"뭐야?"
"왜 자꾸 허리를 찔렀냔 말이에요. 그것 때문에 더 소극적으로 되잖아요."
"니가 점수 깍이는 말을 하니까 그렇지."
"사람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렇게 배워가는 거 아닙니까. 저 아가씨
예쁘긴 한데 너무 고자세에요. 자기는 가만히 있으면서, 왜 내가 분위기를 맞춰야 돼요?"
후배는 물고 있던 담배를 끄고 철수를 꼬아 보더니 다시 담배 하나를 물었습니다.
"그건 그렇네."
그래, 따지고 보니 그렇네요.
철수는 어색하기는 했지만 무언가 말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근데 후배는 고자세로 앉아 답을 제외하곤 거의 말이 없었어요.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든 건 춘옥이 잘못도 있네요.
"춘옥씨?"
어쭈 나하고 말을 좀 나누었다고 자신감을 얻었을까요?
철수가 과감히 후배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말씀하세요."
"술 좋아하고 나이트 가는 거 좋아하죠? 그리고 친구들 만나면 생각없이 떠들죠?"
"어떻게 알았어요?"
이 녀석 갑자기 말을 잘하네요.
"우리 또래 여학생들 놀면 대부분 그렇게 놀죠? 노래방은 좋아해요?"
"간혹 가요."
"저는 그런거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근데 여자분이 그걸 좋아하면 나도 그런 걸 좋아하도록 강요 받아요. 미팅 나가면 전부 여자들 비위에 맞추고 말이야. 그리고 하는 것도 꼭 같아요. 인사 나누고 술먹고 노래방 가고. 맨날 그거야. 낙엽지는 공원을 말없이 걸어도 보고, 그냥 손잡고 서서 어느 화가의 그림도 구경하며, 솜사탕 가지고 벤취에 앉아 비둘기를 반겨도 보는 그런 것도 한번 해 보면 좋잖아요.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을 수 있어요. 상대방 표정이 저런데 내가 자연스럽게 말을 건넬 수 있겠어요?"
"바보야, 그런 건 연인들이 하는 거지. 처음부터 그렇게 하는 남,녀가 어딨냐?"
"못할 건 또 뭐 있어요. 서로 관심사가 다르면 하나는 포기하고 하나는 받아 들이고 해야지요. 왜 저 여자에게 내가 전적으로 맞추어야 되는데?"
"넌 여자 친구가 없잖아. 잘 보여야 쟤가 네게 호감을 가질 거 아냐."
"나 안해 씨. 나 담배 피는 여자 싫어. 예뻐서 참을려고 했는데 자기는 내게 전혀 말을 하지 않으면서 어색한 분위기는 다 나 때문이래."
"전 그런 말 안했어요. 처음부터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아 말을 아꼈던 것 뿐이에요."
역시 후배는 공주 다웠어요.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철수에게 잘라 말하네요.
쟤 나보다 더 공주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춘옥씨 태도 보고 나도 알았어요. 그리고 이 여자가 자꾸 내게 무안을 주었단 말이에요."
철수 녀석이 내게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뭐 이 여자?
"너 죽을래?"
"누나. 저 고등학교 때 쌈 잘했습니다. 나보다 한 뼘도 더 큰 놈들이 내 앞에
서 벌벌 기었어요. 그런 나한테 한 주먹거리도 안되어 보이는 누나가 지금 겁주는 거에요?"
"너 쌈 못한다 그랬잖아."
"잘 합니다. 누나 집 앞에서 만났던 그 놈에게 했던 짓 보면 모르겠습니까? 자신이 있었으니까 대들었던 거 아닙니까."
"너 요즘 나하고 많이 맞 먹는다?"
"그 한 학년 차이 가지고 너무 재지 맙시다."
"얘 좀 봐. 학번으로 따져야지."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너무 그런 거 따지지 말자구요."
"같이 늙어 가? 나 한창 때야. 그리고 연상이라서 싫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이제 같이 늙어 가는 처지라고라?"
"헤, 누나하고 친하니까 그러는 거지. 한 마디만 더해도 돼요?"
"뭐?"
"곱게 늙어요. 누나 이런 모습 보니까 우리 뒷집 쌈쟁이 할머니가 생각이 나네요."
"이게 진짜."
"잘못했어요. 누나."
한대 죠패 버릴까?
"맞먹을 때 맞먹더라도 이 여자, 저 여자라는 말은 하지 마라."
"응?"
"왜?"
내가 철수랑 싸우는 동안 후배는 집에 가버렸네요.
"누나 때문에 갔잖아요."
"처음부터 텄었어."
"잘 할 수 있었는데..."
"뭘 잘해. 넌 소개팅이나 미팅 타입은 아니다."
"진짜 갔을까요?"
"걔 보니까 완전 공주로 변했더라. 미련 갖지 마."
"나는 그럼 이제 뭐해요?"
"나랑 놀지 뭐."
"에이, 연상은 싫다니까."
"그럼 아까 잘 하지."
녀석과 난 낙엽지는 마로니에 공원을 말없이 걸어도 보고, 벤취에 앉아 솜사탕도 먹었습니다. 그리고 역술하는 아저씨께 사주도 봐 보구요.
"누나 생일이 참 늦네요. 나랑 꼴랑 1년 하고 5개월 차이 밖에는 나지 않아요."
"그래서 맞먹을려구?"
"11월 14일이라."
"그 날은 신경 꺼. 만날 사람 따로 있으니까."
"앞서 가지 마요."
철수의 팔짱을 끼고 그림 그리는 거 쳐다 보다가 모델도 서 봤죠.
"팔짱 끼지 마요. 오해 받아요."
"왜? 연인처럼 보일까 봐? 넌 오히려 영광이잖아."
"제가 연하잖아요. 21살이 23살 보다는 엄연히 비싼 나이에요."
"넌 항상 미팅 나가서 깨지는 별 볼일 없는 애고, 나는 인기있는 미모의 여대생이야!"
## 이글은 이현철님의 '연하가 뭐 어때'라는 글을 퍼온 것입니다...##
가을의 향기 짙은 10월이 중순을 넘어 섰습니다.
하늘은 더욱 높아 고왔고, 그에 반한 초목의 색깔은 울긋불긋해 졌지요.
승주는 아직도 연락이 없습니다.
한 주가 새로 시작되었습니다.
시험이 끝난 다음 주라 맘 편하게 등교를 했지요.
나처럼 착한 선배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세요.
그냥 지나치는 후배 하나를 뛰어가 붙잡고서는 밥 사주겠다고 했습니다.
감사 할 줄도 모르는 나쁜 놈이지만 녀석하고 밥을 먹으면 그냥 재밌어요.
"아, 올해도 눈오는 마로니에 거리를 나 혼자 걸어야 하는구나. 어떤 여자는 후배하나 소개시켜 준다더니 여태 깜깜 무소식이다. 아마 후배를 만들어서 소개시켜 주려나 보다. 아, 풍성한 수확의 계절 가을이라더니 나는 홀로 가슴만 태우는 구나."
"궁시렁 거리지 말고 밥이나 먹어."
철수 녀석은 내가 후배 소개시켜 준다는 말을 뱉은 후로 계속 후배 언제 소개시켜 주냐고 치근됩니다.
말을 했으니까 소개 시켜주어야 겠죠.
시험도 끝이 났는데, 이 번 주말에 녀석에게 소개팅이나 주선해야 겠네요.
녀석이 좋아할 만한 예쁜 후배가 하나 있긴 하지요.
근데 저 녀석이 걔의 눈에 찰까요?
시간이 갈수록 정이 가는 녀석이니까, 첫인상만 잘 심어 주면 후배가 녀석에게 호감을 가질 수도 있겠군요.
앞에 나같이 예쁜 숙녀를 앉혀 놓고 저기 미니 스컷 입고 가는 여학생을 쳐다 보는 녀석에게 소개팅 시켜 주기가 꺼림직 하긴 하지만요.
"그럼 너, 이번 주말 오후에 시간 비워 놔."
"저 항상 시간 비워 놨었어요. 왜? 진짜 소개팅 시켜 주게?"
"그래. 예쁘게 꾸미고 나와."
"사내에게 예쁘단 말이 뭡니까? 멋있게, 쌈박하게, 섹쉬하게... 가만, 섹쉬하게는 좀 그렇다."
"알았어. 멋있고 쌈박하며 섹쉬하게 꾸미고 나 와. 만날 장소로 어디가 좋을까?"
"섹쉬하게는 빼요. 플라타너스 마른 잎이 날리고, 무명 가수의 기타 소리가 좋은 곳. 마로니에 공원에서 만나기로 하죠."
"엉? 공원에서 만나게?"
"그 근처 커피샾 말이죠. 공대생도 아닌데, 꼭 끝까지 설명을 해야 알아 들어
요? 케에프씨 뒤편에 세커피샾에서 만나죠. 저녁 다섯 시 정각 작전을 수행합시다."
"후후, 그래. 그 시간, 그 장소로 약속을 잡으마."
"꼭 약속 지켜요. 근데, 누나도 나올 거에요?"
"그럼, 내가 소개 시켜 주는건데."
"예전부터 내려 오는 정설이 있지요. 소개팅이나 미팅에서 주선자는 항상 자기보다 미모가 떨어지는 애들을 데리고 나온다."
"나는 어쩔 수 없잖아. 나 보다 예쁜 여자를 아직 못 봤거든."
"그렇게 한 평생 살다 가세요. 우리 뒷 집 쌈쟁이 할머니도 그렇게 생각하며 살았을 거에요. 그러니까 아무에게나 시비 걸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지."
"치, 한번 더 너네 뒷집 할머니 얘기하면 소개팅이고 뭐고 없다? 그리고 내가
소개시켜 주는 걔 예뻐. 그러니까 많은 기대하고 나와도 돼. 쯧쯧, 니가 좀 많이 딸리겠다."
"이 봐요 홍은정씨. 제가 진짜 여자 애들에게 인기가 없게 생겼나요? 왜 미팅
나가서 계속 죽을 쑤는 지 모르겠어요."
녀석이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물어 보네요.
아픔이 있나 보지요?
철수는 생긴거 뭐 그렇게 나무랄 데 없고, 키도 그런대로 작은 편은 아니고, 하는 짓도 귀여운 구석이 많지요.
그리고 글도 잘 쓰는 것 같고, 또 순진한 것도 맘에 드는 괜찮은 애지요.
내가 느낀 녀석에 대한 평가는 좋은 쪽이에요.
근데 뭐, 홍은정씨? 맞먹어라 짜샤.
"이 봐요. 박철수군."
"네, 제 앞이라 거짓말 하지 말구요. 솔직히 말해 주세요. 제가 진짜 인기 없
게 생겨 먹었어요?"
"응. 생긴 거 떨어지지. 키 작지. 이상한 말들 잘 하지. 너 잘하는 건 있니? 여
자에게 매일 밥이나 얻어 먹는 주제에."
"밥 사준게 아까웠어요? 매일은 아니잖아요."
"누가 아깝대? 그래 하는 짓도 얄밉잖아. 나에게 하는 짓 보면 미팅 나가서 죽쑬만 해."
"그렇군요. 밥 잘 먹었습니다."
철수는 밥 숟가락을 턱 내려 놓았습니다.
불쌍한 표정을 짓고선 고개를 푹 숙이고 일어 났습니다.
힘이 없어 보이는군요.
"왜 그래? 밥 그만 먹을거야?"
"누나에게 진실을 듣고 나니 밥 맛이 없네요. 나 먼저 갈게요."
"야, 같이 가. 소개팅은 어떡 할거야?"
"당연히 해야지요.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잊어 버릴 거에요."
"뭘?"
"누나가 나 씹은 말이요. 누나는 잘나서 좋겠수."
상당히 속이 좁은 녀석이네요.
내가 한 말을 모두 그대로 받아 들였나 보네요.
어떤 때는 상당히 똑똑해 보이다가도, 녀석은 자주 상당히 바보스럽습니다.
녀석은 어깨가 쳐진 초라한 모습을 한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학생 식당을 나갔습니다.
"야, 박철수."
"왜요?"
"어디가?"
"누나는 수업 들어가세요. 나는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요."
"너 그렇게 인기 없게 생기지 않았어."
"한 번 내뱉은 말은 줏어 담을 수가 없지요. 밥 잘먹었어요."
"어디가? 나 수업 시작하려면 조금 더 있어야 된다 말이야. 자판기에서 커피 뽑아 줄까?"
"당구장에도 커피는 줘요."
"뭐?"
"밥을 먹었으니께, 한 게임 해야지요."
철수는 어깨가 쳐진 채, 무거운 발걸음으로 당구장을 가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저 녀석 불쌍한 표정에 넘어 가지 말아야 겠다는 각오를 해 봅니다.
이번 주도 목요일까지 생각없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시월달도 얼마 남지 않았어요.
녀석이 시험이 끝났는데도 불구하고 도서관을 다닌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저녁 시간 열람실을 가 보았지요.
철수를 찾기가 힘들었어요.
엎어져 자고 있었거든요.
저럴 걸 왜 열람실에 나왔는지 모르겠네요.
녀석의 등뒤에 서서 그가 연습장에 적어 놓은 무언가를 보았습니다.
내가 가을이 되고, 가을이 내가 되니
가을 속에 내가 있고, 가을 또한 내 마음 같다.
그리움을 잡고자 내가 그리움이 되니
그리움이 내 곁에 있어 나는 행복하다.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다.
뭘까요.
전공 책 옆으로 연습장에는 시 한편이 적혀 있었습니다.
"은정아."
누군가 내 등을 쳤습니다.
"어? 정희구나. 약사 고시 때문에 바쁘지?"
"응, 도서관에는 어쩐 일이야?"
"응? 이 녀석 보러 왔지. 동아리방에 갔더니 요즘 얘가 계속 도서관 나 간다고 해서."
녀석이 엎드려 자는 좌석의 옆자리는 정희의 자리였습니다.
그럼 아까 철수가 적어 놓았던 시는 정희를 위한 시였나요.
이 녀석 연상은 싫다더니, 정희를 흠모하고 있었던 거 아닙니까.
기분이 좀 나쁘네요.
"커피 한 잔 할래?"
정희가 나를 보자 다시 밖으로 나가자 하는군요.
철수야 침은 흘리지 말고 자라.
"저 녀석 깨워서 갈까?"
"얘는 놔 둬. 나오기 싫은 도서관 나 때문에 억지로 나오고 있는데."
"왜?"
"요즘 내가 좀 외롭다 했거든."
"그 좀 조용히 합시다."
어머, 내게 조용히 하라고 하는 남학생도 있네요.
남자들은 나에게 저런 말 잘 못하는데.
도서관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바깥 공기가 제법 쌀쌀하네요.
"나, 당분간 그 사람 잊을거야."
"누구? 철규씨."
"응. 저번 주에 싸웠어. 투정을 좀 부렸더니 나보고 너는 왜 네 생각만 하니, 그러더라. 그 사람도 요즘 힘든가봐. 편해질 때까지 잠시 잊기로 했어."
"그게 무슨 잊는거니? 아예 헤어져라."
"넌 친구에게 고작 한다는 말이 그거니?"
"아휴, 그렇게 유지되는게 좋니?"
"몰라. 이렇게 사귀어도 없는 것 보단 나아."
"그건 그렇고 철수 쟤는 왜 도서관에 나오는 거야?"
"저 녀석이 월요일 밤에 내 방을 찾아 왔었어. 내가 녀석에게 넋두리를 좀 늘
어 놨었지. 훗훗, 자기가 곁에 있어 주겠다더군. 너무 외로워 하지 말라면서 말이야. 그리고서는 자주 날 찾아 왔어. 저렇게 도서관에서도 내 옆에 앉아 자다가곤 해."
"시를 하나 적어 놨던데?"
"심심하니까 그랬겠지. 레포트 있으면 레포트 쓰다 가고, 그렇지 않으면 연습장에 시를 쓰거나 당구대 그려 놓고 이론 연습을 하기도 하지. 날 배웅해 주기 위해 내가 자리에서 일어 날 때까지 도서관 자리를 지키는 것을 보면 대단하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해."
"그 녀석 참... 혹시 널 좋아하는 거 아냐?"
"모르지 뭐. 쟤가 내 입술을 처음 뺏은 애야."
"엉?"
"장난으로 한 입맛춤. 녀석은 그게 내 첫 입맞춤인 걸 모를거야. 너한테도 혹
시 눈감아 보라고 그러면 눈 감지 마."
"엉?"
"눈감아 보라기에 눈 감았다가 당했어."
"너하고는 오랫동안 친했나 보다?"
"어릴 때 같은 동네서 살았댔잖아. 녀석이 개구장이였거든. 옷이 헝클어져 있으면 내가 바로 잡아주기도 했고, 코를 흘리고 얼굴이 지저분하면 씻어 주기도 했지. 녀석은 날 친누나처럼 생각했을거야."
"너 그러다 연하 사귀게 되는 거 아냐?"
"훗, 남자같은 느낌이 들어야 사귀지."
"하여튼 챙겨 주는 사람 있어서 좋겠다?"
"응, 저 녀석 때문에 마음에 위로가 되긴 해. 참, 넌 어때? 승주씨와는 깨진거야?"
"좀 더 기다려 봐야지."
"너 요즘엔 같이 다니는 남학생이 없다? 승주씨 제대할 때만 기다리면서도 남학생 하나는 꼭 붙이고 다니던 너였잖아. 승주씨가 한 말 때문에 그러니?"
"아니야, 나 남학생 하나 달고 다니잖아."
"누구? 못봤는데?"
"철수 있잖아. 걔는 남학생 아니니? 걔 깨워서 밥이나 먹으러 가야 겠다."
"그러다 니가 연하 사귀는 거 아냐?"
"그 녀석이 연상은 죽어도 싫다는 데 뭘."
"나는 예외적으로 고려해 볼 맘이 있다던데?"
"내가 녀석에게 너만큼 고운 존재는 아닌가 보지 뭐."
솔직히 정희에게 질투가 나긴 했습니다.
내가 정희보다 예쁘고, 세련되고, 맘씨도 곱고.
맘씨 고운 건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잘하는 것도 많은데, 철수 고것이 나보다 정희를 더 좋아하고 있단 말이지요?
확 진짜 연하고 나발이고, 그냥 철수를 꼬셔 버릴까?
에그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요.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은 아마 승주 때문에 내 마음이 공허해 졌기 때문일겁니다.
저녁 가을도 한 몫 거드네요.
"뭐해요? 출발 합시다."
"오늘은 바로 앞으로 와서 앉네?"
"누나 운전하는 거 잘 봐야지요. 곧 주행 시험이 있는데."
"엿 사줘야 되니?"
"당연하죠. 그게 이만 저만 어려운 시험이 아니잖습니까. 참, 누나 면허증 잠깐 줘 봐요."
"왜?"
"줘봐요 좀."
백에서 다이어리를 꺼내 면허증을 빼 주었습니다.
"푸헬헬, 뭐야 이거? 이종 보통이잖아. 푸하핫, 전 일종 보통입니다. 그리고
이 사진 누나 맞아요?"
"그렇다."
"푸헬헬, 누나 성형 수술 했어요? 아니면 화장발인가? 이 사진 대학 갓들어 갔을 때 찍은 사진이죠? 누나도 이때는 뭐 별로 예쁘지 않았네요."
"그때는 급히 찍은 사진이라 그래. 내 주민등록증 보여줄까?"
"됐어요. 출발 합시다 이종 기사."
"아직 면허증도 없는게."
"곧 생깁니다. 일종 보통으로 말이지요. 출발해요, 이종 보통 홍기사."
"너 자꾸 날 그런식으로 부를래? 확, 내일 소개팅 취소 시킨다?"
"쩝! 출발하세요 예쁜 누나님."
짜식이 말이야.
면허증에 붙은 사진도 그런대로 예뻐 보이는데...
면허증 다시 만들어야 겠네요.
철수에게는 말을 그렇게 했지만, 후배에겐 괜찮은 놈이라 해 주었죠.
솔직히 철수 자랑을 좀 많이 했죠.
그랬다고 후배 이 기집애가 이런 예쁜 모습으로 나올 줄이야.
나는 그냥 청바지에 스웨터 하나 걸치고, 화장도 하지 않고 나왔는데 후배는 미니 스컷 세미 정장에 세련된 화장을 하고 드라이를 곱게 했는지 긴 머리칼이 여린 바람에도 찰랑찰랑 흔들리네요.
제가 좀 위축되는군요.
하기야 뭐 전 주선일뿐인데요.
근데 이 자식은 왜 안나오는거야.
후배와 마주 앉아 십여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얘도 상당히 공주네요.
철수는 지딴에는 아주 꾸미고 나왔습니다.
그런대로 봐 줄만 하네요.
나와 내후배를 보고 나서 이 녀석의 분위기가 많이 다릅니다.
뻣뻣하게 서서 인사를 하더니 수줍게 내 옆으로 와 앉았습니다.
"누나, 정설을 깨셨군요."
뭐야 임마?
내가 꾸미면 어디 얘 정도겠냐. 녀석이 내 외모를 몰라 주네요.
"서로 소개들 해."
"아, 안녕하세요. 참 예쁘시네요. 전 섹스바이러스하우스 유니버시티 정보 공학과 93학번이구요. 박철수입니다."
어이가 없다.
딱딱하게 굳어서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애한테 학교 이름가지고 유머랍시고 말하는 철수가 어이가 없다.
후배에게 내가 대신 미안하다는 웃음을 던져 주었다.
"안녕하세요. 전 명륜동에 있어요. 국문학과 93학번이구요. 이름은 송춘옥이에요."
"아 네, 이름도 참 예쁘시네요."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그 말을 내 뱉었을까요.
철수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주었습니다.
후배가 자기 이름에 대해 컴플렉스가 많아요.
철수가 오고 난 뒤 십 여분 동안 엄청 썰렁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계속 됐습니다.
"전 콜라요."
메뉴판을 갖다 준 서빙 아가씨가 왔을 때, 후배는 콜라를 시켰어요.
철수는 후배를 빼꼼히 쳐다 보다가 넌지시 말을 뱉었습니다.
"코,콜라는 상대가 맘에 들지 않을 때 시키는 건데요. 다른 거 시키시면 안될까요?"
"네? 전 모르고 시킨건데, 그냥 갈증이 나서요. 그럼 닥터 페퍼로 할게요."
"그것도 콜라거든요?"
"네?"
나는 또 후배에게 웃음을 띄워 주었습니다.
그리고 철수의 허리를 쿡 찔렀지요.
"누나는 집에 안가요?"
이게, 후배에게는 발음도 제대로 못하며 떨고 있는 주제에. 내게는 큰 소리를 치는군요.
내 앞에서 식은 땀을 흘리던 남자들이 다 그립네요.
내가 가 봐라, 이 어색한 분위기 완전 파토나지.
주문 할 때 오고 갔던 말들은 참 재미난 말들이었군요.
철수 녀석은 아주 썰렁했습니다.
지나간 농담 어쩌다 한 마디 뱉고선 혼자 웃었습니다.
그리고 후배 가족 조사 할 일 있습니까?
보약 얘기는 왜 했을까요?
취미는?
당구는 쳐요?
소용없는 질문만 던지는 철수가 무척이나 안타깝습니다.
또 왜 저리 떤답니까?
후배는 답만 간단히 하고 자꾸 저만 쳐다 봅니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후배가 대견스럽습니다.
철수는 더 이상 물어 볼 말이 생각나지 않는지 골똘히 머리를 굴리다가 십초동안 말을 하고 간단히만 답을 하는 후배를 보고 웃습니다.
그리고 삼 분 정도 침묵하는 군요.
십초 정도 말을 걸고, 이 삼분 침묵하고...
내가 만약 철수 같은 애와 소개팅을 했다면, 난 그냥 아무 말없이 나가 버립니다.
저 녀석이 왜 미팅에서 죽만 쑤는지 이해가 되네요.
재미 진짜 없는 놈이에요.
가만 나랑있을 때는 재밌는데?
"저 담배 펴도 돼죠?"
어머 얘 좀 봐. 언제 담배를 배웠지? 후배는 한쪽으로 비스듬히 자세를 고쳐 앉고서는 다리를 꼬았습니다.
참, 섹쉬하네요.
그리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습니다.
철수는 정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담배는 몸에 좋지 않은데..."
"야아."
허리 찌르는 것만으로는 이제 안되겠더군요.
"누나는 집에 안가요?"
"이런 분위기 만들어 놓고선 나보고 집에 가라구?"
"처음엔 다 이런 거죠 뭐."
"처음에 이러면 누가 다시 만나 주니?"
"나보고 어떡하라구요?"
후배가 담배 피는 동안 철수는 나와 얘기했습니다.
나한테는 얘기 잘 하네요.
"뭘 어떡해? 재밌게 좀 해 봐. 어색하고 따분해서 앉아 있기 진짜 싫다."
"하, 그럼 가세요."
"이 자리 파토나게?"
"내 잘못만은 아니잖아요. 저 분도 별로 말을 안해요."
"니가 그렇게 형식적인 질문만 하니까 그렇지. 서로의 공통적인 관심사가 뭔지 알아보고 그 쪽으로 대화를 이끌어야지. 그리고 넌 유머 감각도 없니?"
"아, 내가 말을 많이 하면요. 싸가지 없다 그래요. 상대도 뭔가 내 관심사에 대해서 물어 보면 좋잖아요. 말을 않고 가만히 있어도 뭐라 그러고, 말은 많이 하면 촉새같다 그러며 촐랑되지 말아라 하고. 나보고 어떡하란 말인데?"
후배는 둘이서 잘 논다는 식으로 쳐다 보네요.
"말도 더듬고, 재미 없는 질문만 하고 그렇다고 매너가 좋냐? 쯧쯧, 넌 여자 사귀기 진짜 힘들겠다."
"재수 없는 말 하지 마요. 안 그래도 뼈아픈 현실 때문에 고민이 쌓여 가는데
누나는 이제 집에 가요. 주선이 염치도 없이 끝까지 개기고 있어 씨."
"뭐야?"
"왜 자꾸 허리를 찔렀냔 말이에요. 그것 때문에 더 소극적으로 되잖아요."
"니가 점수 깍이는 말을 하니까 그렇지."
"사람이 실수를 할 수도 있는 거죠. 그렇게 배워가는 거 아닙니까. 저 아가씨
예쁘긴 한데 너무 고자세에요. 자기는 가만히 있으면서, 왜 내가 분위기를 맞춰야 돼요?"
후배는 물고 있던 담배를 끄고 철수를 꼬아 보더니 다시 담배 하나를 물었습니다.
"그건 그렇네."
그래, 따지고 보니 그렇네요.
철수는 어색하기는 했지만 무언가 말을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근데 후배는 고자세로 앉아 답을 제외하곤 거의 말이 없었어요.
분위기를 썰렁하게 만든 건 춘옥이 잘못도 있네요.
"춘옥씨?"
어쭈 나하고 말을 좀 나누었다고 자신감을 얻었을까요?
철수가 과감히 후배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말씀하세요."
"술 좋아하고 나이트 가는 거 좋아하죠? 그리고 친구들 만나면 생각없이 떠들죠?"
"어떻게 알았어요?"
이 녀석 갑자기 말을 잘하네요.
"우리 또래 여학생들 놀면 대부분 그렇게 놀죠? 노래방은 좋아해요?"
"간혹 가요."
"저는 그런거 별로 좋아하지 않거든요. 근데 여자분이 그걸 좋아하면 나도 그런 걸 좋아하도록 강요 받아요. 미팅 나가면 전부 여자들 비위에 맞추고 말이야. 그리고 하는 것도 꼭 같아요. 인사 나누고 술먹고 노래방 가고. 맨날 그거야. 낙엽지는 공원을 말없이 걸어도 보고, 그냥 손잡고 서서 어느 화가의 그림도 구경하며, 솜사탕 가지고 벤취에 앉아 비둘기를 반겨도 보는 그런 것도 한번 해 보면 좋잖아요.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을 수 있어요. 상대방 표정이 저런데 내가 자연스럽게 말을 건넬 수 있겠어요?"
"바보야, 그런 건 연인들이 하는 거지. 처음부터 그렇게 하는 남,녀가 어딨냐?"
"못할 건 또 뭐 있어요. 서로 관심사가 다르면 하나는 포기하고 하나는 받아 들이고 해야지요. 왜 저 여자에게 내가 전적으로 맞추어야 되는데?"
"넌 여자 친구가 없잖아. 잘 보여야 쟤가 네게 호감을 가질 거 아냐."
"나 안해 씨. 나 담배 피는 여자 싫어. 예뻐서 참을려고 했는데 자기는 내게 전혀 말을 하지 않으면서 어색한 분위기는 다 나 때문이래."
"전 그런 말 안했어요. 처음부터 별로 관심이 가지 않아 말을 아꼈던 것 뿐이에요."
역시 후배는 공주 다웠어요.
표정하나 바뀌지 않고 철수에게 잘라 말하네요.
쟤 나보다 더 공주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춘옥씨 태도 보고 나도 알았어요. 그리고 이 여자가 자꾸 내게 무안을 주었단 말이에요."
철수 녀석이 내게 손가락질을 했습니다.
뭐 이 여자?
"너 죽을래?"
"누나. 저 고등학교 때 쌈 잘했습니다. 나보다 한 뼘도 더 큰 놈들이 내 앞에
서 벌벌 기었어요. 그런 나한테 한 주먹거리도 안되어 보이는 누나가 지금 겁주는 거에요?"
"너 쌈 못한다 그랬잖아."
"잘 합니다. 누나 집 앞에서 만났던 그 놈에게 했던 짓 보면 모르겠습니까? 자신이 있었으니까 대들었던 거 아닙니까."
"너 요즘 나하고 많이 맞 먹는다?"
"그 한 학년 차이 가지고 너무 재지 맙시다."
"얘 좀 봐. 학번으로 따져야지."
"같이 늙어 가는 처지에 너무 그런 거 따지지 말자구요."
"같이 늙어 가? 나 한창 때야. 그리고 연상이라서 싫다고 말할 때는 언제고 이제 같이 늙어 가는 처지라고라?"
"헤, 누나하고 친하니까 그러는 거지. 한 마디만 더해도 돼요?"
"뭐?"
"곱게 늙어요. 누나 이런 모습 보니까 우리 뒷집 쌈쟁이 할머니가 생각이 나네요."
"이게 진짜."
"잘못했어요. 누나."
한대 죠패 버릴까?
"맞먹을 때 맞먹더라도 이 여자, 저 여자라는 말은 하지 마라."
"응?"
"왜?"
내가 철수랑 싸우는 동안 후배는 집에 가버렸네요.
"누나 때문에 갔잖아요."
"처음부터 텄었어."
"잘 할 수 있었는데..."
"뭘 잘해. 넌 소개팅이나 미팅 타입은 아니다."
"진짜 갔을까요?"
"걔 보니까 완전 공주로 변했더라. 미련 갖지 마."
"나는 그럼 이제 뭐해요?"
"나랑 놀지 뭐."
"에이, 연상은 싫다니까."
"그럼 아까 잘 하지."
녀석과 난 낙엽지는 마로니에 공원을 말없이 걸어도 보고, 벤취에 앉아 솜사탕도 먹었습니다. 그리고 역술하는 아저씨께 사주도 봐 보구요.
"누나 생일이 참 늦네요. 나랑 꼴랑 1년 하고 5개월 차이 밖에는 나지 않아요."
"그래서 맞먹을려구?"
"11월 14일이라."
"그 날은 신경 꺼. 만날 사람 따로 있으니까."
"앞서 가지 마요."
철수의 팔짱을 끼고 그림 그리는 거 쳐다 보다가 모델도 서 봤죠.
"팔짱 끼지 마요. 오해 받아요."
"왜? 연인처럼 보일까 봐? 넌 오히려 영광이잖아."
"제가 연하잖아요. 21살이 23살 보다는 엄연히 비싼 나이에요."
"넌 항상 미팅 나가서 깨지는 별 볼일 없는 애고, 나는 인기있는 미모의 여대생이야!"
## 이글은 이현철님의 '연하가 뭐 어때'라는 글을 퍼온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