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겨울은 따뜻했지만 외로웠습니다.
아니군요.
외로웠지만 따뜻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라는 눈이 오네요.
오늘 아침 내 창가에 눈이 기웃거렸습니다.
기분 좋게 내리지만 쌓이지는 못하고 눈물을 떨구어 버립니다.
하늘에서는 반가운 것이 내리지만 쌓였던 것은 지워져 버립니다.
요즘은 철수 그 녀석이 자주 보고 싶어요.
무슨 감정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같이 있고 싶은 녀석입니다.
눈이 오면 누군가와 그 눈 속을 거닐고 싶어요.
아무리 방학이지만 철수 녀석, 일어 났겠죠?
삐삐를 쳐 보았습니다.
호호, 바로 전화가 오네요.
"0865로 삐삐 치신 분인가요?"
에그, 항상 이렇죠.
"너 내 헨드폰 번호 모르니?"
"아, 알지만 다 이렇게 물어 보더라구요. 왜 삐삐를 치셨나요?"
"눈 오거든?"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눈 온다구."
"겨울에 눈 오는 거 당연하잖습니까."
"에그 인간아. 여자가 눈 온다고 전화를 하는 것은 어디 근사한 곳으로 가고 싶거나 낭만적인 만남을 기대하는 것이거든? 뭐? 겨울이니까 눈 오는 거 당연하다구?"
"그런 걸 왜 나한테 기대를 해요?"
"자기 생각을 해 주면 감사할 줄 알아야지. 어디 교외로 드라이버 나갈래?"
"눈 오는데 차를 몰고 교외를 나가요? 눈 오면 교통 체증이 얼마나 심한데..."
"내가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됐을까? 너 그러면 진짜 여자 못 사귄다."
"어디 가고 싶은데요?"
내 의도대로 따라 오지만 꼭 기분좋게 따라 오지는 않죠.
그것이 녀석의 매력인가 봅니다.
크리스 마스가 다가 온다.
오늘 같은 눈은 크리스마스 이브날 내려야 하는데, 나 태어나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감성이 물들지 않았던 초등학교 1학년 때를 제외하곤 한 번도 이루어 지지 않았다.
서울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먼지가 끼여 별로 하얗지 못할 것이다.
우리 학교 근처만 해도 그런대로 깨끗한 하얀 눈일게다.
서울 하늘은 매연이다, 먼지다 하여 눈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잔뜩 끼여 있다.
우리집 옥상에서 맞는 눈은 먼지 바닥에 잘 못 넘어진 신부의 웨딩드레스 같은 빛이다.
오늘 아침에 밥을 먹는데, 창 가로 하얀 것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감성이 풍부한 것 같다.
아무도 눈오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나는 밥을 먹고 난 뒤, 옥상으로 올라 갔다.
그리고 눈을 반겼다.
아래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쌓인 눈을 모아 내리는 것보다 많은 눈을 던져 주고는 숨곤 했다.
"어떤 놈이 눈을 던진겨?"
쌈쟁이 할머니에겐 함부로 장난 치지 말아야 겠다.
눈이 내린다.
제 죽을 곳이 땅 임을 알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냥 내리고 있다.
눈물 흘려야 할 이별을 알진데 무슨 깊은 그리움이 있는지 잠시간의 만남을 위해 제 죽을 곳으로 부질없이 내려 앉는다.
"지이잉!"
옥상에서 추위에 떨면서도 눈을 반기며 청승을 떨고 있는 데 삐삐가 울렸다.
나에게 삐삐 쳐 주는 사람은 은정이 누나 뿐이다.
삐삐 번호를 친구 두 명에게 알려 주었지만 그 놈들은 아직 한 번도 삐삐를 쳐주지 않았다.
하기야 한 놈에겐 군입대하는 날 가르쳐 주었으니 하고 싶어도 못할 것이다.
내 추리닝 바지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삐삐가 울렸다.
거의 죽어 있는 삐삐라서 집에 있을 때도 항상 가지고 다닌다.
은정이 누나가 연락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삐삐를 꺼내 보았다.
눈을 맞으며 삐삐 번호를 확인하는 것도 낭만이 있다.
삐삐가 울리면 만남이 있다.
보나마나 은정이 누나의 핸드폰 번호가 찍혀 있겠지만 드물게 잘 못 걸려 온 번호일 수도 있기에 확인을 했다.
은정이 누나구만.
눈 오는 데 어디 교외라도 나가자고 했으면 좋겠다.
"용인 쪽으로나 내려 가 볼래?"
이 여자가 날 닮아 가나요?
그 쪽 눈은 깨끗하겠지요? 눈이 많이 오진 않지만 분명 운전하는 데 있어 애로사항이 있을 법 한데.
무모하네요.
그래도 반가운 말이다.
"용인 쪽은 왜 가는데요?"
"자연농원 가자. 눈 오는 날, 공원 가면 재미 있을 것 같아."
"가까운 곳에 롯데 월드 있잖아요."
"거긴 실내잖아."
"얼어 죽고 싶어요?"
"가기 싫음 말아. 예전부터 꼭 토를 달아요."
"내가 따라 갈 줄 알고 연락한 거 아니었어요?"
"응."
"가기 싫음 말아라는 소린 뭐에요?"
"그냥 해 보는 소리."
"진짜 운전해서 갈려구요?"
"응."
"데리러 올 거에요?"
"30분 뒤에 길가로 나와."
눈 오는 마로니에 공원을 여자친구와 팔짱 끼고 거니는 것은 언젠가 실현이 되
겠지요.
오늘은 자연농원이나 가자.
추위에 단단히 대비를 했다.
큰 장갑을 끼고 두툼한 목도리를 했다.
모직 자켓은 이런 날 쥐약이다.
무스탕도 쥐약이다.
내 외투중에 모직 자켓이나 무스탕은 없다.
그냥 있는 척 해 봤다.
우주복 같은 조끼 패딩을 속에 받쳐 입고, 스키복 같은 다운파커를 또 껴 입었다.
그래도 불안해서 패션 돌돌이 모자까지 썼다.
밑이 허전해서 속바지를 껴 입었다.
준비 완료다.
"어디 가냐?"
"자연 농원에요."
"눈 오는데 미쳤냐?"
우리 아버지가 근엄하시게 말씀 하셨다.
"용돈 좀 주십시오."
그래서 근엄하게 대답을 했다.
"자주 전화 오던 그 아가씨가 꼬시던?"
또 근엄하시게 물으셨다.
"네."
당연하다는 듯 대답을 했다.
우리 아버지가 혀를 차신다.
혀를 차시는 울 아버지가 별 말씀 하지 않고 근엄한 표정으로 거금 10만원을 주셨다.
"올 때 같이 정신병원이나 들렸다 와라."
마지막 말씀을 하실 땐 근엄하시지 않으셨다.
나는 모르겠는데, 은정이 누나는 정신 상담을 받아야 겠다.
심각한 공주 증세가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누나는 꼴랑 니트 하나에 바람이 잘 통할 것 같은 정장용 바지를 입고 있었다.
뒷좌석에 벗어 던져 놓은 쟈켓 또한 별로 두꺼워 보이지 않았다.
차 안의 따뜻한 온도에 바깥 기온을 인식하지 못했나 보다.
"그런 차림으로 안 춥겠어요?"
"너처럼 두툼하게 입으면 둔해 보이잖아. 내 날씬한 몸매가 죽어 버리거든."
"자연 농원 그냥 구경만 하다 올거에요?"
"무슨 소리야, 탈 거 다 타야지."
"추울텐데..."
"옷 벗어 달란 소리 안할테니까 염려 마. 나 보기는 이래 보여도 감기 한 번 안걸려 본 여골이야."
"진짜에요?"
"그럼. 그리고 나 추위를 별로 타지 않아."
보통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려 자연 농원에 도착했다.
눈은 많은 양은 아니지만 계속하여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운전해서 피곤했을 만도 한데 누나는 자연 농원의 놀이 기구들을 보자 흥분이 되는 모습이다.
나이 많다고 자랑을 하더니 나보다 더 어려 보이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청룡열차도 타고, 후룸라이드도 타고 음, 바이킹도 타자."
후룸라이드는 물이 얼어서 타지 못했다.
차에서 내리자 마자 추위가 바로 느껴졌다.
얼레? 누나는 춥지 않은 듯, 벗어 놓은 외투를 걸치고 즐거운 표정으로 매표소 앞으로 뛰어갔다.
너무 얻어 먹을 수만 없었다.
용돈 받은 것도 있는데...
"자유 이용권으로 두장 주세요."
내가 표를 샀다.
사고 나니까 좀 아깝다.
하루 종일 당구 치고 탕수육 시켜 먹어도 남을 돈이 나갔기 때문이다.
자연 농원을 입장한 시간은 12시 정도였다.
푸하하, 그 동안 당했던 설움을 한꺼번에 씻는 듯 했다.
"이제, 바이킹을 타러 갑시다."
사람들이 거의 없던 관계로 타고 싶은 거 맘대로 탔다.
"나 추워. 이제 가자."
"무슨 말씀, 자유 이용권인데 다 타 봐야지요."
누나가 너무 추위에 떠는 것 같아 파커를 벗었다.
그리고 패딩 하나를 벗어 주었다.
옷 벗어 달라는 소리 하지 않겠다는 말을 불과 몇 시간 전에 했던 거 같은데, 누나는 파커를 탐내는 눈 빛이다.
이건 줄 수 없다.
그래도 목도리는 벗어 주었다.
그래도 추웠을 것이다.
"야, 신난다!"
바람을 가르며 청룡열차가 하늘을 날았다.
청룡 열차에 탄 사람?
누나하고 나 뿐이다.
두 번 탔다.
"나 이제 갈래."
"어허, 무슨 말씀. 한 번 더 탑시다."
돌돌이 모자를 내리 쓰고 신나게 탔다.
내 옆에서 청룡열차의 무서움 보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은정이 누나의 모습이 가여워 보였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고소하기도 했다.
눈 바람에 화장이 지워지고 빨갛게 솟은 가는 핏줄들로 누나의 모습은 더 이상 세련된 미인이 아니었다. 머리도 엉망이고 콧물까지 흘렸다.
"나 이제 안 타. 너 나뻐 씨."
"누나가 먼저 오자고 했잖아요."
"겨우 이것만 벗어 주고 말이야. 그리고 내 생각은 않고 계속 타자고 졸라되기나 하고..."
누나가 진짜 삐쳤나 봐요.
아무말 없이 그냥 밖으로 나가 버리네요.
따뜻한 커피 두잔을 사가지고 누나를 따라 갔다.
"옷은 벗어 주고 가야지!"
세시가 못 되어 자연 농원을 나왔다.
자유 이용권 괜히 끊었다.
차 안에서 누나는 히터를 최고로 틀어 놓고 코를 풀고 있었다.
그래도 튼튼한 여자다.
나도 상당히 추위를 느꼈는데, 겨우 저 것만 입고 내가 조른다고 탈 거 다 탔으면서 저 정도면 아주 튼튼한 여자라고 인정을 해 주어야 한다.
코를 풀고 난 다음 팩을 꺼내서 화장까지 고친다.
그 곱던 하얀 손은 검붉게 변해 있었지만 물수건으로 몇 번 문지르고 크림을 바르니까 빠른 시간 내에 제 모습을 찾았다.
"약한 여자는 아니네요?"
"그럼, 내가 얼마나 튼튼한데. 그런 내가 코감기 걸렸어 너."
"여기 끌고 온 건 누나에요. 커피 드세요."
"원두 커피?"
"자판기에서 원두 커피도 팔아요?"
"그럼 나 안 마실래."
마시긴 싫음 마라.
창 밖은 눈이 제법 쌓였다.
하지만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운전대 앞에선 누나가 코를 풀고, 거울 보고. 코 풀고 거울 보고. 한 참 동안이나 차를 출발 시키지 않았다.
따뜻한 차 안에서 누나 옆에 앉아 있는 이 시간이 쌓인 눈 속에서 그냥 곱다.
그 고운 기분으로 옆에 앉은 누나가 또한 그냥 좋다.
저 누나를 연상이고 뭐고 간에 꼬셔 볼까?
불가능하겠다.
그리고 연인으로서 유지 시킬 자신도 없다.
아무리 장난 스럽게 말했다고 날 인정하지 않았던 정희 누나의 가벼운 말들에도 상처를 받았던 내가, 옆의 저런 여자를 어떻게 감당을 하겠냐.
요즘 누나가 외로움을 타는 것 같다.
좋아하던 사람에게 바람을 맞았는데, 외로움 탈 만도 하다.
잘난 여자기 때문에 다른 남자 만날 때까지 별로 긴 시간이 흐를 것 같지는 않지만 그 시간동안 가볍게 대할 수 있는 나를 자주 찾을 것 같다.
그러면 됐지 뭐.
시간은 네시에 가까워 졌다.
그러고 보니 밥도 먹지 않았다.
"출발 안 해요? 나 배 고픈데."
"그래, 가면서 식당 나오면 밥이나 먹자."
차는 아주 느릿하게 움직였다.
쌓인 눈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늘에선 또 눈송이가 하나 둘씩 떨어졌다.
외대 근처 어느 식당에서 따뜻한 갈비탕을 먹었다.
"갈비탕 사 주었다?"
"어, 기억하고 있었네. 그때 갈비탕 사 주지 않고 그냥 떠나 버린 누나를 얼마나 원망 한 줄 모르죠?"
"치, 먹는 것에 삶의 목적을 두는 것 아니니?"
"누나도 자취 해 봐요."
"나도 내년엔 자취나 할까?"
"차도 있는 사람이 자취는 무슨..."
"정희가 병원에 취직이 되었으니까, 자취방을 비우겠지? 그걸 내가 인수할까?"
"왜? 등,하교 하기가 힘들어요?"
"그건 아닌데, 4학년 때는 아무래도 늦게까지 학교에 있어야 될 일이 많을 것 같거든. 그리고 대학원 가게 되면 또 밤샐 일이 많을 것 같고."
"누나 대학원 갈거에요?"
"응. 어짜피 나는 직장이 정해 졌잖아. 울 아빠 약국 아니면, 울 엄마 병원."
"좋겠수."
"넌 군대 안가니?"
"나도 대학원 갈거요."
"잘됐네. 그럼 나하고 하나, 둘, 셋. 삼년은 더 학교에서 보겠다. 이렇게 데리고 다니다, 진짜 연인 사이로 발전하면 어떡하지?"
누나는 손가락질을 하고 난 다음 미소를 지었다.
그렇네.
삼년 동안 저 누나의 곁에 있으면, 오늘 같은 기분이 제법 많이 들 것이고, 혹시나 사랑하는 마음도 생길 수 있겠다.
안되는데...
누나가 연상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버거운 상대다.
에이, 될대로 되라.
"연상은 관심 없다니까."
"훗! 너 그 소리 언제까지 나오나 한 번 보겠어."
식당에서 속도 따뜻하게 만든 다음 밖으로 나왔다.
눈 졸라 온다.
뭉치면 산다는 식으로 떼거지로 땅에 내려 앉고 있었다.
그리움이 많으면 이별의 시간도 늦어 지겠군.
"이래 가지고 서울 갈 수 있을려나?"
"그래, 눈 오는 데 차 끌고 나올 때부터 뭔가 찜찜했어."
"너, 씨."
누나는 차를 조심스럽게 몰았다.
쌓이는 눈 때문에 차가 불안하게 흔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중으로 서울 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누나 차라리 학교로 가요."
"학교?"
"나는 내 자취방에서 자면 되거든요. 누나는 밤새 부지런히 운전 해 가면 내일 새벽에는 집에 들어 갈 수 있을거에요."
"뭐야?"
"나 졸라 심심해요. 누나는 운전이라도 하지."
"이게 진짜. 눈길이라 초보에게 운전을 맡길 수도 없고, 이런 날씨의 운전이 얼마나 짜증나고 피곤한 지 모르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 2,3킬로 미터 왔어요?"
"그거 보단 더 왔다."
"수원은 가까우니까, 학교로 가요. 정희 누나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정희 없어도 돼. 내가 니 방에서 자면 돼. 넌 친구 자취방 많을 거 아냐."
"내 방에요?"
"두 번이나 잤는데, 못 잘것도 없지."
"나도 내 방에서 잘거야."
"자라."
"남자 방인데 꺼림찍하지 않아요?"
"내가 너를 의식해? 아서라 얘야."
이건 분명 나를 무시하는 언사다.
학교까지 가는데도 세시간이나 걸렸다.
나는 혹시 누가 볼까 봐 주위를 살피면서 내 방문을 열었는데, 은정이 누나는 아주 당당하게 걸어 들어 왔다.
아무리 나를 동생으로 취급한다고 이건 너무했다.
아까 혹시나 했던 생각 접어야 겠다.
나는 누나가 샤워한다는 얘기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
눈은 하염없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떼거지로 내려도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다.
암만 쌓여 봐라.
해 한번 기분좋게 내리면 금방일 걸.
내가 들어 갔을 때 누나는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옷장 속에 넣어 놓은 거 어떻게 찾았을까?
"나도 옷 갈아 입어야 되요."
"갈아 입어라."
"나도 남자에요. 그리고 진짜 여기서 잘 거에요?"
"응, 넌 바닥에서 자."
"옷 갈아 입게 나가요."
"고개 돌리고 있을게."
"나도 자존심이 있어요."
좀 심각한 어조로 답을 했다.
"삐쳤니? 진짜 기분 나쁜거야?"
"너무 어린 애 취급 말아요."
"나 잠옷 입고 있는데, 밖에 나가 있어야 돼?"
"우쒸!"
내 방에서 내가 눈치 보며 화장실 가서 옷을 갈아 입게 될 줄이야.
침대도 뺏기고 말이야.
"집에 전화는 했어요?"
"응, 정희네서 자고 간다고 했어."
"딸자식 키워나도 소용없다는 말이 누나 때문에 생겼구만."
남아 있던 강냉이 누나가 다 먹어 치웠다.
티슈도 코 푼다고 다 써 버렸다.
그러고선 또 요구를 했다.
"티비도 하나 사고, 오디오도 하나 사라. 방에 문화시설이라곤 컴퓨터 한대 밖에 없네? 책도 모두 전공 서적들 뿐이고, 가서 만화책 좀 빌려 와. 참 먹을 것도 좀 사와라."
누나가 만원짜리 한 장을 내 손에 꽉 쥐어 주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밖으로 나갔지요.
섧어라.
추리닝을 입고 딸딸이 신은 맨발로 쌓인 눈을 밟으며 만화방으로 갔다.
내가 순정 만화를 빌려 보게 될 줄이야.
누나가 말한 책은 200원짜리도 아니고 300원을 줘야 빌릴 수 있는 그런 만화책이었다.
10권에다가 먹을 거사고, 티슈 사니 내게 떨어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기분 좋게 내 방으로 왔다.
발은 시렸지만 방학이라 사람들 발자국이 없는 서울보다 깨끗한 눈이 쌓인 거리를 마냥 밟으며 달렸다.
"삼권 좀 던져 줄래?"
"나는 아직 일권도 다 안봤는데?"
"재밌지?"
"뭐가 잼있어요. 과자 흘리지 마요."
"알았어. 삼 권 줘."
난 또 전공책에 수건 말아 베개 삼고, 싸늘한 방바닥에서 무거운 찬공기 마시며 만화책을 보았지만, 누나는 스팀 모락 나는 침대 위에서 두터운 이불을 덮고 깨끗하지는 않지만 푹신한 베개를 가슴에 묻으며 한 쪽팔은 호랑이 배에 얹은채, 그 손으로 과자를 집어 먹으며 만화책을 보았다.
한참 뒤, 나는 만화책 보다 잠이 든 누나를 바로 해 주어야 했다.
엎드려 자면 몸에 좋지 못하다.
누나의 불안하게 자는 모양을 바른 자세로 해 주는 내가 어찌보면 누나보다 훨씬 어른 스러운데...
호랑이를 뺏으면 또 이불을 말겠지?
니 다해라 씨.
누나를 바로 눕혀 이불을 덮어 주고는, 나는 방바닥에서 추위에 떨며 만화책을 끝까지 다 보았다.
순정만화 치곤 괜찮네!
나도 자야지 이제.
일어나 괜히 누나의 자는 모습을 한번 더 쳐다 보았다.
자는 모습이 상당히 사랑 스럽다.
저 누나가 내 곁에 오래 있어 주었음 하는 마음이 크다.
자자, 이제.
아니군요.
외로웠지만 따뜻했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 하라는 눈이 오네요.
오늘 아침 내 창가에 눈이 기웃거렸습니다.
기분 좋게 내리지만 쌓이지는 못하고 눈물을 떨구어 버립니다.
하늘에서는 반가운 것이 내리지만 쌓였던 것은 지워져 버립니다.
요즘은 철수 그 녀석이 자주 보고 싶어요.
무슨 감정이 생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같이 있고 싶은 녀석입니다.
눈이 오면 누군가와 그 눈 속을 거닐고 싶어요.
아무리 방학이지만 철수 녀석, 일어 났겠죠?
삐삐를 쳐 보았습니다.
호호, 바로 전화가 오네요.
"0865로 삐삐 치신 분인가요?"
에그, 항상 이렇죠.
"너 내 헨드폰 번호 모르니?"
"아, 알지만 다 이렇게 물어 보더라구요. 왜 삐삐를 치셨나요?"
"눈 오거든?"
"그래서요?"
"그래서라니? 눈 온다구."
"겨울에 눈 오는 거 당연하잖습니까."
"에그 인간아. 여자가 눈 온다고 전화를 하는 것은 어디 근사한 곳으로 가고 싶거나 낭만적인 만남을 기대하는 것이거든? 뭐? 겨울이니까 눈 오는 거 당연하다구?"
"그런 걸 왜 나한테 기대를 해요?"
"자기 생각을 해 주면 감사할 줄 알아야지. 어디 교외로 드라이버 나갈래?"
"눈 오는데 차를 몰고 교외를 나가요? 눈 오면 교통 체증이 얼마나 심한데..."
"내가 어쩌다 이런 지경까지 됐을까? 너 그러면 진짜 여자 못 사귄다."
"어디 가고 싶은데요?"
내 의도대로 따라 오지만 꼭 기분좋게 따라 오지는 않죠.
그것이 녀석의 매력인가 봅니다.
크리스 마스가 다가 온다.
오늘 같은 눈은 크리스마스 이브날 내려야 하는데, 나 태어나서 화이트 크리스마스는 감성이 물들지 않았던 초등학교 1학년 때를 제외하곤 한 번도 이루어 지지 않았다.
서울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먼지가 끼여 별로 하얗지 못할 것이다.
우리 학교 근처만 해도 그런대로 깨끗한 하얀 눈일게다.
서울 하늘은 매연이다, 먼지다 하여 눈에게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 잔뜩 끼여 있다.
우리집 옥상에서 맞는 눈은 먼지 바닥에 잘 못 넘어진 신부의 웨딩드레스 같은 빛이다.
오늘 아침에 밥을 먹는데, 창 가로 하얀 것이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감성이 풍부한 것 같다.
아무도 눈오는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나는 밥을 먹고 난 뒤, 옥상으로 올라 갔다.
그리고 눈을 반겼다.
아래를 보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쌓인 눈을 모아 내리는 것보다 많은 눈을 던져 주고는 숨곤 했다.
"어떤 놈이 눈을 던진겨?"
쌈쟁이 할머니에겐 함부로 장난 치지 말아야 겠다.
눈이 내린다.
제 죽을 곳이 땅 임을 알면서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마냥 내리고 있다.
눈물 흘려야 할 이별을 알진데 무슨 깊은 그리움이 있는지 잠시간의 만남을 위해 제 죽을 곳으로 부질없이 내려 앉는다.
"지이잉!"
옥상에서 추위에 떨면서도 눈을 반기며 청승을 떨고 있는 데 삐삐가 울렸다.
나에게 삐삐 쳐 주는 사람은 은정이 누나 뿐이다.
삐삐 번호를 친구 두 명에게 알려 주었지만 그 놈들은 아직 한 번도 삐삐를 쳐주지 않았다.
하기야 한 놈에겐 군입대하는 날 가르쳐 주었으니 하고 싶어도 못할 것이다.
내 추리닝 바지 호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삐삐가 울렸다.
거의 죽어 있는 삐삐라서 집에 있을 때도 항상 가지고 다닌다.
은정이 누나가 연락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삐삐를 꺼내 보았다.
눈을 맞으며 삐삐 번호를 확인하는 것도 낭만이 있다.
삐삐가 울리면 만남이 있다.
보나마나 은정이 누나의 핸드폰 번호가 찍혀 있겠지만 드물게 잘 못 걸려 온 번호일 수도 있기에 확인을 했다.
은정이 누나구만.
눈 오는 데 어디 교외라도 나가자고 했으면 좋겠다.
"용인 쪽으로나 내려 가 볼래?"
이 여자가 날 닮아 가나요?
그 쪽 눈은 깨끗하겠지요? 눈이 많이 오진 않지만 분명 운전하는 데 있어 애로사항이 있을 법 한데.
무모하네요.
그래도 반가운 말이다.
"용인 쪽은 왜 가는데요?"
"자연농원 가자. 눈 오는 날, 공원 가면 재미 있을 것 같아."
"가까운 곳에 롯데 월드 있잖아요."
"거긴 실내잖아."
"얼어 죽고 싶어요?"
"가기 싫음 말아. 예전부터 꼭 토를 달아요."
"내가 따라 갈 줄 알고 연락한 거 아니었어요?"
"응."
"가기 싫음 말아라는 소린 뭐에요?"
"그냥 해 보는 소리."
"진짜 운전해서 갈려구요?"
"응."
"데리러 올 거에요?"
"30분 뒤에 길가로 나와."
눈 오는 마로니에 공원을 여자친구와 팔짱 끼고 거니는 것은 언젠가 실현이 되
겠지요.
오늘은 자연농원이나 가자.
추위에 단단히 대비를 했다.
큰 장갑을 끼고 두툼한 목도리를 했다.
모직 자켓은 이런 날 쥐약이다.
무스탕도 쥐약이다.
내 외투중에 모직 자켓이나 무스탕은 없다.
그냥 있는 척 해 봤다.
우주복 같은 조끼 패딩을 속에 받쳐 입고, 스키복 같은 다운파커를 또 껴 입었다.
그래도 불안해서 패션 돌돌이 모자까지 썼다.
밑이 허전해서 속바지를 껴 입었다.
준비 완료다.
"어디 가냐?"
"자연 농원에요."
"눈 오는데 미쳤냐?"
우리 아버지가 근엄하시게 말씀 하셨다.
"용돈 좀 주십시오."
그래서 근엄하게 대답을 했다.
"자주 전화 오던 그 아가씨가 꼬시던?"
또 근엄하시게 물으셨다.
"네."
당연하다는 듯 대답을 했다.
우리 아버지가 혀를 차신다.
혀를 차시는 울 아버지가 별 말씀 하지 않고 근엄한 표정으로 거금 10만원을 주셨다.
"올 때 같이 정신병원이나 들렸다 와라."
마지막 말씀을 하실 땐 근엄하시지 않으셨다.
나는 모르겠는데, 은정이 누나는 정신 상담을 받아야 겠다.
심각한 공주 증세가 있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누나는 꼴랑 니트 하나에 바람이 잘 통할 것 같은 정장용 바지를 입고 있었다.
뒷좌석에 벗어 던져 놓은 쟈켓 또한 별로 두꺼워 보이지 않았다.
차 안의 따뜻한 온도에 바깥 기온을 인식하지 못했나 보다.
"그런 차림으로 안 춥겠어요?"
"너처럼 두툼하게 입으면 둔해 보이잖아. 내 날씬한 몸매가 죽어 버리거든."
"자연 농원 그냥 구경만 하다 올거에요?"
"무슨 소리야, 탈 거 다 타야지."
"추울텐데..."
"옷 벗어 달란 소리 안할테니까 염려 마. 나 보기는 이래 보여도 감기 한 번 안걸려 본 여골이야."
"진짜에요?"
"그럼. 그리고 나 추위를 별로 타지 않아."
보통 한 시간이면 충분한 거리였지만 두 시간이 넘게 걸려 자연 농원에 도착했다.
눈은 많은 양은 아니지만 계속하여 그치지 않고 내리고 있었다.
운전해서 피곤했을 만도 한데 누나는 자연 농원의 놀이 기구들을 보자 흥분이 되는 모습이다.
나이 많다고 자랑을 하더니 나보다 더 어려 보이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우리 청룡열차도 타고, 후룸라이드도 타고 음, 바이킹도 타자."
후룸라이드는 물이 얼어서 타지 못했다.
차에서 내리자 마자 추위가 바로 느껴졌다.
얼레? 누나는 춥지 않은 듯, 벗어 놓은 외투를 걸치고 즐거운 표정으로 매표소 앞으로 뛰어갔다.
너무 얻어 먹을 수만 없었다.
용돈 받은 것도 있는데...
"자유 이용권으로 두장 주세요."
내가 표를 샀다.
사고 나니까 좀 아깝다.
하루 종일 당구 치고 탕수육 시켜 먹어도 남을 돈이 나갔기 때문이다.
자연 농원을 입장한 시간은 12시 정도였다.
푸하하, 그 동안 당했던 설움을 한꺼번에 씻는 듯 했다.
"이제, 바이킹을 타러 갑시다."
사람들이 거의 없던 관계로 타고 싶은 거 맘대로 탔다.
"나 추워. 이제 가자."
"무슨 말씀, 자유 이용권인데 다 타 봐야지요."
누나가 너무 추위에 떠는 것 같아 파커를 벗었다.
그리고 패딩 하나를 벗어 주었다.
옷 벗어 달라는 소리 하지 않겠다는 말을 불과 몇 시간 전에 했던 거 같은데, 누나는 파커를 탐내는 눈 빛이다.
이건 줄 수 없다.
그래도 목도리는 벗어 주었다.
그래도 추웠을 것이다.
"야, 신난다!"
바람을 가르며 청룡열차가 하늘을 날았다.
청룡 열차에 탄 사람?
누나하고 나 뿐이다.
두 번 탔다.
"나 이제 갈래."
"어허, 무슨 말씀. 한 번 더 탑시다."
돌돌이 모자를 내리 쓰고 신나게 탔다.
내 옆에서 청룡열차의 무서움 보다 추위에 오들오들 떨고 있는 은정이 누나의 모습이 가여워 보였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 고소하기도 했다.
눈 바람에 화장이 지워지고 빨갛게 솟은 가는 핏줄들로 누나의 모습은 더 이상 세련된 미인이 아니었다. 머리도 엉망이고 콧물까지 흘렸다.
"나 이제 안 타. 너 나뻐 씨."
"누나가 먼저 오자고 했잖아요."
"겨우 이것만 벗어 주고 말이야. 그리고 내 생각은 않고 계속 타자고 졸라되기나 하고..."
누나가 진짜 삐쳤나 봐요.
아무말 없이 그냥 밖으로 나가 버리네요.
따뜻한 커피 두잔을 사가지고 누나를 따라 갔다.
"옷은 벗어 주고 가야지!"
세시가 못 되어 자연 농원을 나왔다.
자유 이용권 괜히 끊었다.
차 안에서 누나는 히터를 최고로 틀어 놓고 코를 풀고 있었다.
그래도 튼튼한 여자다.
나도 상당히 추위를 느꼈는데, 겨우 저 것만 입고 내가 조른다고 탈 거 다 탔으면서 저 정도면 아주 튼튼한 여자라고 인정을 해 주어야 한다.
코를 풀고 난 다음 팩을 꺼내서 화장까지 고친다.
그 곱던 하얀 손은 검붉게 변해 있었지만 물수건으로 몇 번 문지르고 크림을 바르니까 빠른 시간 내에 제 모습을 찾았다.
"약한 여자는 아니네요?"
"그럼, 내가 얼마나 튼튼한데. 그런 내가 코감기 걸렸어 너."
"여기 끌고 온 건 누나에요. 커피 드세요."
"원두 커피?"
"자판기에서 원두 커피도 팔아요?"
"그럼 나 안 마실래."
마시긴 싫음 마라.
창 밖은 눈이 제법 쌓였다.
하지만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운전대 앞에선 누나가 코를 풀고, 거울 보고. 코 풀고 거울 보고. 한 참 동안이나 차를 출발 시키지 않았다.
따뜻한 차 안에서 누나 옆에 앉아 있는 이 시간이 쌓인 눈 속에서 그냥 곱다.
그 고운 기분으로 옆에 앉은 누나가 또한 그냥 좋다.
저 누나를 연상이고 뭐고 간에 꼬셔 볼까?
불가능하겠다.
그리고 연인으로서 유지 시킬 자신도 없다.
아무리 장난 스럽게 말했다고 날 인정하지 않았던 정희 누나의 가벼운 말들에도 상처를 받았던 내가, 옆의 저런 여자를 어떻게 감당을 하겠냐.
요즘 누나가 외로움을 타는 것 같다.
좋아하던 사람에게 바람을 맞았는데, 외로움 탈 만도 하다.
잘난 여자기 때문에 다른 남자 만날 때까지 별로 긴 시간이 흐를 것 같지는 않지만 그 시간동안 가볍게 대할 수 있는 나를 자주 찾을 것 같다.
그러면 됐지 뭐.
시간은 네시에 가까워 졌다.
그러고 보니 밥도 먹지 않았다.
"출발 안 해요? 나 배 고픈데."
"그래, 가면서 식당 나오면 밥이나 먹자."
차는 아주 느릿하게 움직였다.
쌓인 눈 때문이었다.
그리고 하늘에선 또 눈송이가 하나 둘씩 떨어졌다.
외대 근처 어느 식당에서 따뜻한 갈비탕을 먹었다.
"갈비탕 사 주었다?"
"어, 기억하고 있었네. 그때 갈비탕 사 주지 않고 그냥 떠나 버린 누나를 얼마나 원망 한 줄 모르죠?"
"치, 먹는 것에 삶의 목적을 두는 것 아니니?"
"누나도 자취 해 봐요."
"나도 내년엔 자취나 할까?"
"차도 있는 사람이 자취는 무슨..."
"정희가 병원에 취직이 되었으니까, 자취방을 비우겠지? 그걸 내가 인수할까?"
"왜? 등,하교 하기가 힘들어요?"
"그건 아닌데, 4학년 때는 아무래도 늦게까지 학교에 있어야 될 일이 많을 것 같거든. 그리고 대학원 가게 되면 또 밤샐 일이 많을 것 같고."
"누나 대학원 갈거에요?"
"응. 어짜피 나는 직장이 정해 졌잖아. 울 아빠 약국 아니면, 울 엄마 병원."
"좋겠수."
"넌 군대 안가니?"
"나도 대학원 갈거요."
"잘됐네. 그럼 나하고 하나, 둘, 셋. 삼년은 더 학교에서 보겠다. 이렇게 데리고 다니다, 진짜 연인 사이로 발전하면 어떡하지?"
누나는 손가락질을 하고 난 다음 미소를 지었다.
그렇네.
삼년 동안 저 누나의 곁에 있으면, 오늘 같은 기분이 제법 많이 들 것이고, 혹시나 사랑하는 마음도 생길 수 있겠다.
안되는데...
누나가 연상이라서가 아니라 너무 버거운 상대다.
에이, 될대로 되라.
"연상은 관심 없다니까."
"훗! 너 그 소리 언제까지 나오나 한 번 보겠어."
식당에서 속도 따뜻하게 만든 다음 밖으로 나왔다.
눈 졸라 온다.
뭉치면 산다는 식으로 떼거지로 땅에 내려 앉고 있었다.
그리움이 많으면 이별의 시간도 늦어 지겠군.
"이래 가지고 서울 갈 수 있을려나?"
"그래, 눈 오는 데 차 끌고 나올 때부터 뭔가 찜찜했어."
"너, 씨."
누나는 차를 조심스럽게 몰았다.
쌓이는 눈 때문에 차가 불안하게 흔들리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 중으로 서울 가기는 힘들 것 같았다.
"누나 차라리 학교로 가요."
"학교?"
"나는 내 자취방에서 자면 되거든요. 누나는 밤새 부지런히 운전 해 가면 내일 새벽에는 집에 들어 갈 수 있을거에요."
"뭐야?"
"나 졸라 심심해요. 누나는 운전이라도 하지."
"이게 진짜. 눈길이라 초보에게 운전을 맡길 수도 없고, 이런 날씨의 운전이 얼마나 짜증나고 피곤한 지 모르지?"
"한 시간이 지났는데 2,3킬로 미터 왔어요?"
"그거 보단 더 왔다."
"수원은 가까우니까, 학교로 가요. 정희 누나가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정희 없어도 돼. 내가 니 방에서 자면 돼. 넌 친구 자취방 많을 거 아냐."
"내 방에요?"
"두 번이나 잤는데, 못 잘것도 없지."
"나도 내 방에서 잘거야."
"자라."
"남자 방인데 꺼림찍하지 않아요?"
"내가 너를 의식해? 아서라 얘야."
이건 분명 나를 무시하는 언사다.
학교까지 가는데도 세시간이나 걸렸다.
나는 혹시 누가 볼까 봐 주위를 살피면서 내 방문을 열었는데, 은정이 누나는 아주 당당하게 걸어 들어 왔다.
아무리 나를 동생으로 취급한다고 이건 너무했다.
아까 혹시나 했던 생각 접어야 겠다.
나는 누나가 샤워한다는 얘기를 듣고 밖으로 나갔다.
눈은 하염없이 계속 내리고 있었다.
떼거지로 내려도 언젠가는 죽게 되어 있다.
암만 쌓여 봐라.
해 한번 기분좋게 내리면 금방일 걸.
내가 들어 갔을 때 누나는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옷장 속에 넣어 놓은 거 어떻게 찾았을까?
"나도 옷 갈아 입어야 되요."
"갈아 입어라."
"나도 남자에요. 그리고 진짜 여기서 잘 거에요?"
"응, 넌 바닥에서 자."
"옷 갈아 입게 나가요."
"고개 돌리고 있을게."
"나도 자존심이 있어요."
좀 심각한 어조로 답을 했다.
"삐쳤니? 진짜 기분 나쁜거야?"
"너무 어린 애 취급 말아요."
"나 잠옷 입고 있는데, 밖에 나가 있어야 돼?"
"우쒸!"
내 방에서 내가 눈치 보며 화장실 가서 옷을 갈아 입게 될 줄이야.
침대도 뺏기고 말이야.
"집에 전화는 했어요?"
"응, 정희네서 자고 간다고 했어."
"딸자식 키워나도 소용없다는 말이 누나 때문에 생겼구만."
남아 있던 강냉이 누나가 다 먹어 치웠다.
티슈도 코 푼다고 다 써 버렸다.
그러고선 또 요구를 했다.
"티비도 하나 사고, 오디오도 하나 사라. 방에 문화시설이라곤 컴퓨터 한대 밖에 없네? 책도 모두 전공 서적들 뿐이고, 가서 만화책 좀 빌려 와. 참 먹을 것도 좀 사와라."
누나가 만원짜리 한 장을 내 손에 꽉 쥐어 주었습니다.
눈물을 머금고 밖으로 나갔지요.
섧어라.
추리닝을 입고 딸딸이 신은 맨발로 쌓인 눈을 밟으며 만화방으로 갔다.
내가 순정 만화를 빌려 보게 될 줄이야.
누나가 말한 책은 200원짜리도 아니고 300원을 줘야 빌릴 수 있는 그런 만화책이었다.
10권에다가 먹을 거사고, 티슈 사니 내게 떨어지는 것은 없었다.
그래도 기분 좋게 내 방으로 왔다.
발은 시렸지만 방학이라 사람들 발자국이 없는 서울보다 깨끗한 눈이 쌓인 거리를 마냥 밟으며 달렸다.
"삼권 좀 던져 줄래?"
"나는 아직 일권도 다 안봤는데?"
"재밌지?"
"뭐가 잼있어요. 과자 흘리지 마요."
"알았어. 삼 권 줘."
난 또 전공책에 수건 말아 베개 삼고, 싸늘한 방바닥에서 무거운 찬공기 마시며 만화책을 보았지만, 누나는 스팀 모락 나는 침대 위에서 두터운 이불을 덮고 깨끗하지는 않지만 푹신한 베개를 가슴에 묻으며 한 쪽팔은 호랑이 배에 얹은채, 그 손으로 과자를 집어 먹으며 만화책을 보았다.
한참 뒤, 나는 만화책 보다 잠이 든 누나를 바로 해 주어야 했다.
엎드려 자면 몸에 좋지 못하다.
누나의 불안하게 자는 모양을 바른 자세로 해 주는 내가 어찌보면 누나보다 훨씬 어른 스러운데...
호랑이를 뺏으면 또 이불을 말겠지?
니 다해라 씨.
누나를 바로 눕혀 이불을 덮어 주고는, 나는 방바닥에서 추위에 떨며 만화책을 끝까지 다 보았다.
순정만화 치곤 괜찮네!
나도 자야지 이제.
일어나 괜히 누나의 자는 모습을 한번 더 쳐다 보았다.
자는 모습이 상당히 사랑 스럽다.
저 누나가 내 곁에 오래 있어 주었음 하는 마음이 크다.
자자, 이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