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정이 누나가 내 방에서 세 번을 자고 갔다.
그 많던 눈은 다음날 오전 따스한 햇살 속에 가여븐 모습으로 죽어 갔다.
누나는 내가 일어나기 전에 옷을 갈아 입었으며 아침도 먹지 않고 서울로 떠났다.
난 같이 가지 않았다.
그냥 자취방에 더 있고 싶었다.
누나는 또 잠옷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
고이 개어서, 다독거려 놓은 인형 옆에다 놓아 두고는 그냥 떠나 버렸다.
조금 전까지 은정이 누나가 잠 들었었던 침대에 홀로 누워 생각을 해 보았다.
은정이 누나는 일년 전만 해도 모르던 사람이다.
그 사람이 내 마음 속에 존재의 영역을 넓혀 간다.
어린 시절 친누나처럼 생각했던 정희누나 만큼의 넓은 공간을 차지했다.
난 정희 누나를 좋아했다.
그녀가 이사를 가버린 다음 난 슬퍼서 울었다.
어린 마음에 상처가 컸었다.
그것을 그 누나는 모를테지.
연상엔 관심이 없다고 말하지만 난 정희 누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 관심을 그냥 우스개로 받아 넘기는 정희 누나에게 남들은 모르는 상처를 받았다.
정희 누나와 함께 했던 시간의 10분의 1도 안되는 시간을 은정이 누나와 보냈다.
그런 은정이 누나가 벌써 정희 누나를 가려 버리고 있다.
정희 누나는 곧 학교를 떠날 것이다.
그렇지만 예전 이사를 갔을 때보다 큰 아픔을 줄 것 같지는 않다.
나도 이제 컸다.
그리고 정희 누나는 은정이 누나에게 많이 가려졌다.
누나를 가리는 사람이 하필이면 또 누나다.
그것이 문제다.
은정이 누나는 정희 누나와는 다르게 연인이라는 말과, 사귀자는 말을 먼저 내뱉고 있지만 역시 정희 누나만큼이나 장난스럽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다.
내마음 뺏기지 않도록 말이다.
한 번 뺏기면 큰일 날 것 같다.
잘못하면 은정이 누나에게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은정이 누나 주위에는 잘 난 남자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다.
나에게 버거운 상대들이다.
맘 뺏기지 말자.
누나가 잠시 하룻 밤 묵고 떠난 빈 방의 허전함이 이시간 너무나 크다.
왜,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다 연상인거냐.
사주를 한 번 봐야 겠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홀로 보냈다.
그래도 덜 비참했다.
만나자고 한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 올해는 할 수 없이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낸 것이 아니고, 자의로 혼자였다.
내가 심심풀이 땅콩이여 뭐여.
진짜 연상들 너무한다.
그러니까 내가 연상은 관심을 줄래야 줄 수가 없다.
나도 비싼 몸이여.
재미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가르쳐 주고 싶었다.
배짱 좋게 거절 했지만 졸라 심심했다.
나도 나이가 들었다고 티비 만화영화가 재미있지가 않았다.
그냥 만나자고 할때 쪼르르 달려 나갈 걸.
뒷일은 뒤에 생각해야 되는데, 내가 너무 먼 훗날의 일을 생각했나 보다.
크리스 마스가 지나고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었는데도 은정이 누나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삐쳤나?
올해 크리스 마스는 내게 외로움을 주었지요.
캐롤송이 들리고 화려한 조명등이 아름다운 청담동 이브의 밤 거리를 홀로 거닐다 왔습니다.
그냥 웃고 싶었어요.
고귀하신 분이 태어난 그 화려한 날에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싶었습니다.
근데 웃지 못하고 외로움을 탔습니다.
외로움은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지요.
나, 연락하면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많아요.
동아리 선배 오빠들도 있구요.
우리 과에도 내가 만나자 하면 바로 달려올 선배 오빠나 동기 녀석들 많아요.
그렇지만 그들에겐 내가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만남 뒤에 오는 공허함이 싫었습니다.
차라리 여자 친구들 만나는게 낫죠.
내가 잘못 된 것일까요?
나 남자들 오래 사귀지 못했습니다.
내가 만나던 남자들은 어느 시점에선가 어색해지더군요.
하지만 내가 어색하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색한 사람은 만나기 싫었고, 관심없는 사람들은 만남 자체가 공허할 뿐이지요.
내가 진짜 좋아했다고 생각한 사람도 이제 어색해 졌습니다.
어색한 사람은 잊혀지지요.
크리스 마스 날은 그냥 홀로 집에 있었습니다.
핸드폰도 꺼놓고 전화도 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나를 혼자 있게 만들었지만 자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내게 생각나는 사람들은 나를 찾지 않았습니다.
어색한 승주는 잊혀지는 중이고, 제일 친했던 정희는 남자 친구와 학생시절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보내겠지요.
침대에 홀로 앉아 생각했습니다.
가볍게 사랑을 내 뱉은 사람들, 그 가벼운 사람들에게 나를 지켜줄 수 없다고 생각한 그 사람 모두를 잊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년엔 새로운 사람이 생기겠지요.
조급하지 않으며, 조금씩 서로를 공유해 가는 소박한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내년엔 가랑비를 맞고 싶습니다.
언제 젖었는지도 모르게 가는비를 맞으며 흠뻑 젖고 싶습니다.
최소한 승주 보다는 오래토록 내 곁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게 만든 놈이 밉습니다.
그 녀석을 만났다면 그냥 생각없이 웃었을 텐데...
아무래도 올 해 크리스마스는 뭔가 다른 기분이 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만나면 생각없이 웃게 만드는 그 녀석과 함께 할 것이라고 한달 전부터 계획했었는데, 녀석이 날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여자 친구도 없는게 무슨 똥배짱이랍니까.
이브 날 아침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다섯 번이나 호출을 했습니다.
점심 때가 지나서야 전화가 왔더군요.
"0865로 호출 하신분이요?"
짜증도 났지만 반가운 목소리였지요.
"내가 오전부터 호출했는데, 왜 이제 전화하는거야? 너 늦잠 잤지?"
"일찍 일어 났습니다."
"저녁에 나와라.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
"나 바빠요."
"어쭈, 튕기네? 맛있는 거 사준다니까."
"우리집에도 먹을 거 많아요."
"나올 거면서 그렇게 튕기면 좋니?"
"누가 나간데요? 내가 부르면 항상 쪼르르 달려나가는 그런 사람인 줄 아세요?"
"너 오늘 만날 사람 없을 거 아냐."
"그렇긴 하지만, 나도 바쁠 수 있단 말입니다."
"교회나 성당 나갈거니?"
"아니요. 나를 왜 만나고 싶은데요?"
"그냥 심심하니까. 너 만나면 재밌잖아."
"우쒸, 나 바빠요. 전화 끊어요."
"야, 박철수."
"뚜우..."
녀석이 쌔게 나왔습니다.
집에다 전화를 했더니 아버님이 받으시더군요.
나보고 처자라고 말씀하시는 아버님이 무서워 그냥 끊었습니다.
나 철수에게 삐쳤습니다.
그래서 한 일주일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연인 사이도 아닌데, 내가 삐치네요.
지금 내가 좋아했던 사람에게 차이고, 남자 친구 만들지 않아 녀석한테 이런 수모를 당했지만 나중은 달라질거라 봅니다.
일주일째 철수도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강적이네요.
너그러운 누나가 용서를 해야지요.
한 해의 마지막 날 울적하여 내가 먼저 철수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오늘은 바로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새벽까지 집에 들어 가지 않았습니다.
타종식 하는 것을 꼭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종각을 갔었습니다.
11시부터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지요.
사람들 엄청 많았습니다.
바깥에 있으니 많이 추웠지요.
그렇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찬 공기 속에 뿜어져 사라지는 입김처럼 한 해가 떠나 갔습니다.
종각 앞에서 철수 녀석 손을 잡고 한 해를 떠나 보냈습니다.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폴짝 폴짝 뛰더군요.
사람들은 또한 카메라가 보이자 손을 흔들기도 했습니다.
나도 죄다 따라 했습니다.
녀석이 그런 나를 어린애 쳐다 보는 듯한 모습을 하며 비웃네요.
"누나 이제 24살 된 거 맞아요? 하는 짓 보니까 아닌 것 같애."
타종식이 끝나고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지요.
그래도 새벽 한시를 넘길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종각 주변에 모여 있었습니다.
철수가 자꾸 시계를 쳐다 보길래 더 있고 싶었지만 자리를 떴습니다.
주차 시킬데가 없어서 종각에서 아주 먼 곳에 차를 주차 시켜 놓았습니다.
종각에서 인사동을 거쳐 차 있는 곳으로 걸었습니다.
인사동은 고운 빛을 하고 저녁 같은 모습이었지요.
따끈한 새벽 녹차나 한 잔 했으면 했는데, 철수는 시계를 쳐다 보며 짙은 입김만 뿜더군요.
그냥 지나쳤습니다.
새해 첫날이라 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밤 거리가 신경이 쓰였지요.
차 주차 시켜 놓은 곳은 사람이 뜸한 곳이었거든요.
철수가 쌈 잘한다고 했으니 괜찮겠지요.
"나 이제 집에 못 들어가요."
철수는 걸으면서 투덜 거렸습니다.
"왜?"
"나, 차라리 외박은 가능해도 열두시 넘겨 집에는 못 들어가요."
"열쇠 가지고 나왔어야지."
"나는 누나처럼 작정하고 나온 게 아니잖아요."
"그럼 찻 집에서 밤을 샐까?"
"잠 와요."
"그럼 우리 집 가서 잘래?"
"이 여자가 진짜! 새벽에 싸돌아 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집에 남자를 끌어 들여요? 부모님이 아시면 진짜 좋아하시겠다."
"싸돌아 다녀? 나 여기 간다고 얘기하고 나왔어. 당당히 허락 맞고 나온 거란말이야."
"안 추워요?"
"조금 춥긴 하다."
"누나는 집에 가요."
"너 집에 못 들어간다며? 벌써 새벽 두시다. 나 가버리면 너는 갈 데 있니?"
"그런다고 마냥 이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요. 나는 집에 아침 아홉시를 넘겨야 들어 갈 수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집에 몰래 숨어 들어 갈거야?"
"나 집에는 못 가요. 유일한 출입구인 현관문 잠궈 놨을 거 분명하거든요. 그리고 울 아버지 주무시다 깨시면 엄청 무서워요."
"그런데 너 어디 갈데 있냐구? 아까 찻집이나 가자니까."
"여관."
"뭐? 나도 따라 가야 되는거야?"
"그런 농담 하면 내가 재미있어 할 것 같아요? 웃지 말아요."
"호호, 이럴 때 보면 참 귀여운 데 말이야. 말투는 항상 톡톡 쏜다 말이야. 그냥 우리 집 가자."
"에, 그 자꾸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구요. 누나는 집에 가요."
"우리 집 가자니까."
"누나 집은 그래요? 밤 늦게 남자 데리고 가도 괜찮은 그런 집이에요?"
"당연히 아니지. 그렇지만 우리 부모님은 지금 주무셔. 나는 집 열쇠를 가지고나왔구."
"그래서요?"
"우리 집에 방 많아. 몰래 들어 가서 내일 아침에 밥 먹고 가면 되잖아."
"헛, 부모님은요?"
"우리 아빠, 엄마 아침 일찍 출근 하실거야."
"내일 노는 날이에요."
"그렇네. 그럼 다음에 재워 줄게."
"놀리는 거에요?"
"그럼 우리 집 근처 여관에서 자라. 우리 부모님 노는 날이라도 하루 종일 집에 계시지는 않아. 오전 중으로 다 어디 가실거야. 아침은 우리 집에서 먹어. 내가 차려 줄게."
"정말요?"
"응."
"누나 나따라 여관에서 자는 것은 아니죠?"
"왜? 진짜 따라 가 줄까?"
"자꾸 어린 애 취급 하지 말아요."
"그럼 니가 나보다 나이가 많니?"
"됐어요. 그럼 누나 동네로 갑시다. 나는 여관가서 잘테니까, 부모님 어디 가시고 나면 꼭 밥 차려 줘요."
"알았어."
철수가 나를 자주 놀렸죠.
나도 그것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 냈습니다.
나, 새해 첫 날부터 여관 신세를 지었다.
요즘들어 누나가 날 어린애 취급 하는 게 못마땅하다.
예전보다 강도가 심해졌다.
저 여자에게 다시 한번 마음 단단히 먹어야 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정희 누나는 저거 애인하고 깨지면 뭔가 나에게 기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 누나는 그게 아닌 것 같다.
진짜 동생으로 밖에는 생각 하지 않는 것 같다.
여관 아줌마가 낮 열두시가 되니까 날 내 쫓았다.
그때까지 누나는 연락이 없었다.
어떻게 된겨?
밥 차려 준다더니...
할 수 없이 집으로 갔다.
집에 다 도착하니 삐삐가 울렸다.
전화를 했더니 내가 어딨냐고 묻는다.
아침 차려 주겠다던 여자가 낮 1시까지 자빠져 자?
누가 남편 될지 골치 아프겠다.
할 줄 아는 음식이나 있을려나?
"다녀왔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근엄하게 날 맞으셨다.
"타종식은 잘 보았느냐?"
"네."
"누구랑 갔었느냐?"
"어제 전화 드렸잖아요."
"널 자주 꼬시던 그 여자하고 있었느냐?"
"네."
"밤은 어디서 샜느냐?"
"여관이요."
"물론 너 혼자 잤겠지?"
"물론이지요. 이상한 생각하지 마십시오."
"안했다 녀석아. 음, 그 여자가 두 살 연상이라고 했느냐?"
"네."
"앞으로 그 아가씨 자주 만나지 마라."
"싫은데요."
"자식이 바로 싫다고 그러네. 나는 너네 엄마하고 동갑이지만 별로 좋은 대우못 받았다. 여자를 사귈려면 나이를 좀 더 먹은 후에 한 여덟 살 어린 여자하고 사귀어라."
"전 그냥 선후배 사이로 만나는 거에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 어제는 새해라 그러려니 했지만 여자하고 밤을 지새고 오는 그런 일은 삼가해라. 특히 연상의 여자하고는 말이다."
"네."
그 여자 내 방에서 세 번이나 자고 갔는데요.
그렇게 답을 해 버릴까 생각을 해 보았다.
그 말을 했다간 자취방 빼고 등,하교 여기서 하라고 할 것 같아서 참았다.
그리고 들고 계시는 티비 리모콘도 맞으면 상당히 아플 것 같았다.
우리 아버지도 상당히 도둑님 심보시네요.
여덟살 차이?
나보고 중, 고등학생하고 사귀란 말은 아닐테고 그러면 28살까지 여자 사귀지 말라는 말 아닌가.
너무 하십니다 아버지.
안 그래도 비참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데...
침대에 누워 어제 일을 떠올려 보았다.
은정이 누나와 손을 잡아 보았다.
추운 겨울 날씨였지만 장갑을 끼지 않은 채 오랫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그 곳을 촬영 나온 리포터 한 명이 옆의 사람 손을 잡고 흔들어 보라고 부탁을 했지만, 누나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손은 잡지 않았다.
따뜻했는지 오랫동안 내 손을 놓지 않았었다.
나도 좋았다.
연상에 대해서 연구를 한 번 해 봐야 겠다.
겨울 방학 동안 누나를 자주 만났지만 늘 그런식이었다.
의식해서 받아 들이니까 너무 표가 났다.
누나는 분명 나를 좋아하고 있고, 나를 편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예전보다 더 날 남자로 취급하지 않는 것 같다.
이월 달이 되고 정희 누나에게서 몇 번 연락이 왔었다.
정희 누나는 일월 달부터 이미 학생이 아니었다.
출근을 했으니까.
강북 어느 종합 병원 약재부에서 어엿한 약사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졸업식 때 보자며 연락이 몇 번 왔었다.
방은 나 모르는 사이 이미 빼 버렸다고 한다.
야속한 사람...
병원에 자주 놀러오라고 하지만, 학교에서 노원구까지면 졸라 먼데 가능한 일이냐.
이제 안 보이니까 조금씩 잊혀 질거라 생각하니 가심이 좀 시리다.
날 참 좋아해 주던 그 누나가 이제 잊혀지겠구나.
그 누나에겐 연상이라도 고려해 볼 마음이 있다고 말해 주었는데, 한 번도 진지하게 받아 준 적이 없어서 그냥 잊혀지게 생겼다.
그런 내 마음을 모르고 은정이 누나는 날 가지고 놀았다.
마음이 허한데 말이다.
"진짜 해 줘요?"
이월의 어느 날이었다.
저녁에 영화 한 편 같이 보고 날 집으로 데려다 준 누나가 며칠 전 부터 놀리던 발언을 또 했다.
그래서 차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자뭇 심각한 표정으로 누나를 쏘아 보며 말했다.
날 집 앞에 데려다 주던 누나가 요즘 새로운 장난을 쳤다.
생글 생글 웃으며 말이다.
"잘 들어 가."
"그래요.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별 하는데 키스도 안해 주고 가?"
"뭐여?"
"영화에서 봤을 거 아냐? 키스 해주며 달아 나는 사람도 봤을거구, 그냥 분위기 있게 키스 해 버리는 남자도 봤을테지? 하기야 거긴 대부분 남자가 운전을 했었구나. 그럼 내가 해 주어야 되나?"
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저런 말 내뱉으면 잼있을까?
"무슨 말 하는거에요? 장난 치지 말고 조심해서 잘 가요."
내 표정을 보며 웃는 누나가 귀엽기도 했지만 얄밉기도 했다
한 일주일 그런 표정을 보니까 기분이 살 나빠지대요.
나도 남잔데...
그래서 그 날은 바로 떠나지 않았다.
영화를 봤기 때문에 뭔가 배운 것도 있었다.
생글 웃는 누나에게 자뭇 진지하게 대답하고는 누나에게로 다가 갔다.
누나 어깨를 잡고 얼굴을 디밀어 버렸다.
진짜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누나의 운전대를 잡고 있던 한 손마저 꽉 붙들고 제법 강하게 밀어 붙였다.
"야, 박철수. 너 뭐하는거야?"
"해 주라며?"
머리로 날 받아 버리는 누나 때문에 많이 슬펐다.
누나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씩씩되며 쳐다 본다.
진짜 슬프다.
그리고 억울하다.
난 진짜로 할 생각은 아니었단 말이다.
그냥 놀리길래 잘못하면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을 뿐인데, 이 여자가 머리로 날 받았다.
그럴 거면서 그런 얘기들은 왜 했냐.
섧다.
연상에겐 진짜 맘주지 말아야지.
아프고 슬프다.
"이제 그런 장난 하지 말아요."
난 조금 어색하게 돌아섰다.
내가 했던 짓도 어색하고 날 받아 버린 누나도 어색했다.
말이 조금 서툴게 나왔다.
한 동안 삐친 척 해야겠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다 떨렸다.
더 이상 안 놀릴 줄 알았는데, 누나는 문을 열고 나가려는 나를 잡았다.
그리고 또 놀렸다.
"하고 싶으면 해 봐."
이 여자가 진짜.
또 받을려구 그러나?
잠시 어색했던 마음도 없어졌다.
누나는 웃음이 가신 얼굴로 말똥히 나만 쳐다 보고 있다.
"진짜로 해요?"
기분이 별로 안 좋다.
누나 표정이 얄밉다.
"해 봐."
"진짜로?"
"그래."
"뽀뽀 아니고 키스로 합니다?"
"그래. 키스할테면 해."
무슨 작정으로 저러는지 진짜 헛갈린다.
지 머리 단단한 걸 믿나 보다.
어쩌냐 이걸.
누나는 내가 못할 거라 알고 있었더군요.
잠시 그걸 생각했나 봐요.
내가 한참동안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씩 웃더군요.
"넌 아직 어려."
두살차이 가지고 이 여자도 되게 잰다.
"누나는 뭐 많아요?"
"내가 올해는 진짜 좋은 애하나 소개 시켜 줄게."
"됐어요. 나는 소개팅 타입이 아니라며?"
"그렇긴 하더라. 정희 졸업식 때 나올거야?"
그냥 나가려 했을 때 보다는 맘이 편하다.
말을 돌리면 어떻냐 분위기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 왔는데.
"네."
"그때 보자."
"그러지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미안했어."
"뭐가요? 머리로 받은 거?"
"아니, 너에게 장난친 거."
"그러니까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마요."
"그래도 너 이건 알아라. 아까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리 장난같이 해도 전혀 맘이 없었으면 그런 말 못해. 훗, 너도 어찌 보면 그 사람을 좀 닮은 것 같다."
그 사람?
승주씨를 말하는 거야?
내가 더 잘생겼지.
"누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장난 많이 쳤죠? 그래 놓고 하려고 하면 머리로 다 받아 버렸죠?"
"훗! 너 알아서 생각 해."
진짜 해 버릴걸 그랬나?
그랬다면 어색했겠지?
저 여자가 어떤 맘을 먹고 있는지 짐작이 안된다.
일편단심파일거 같은 느낌도 주고, 아무나 홀리는 불여우 같기도 하고, 헛갈린다.
에이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친한 사이로 지내면 되지 뭐.
단순한 공대생이 복잡한 걸 생각하면 다치겠지?
암 그렇지.
잘가라 잘 난 여자야.
내가 철수를 너무 많이 놀렸나 봐요.
너무 어린 애 취급을 했나요?
철수는 내행동에 맘 상하지 않을 거라 믿었는데, 철수도 남자였다는 것을 잠시 잊었네요.
아무렇게나 대해서는 안되겠어요.
철수가 내 어깨와 한 손을 잡고 내게 키스하려고 달려 들었을 때, 잠시 당황이 되었지요.
상대가 철수라는 생각을 잊고, 예전 누군가에게 내 입술을 빼앗겼을 때가 생각이 나더군요.
머리로 받아 버렸지요.
철수의 모습이 순간 슬퍼 보였습니다.
내가 잘 못한 것인데, 순진한 철수에게 내 기분따라 마음을 다치게 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 녀석 지금 표정을 보니까 아까 진짜로 할 마음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억울하다는 표정이에요.
지금 이대로 보내면 나도 그렇고 저 녀석도 그렇고 한 동안 어색하겠지요.
그래 할테면 해 봐라.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아요.
키스 한 번 하면 어때요.
그거 하고 나면 쟤가 남자로 보일까요?
훗!
그는 아직은 나에게 남자로 보이기를 꺼려 하는 것 같습니다.
흠,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하지 말자라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표정이 승주를 닮았네요.
녀석과는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지내고 싶어요.
지금 심정은 어색한 사이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남,녀 사이가 아니라 지금처럼 계속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동생과 누나 사이가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녀석은 내게 이미 잊혀지기 싫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년엔 정희도 곁에 없는데, 학교에서 녀석처럼 친근하고 맘 편한 사람은 곁에 있기 힘들겠지요.
잘 가라 귀여운 녀석아.
그 많던 눈은 다음날 오전 따스한 햇살 속에 가여븐 모습으로 죽어 갔다.
누나는 내가 일어나기 전에 옷을 갈아 입었으며 아침도 먹지 않고 서울로 떠났다.
난 같이 가지 않았다.
그냥 자취방에 더 있고 싶었다.
누나는 또 잠옷을 가지고 가지 않았다.
고이 개어서, 다독거려 놓은 인형 옆에다 놓아 두고는 그냥 떠나 버렸다.
조금 전까지 은정이 누나가 잠 들었었던 침대에 홀로 누워 생각을 해 보았다.
은정이 누나는 일년 전만 해도 모르던 사람이다.
그 사람이 내 마음 속에 존재의 영역을 넓혀 간다.
어린 시절 친누나처럼 생각했던 정희누나 만큼의 넓은 공간을 차지했다.
난 정희 누나를 좋아했다.
그녀가 이사를 가버린 다음 난 슬퍼서 울었다.
어린 마음에 상처가 컸었다.
그것을 그 누나는 모를테지.
연상엔 관심이 없다고 말하지만 난 정희 누나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그 관심을 그냥 우스개로 받아 넘기는 정희 누나에게 남들은 모르는 상처를 받았다.
정희 누나와 함께 했던 시간의 10분의 1도 안되는 시간을 은정이 누나와 보냈다.
그런 은정이 누나가 벌써 정희 누나를 가려 버리고 있다.
정희 누나는 곧 학교를 떠날 것이다.
그렇지만 예전 이사를 갔을 때보다 큰 아픔을 줄 것 같지는 않다.
나도 이제 컸다.
그리고 정희 누나는 은정이 누나에게 많이 가려졌다.
누나를 가리는 사람이 하필이면 또 누나다.
그것이 문제다.
은정이 누나는 정희 누나와는 다르게 연인이라는 말과, 사귀자는 말을 먼저 내뱉고 있지만 역시 정희 누나만큼이나 장난스럽다.
마음 단단히 먹어야겠다.
내마음 뺏기지 않도록 말이다.
한 번 뺏기면 큰일 날 것 같다.
잘못하면 은정이 누나에게 큰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
은정이 누나 주위에는 잘 난 남자들이 기회를 엿보고 있다.
나에게 버거운 상대들이다.
맘 뺏기지 말자.
누나가 잠시 하룻 밤 묵고 떠난 빈 방의 허전함이 이시간 너무나 크다.
왜, 내가 좋아하는 여자는 다 연상인거냐.
사주를 한 번 봐야 겠다.
올해 크리스마스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집에서 홀로 보냈다.
그래도 덜 비참했다.
만나자고 한 여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하, 올해는 할 수 없이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낸 것이 아니고, 자의로 혼자였다.
내가 심심풀이 땅콩이여 뭐여.
진짜 연상들 너무한다.
그러니까 내가 연상은 관심을 줄래야 줄 수가 없다.
나도 비싼 몸이여.
재미로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걸 가르쳐 주고 싶었다.
배짱 좋게 거절 했지만 졸라 심심했다.
나도 나이가 들었다고 티비 만화영화가 재미있지가 않았다.
그냥 만나자고 할때 쪼르르 달려 나갈 걸.
뒷일은 뒤에 생각해야 되는데, 내가 너무 먼 훗날의 일을 생각했나 보다.
크리스 마스가 지나고 한 해의 마지막 날이 되었는데도 은정이 누나에게서 연락이 없었다.
삐쳤나?
올해 크리스 마스는 내게 외로움을 주었지요.
캐롤송이 들리고 화려한 조명등이 아름다운 청담동 이브의 밤 거리를 홀로 거닐다 왔습니다.
그냥 웃고 싶었어요.
고귀하신 분이 태어난 그 화려한 날에 아무 생각 없이 웃고 싶었습니다.
근데 웃지 못하고 외로움을 탔습니다.
외로움은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지요.
나, 연락하면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많아요.
동아리 선배 오빠들도 있구요.
우리 과에도 내가 만나자 하면 바로 달려올 선배 오빠나 동기 녀석들 많아요.
그렇지만 그들에겐 내가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만남 뒤에 오는 공허함이 싫었습니다.
차라리 여자 친구들 만나는게 낫죠.
내가 잘못 된 것일까요?
나 남자들 오래 사귀지 못했습니다.
내가 만나던 남자들은 어느 시점에선가 어색해지더군요.
하지만 내가 어색하게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색한 사람은 만나기 싫었고, 관심없는 사람들은 만남 자체가 공허할 뿐이지요.
내가 진짜 좋아했다고 생각한 사람도 이제 어색해 졌습니다.
어색한 사람은 잊혀지지요.
크리스 마스 날은 그냥 홀로 집에 있었습니다.
핸드폰도 꺼놓고 전화도 받지 않았습니다.
내가 나를 혼자 있게 만들었지만 자의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내게 생각나는 사람들은 나를 찾지 않았습니다.
어색한 승주는 잊혀지는 중이고, 제일 친했던 정희는 남자 친구와 학생시절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보내겠지요.
침대에 홀로 앉아 생각했습니다.
가볍게 사랑을 내 뱉은 사람들, 그 가벼운 사람들에게 나를 지켜줄 수 없다고 생각한 그 사람 모두를 잊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내년엔 새로운 사람이 생기겠지요.
조급하지 않으며, 조금씩 서로를 공유해 가는 소박한 사랑을 하고 싶습니다.
내년엔 가랑비를 맞고 싶습니다.
언제 젖었는지도 모르게 가는비를 맞으며 흠뻑 젖고 싶습니다.
최소한 승주 보다는 오래토록 내 곁에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습니다.
이런 생각들을 하게 만든 놈이 밉습니다.
그 녀석을 만났다면 그냥 생각없이 웃었을 텐데...
아무래도 올 해 크리스마스는 뭔가 다른 기분이 들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만나면 생각없이 웃게 만드는 그 녀석과 함께 할 것이라고 한달 전부터 계획했었는데, 녀석이 날 만나 주지 않았습니다.
여자 친구도 없는게 무슨 똥배짱이랍니까.
이브 날 아침부터 한 시간 간격으로 다섯 번이나 호출을 했습니다.
점심 때가 지나서야 전화가 왔더군요.
"0865로 호출 하신분이요?"
짜증도 났지만 반가운 목소리였지요.
"내가 오전부터 호출했는데, 왜 이제 전화하는거야? 너 늦잠 잤지?"
"일찍 일어 났습니다."
"저녁에 나와라.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
"나 바빠요."
"어쭈, 튕기네? 맛있는 거 사준다니까."
"우리집에도 먹을 거 많아요."
"나올 거면서 그렇게 튕기면 좋니?"
"누가 나간데요? 내가 부르면 항상 쪼르르 달려나가는 그런 사람인 줄 아세요?"
"너 오늘 만날 사람 없을 거 아냐."
"그렇긴 하지만, 나도 바쁠 수 있단 말입니다."
"교회나 성당 나갈거니?"
"아니요. 나를 왜 만나고 싶은데요?"
"그냥 심심하니까. 너 만나면 재밌잖아."
"우쒸, 나 바빠요. 전화 끊어요."
"야, 박철수."
"뚜우..."
녀석이 쌔게 나왔습니다.
집에다 전화를 했더니 아버님이 받으시더군요.
나보고 처자라고 말씀하시는 아버님이 무서워 그냥 끊었습니다.
나 철수에게 삐쳤습니다.
그래서 한 일주일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연인 사이도 아닌데, 내가 삐치네요.
지금 내가 좋아했던 사람에게 차이고, 남자 친구 만들지 않아 녀석한테 이런 수모를 당했지만 나중은 달라질거라 봅니다.
일주일째 철수도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다.
강적이네요.
너그러운 누나가 용서를 해야지요.
한 해의 마지막 날 울적하여 내가 먼저 철수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오늘은 바로 연락이 왔습니다.
그리고 새벽까지 집에 들어 가지 않았습니다.
타종식 하는 것을 꼭 보고 싶었어요.
그래서 종각을 갔었습니다.
11시부터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지요.
사람들 엄청 많았습니다.
바깥에 있으니 많이 추웠지요.
그렇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찬 공기 속에 뿜어져 사라지는 입김처럼 한 해가 떠나 갔습니다.
종각 앞에서 철수 녀석 손을 잡고 한 해를 떠나 보냈습니다.
사람들이 함성을 지르며 폴짝 폴짝 뛰더군요.
사람들은 또한 카메라가 보이자 손을 흔들기도 했습니다.
나도 죄다 따라 했습니다.
녀석이 그런 나를 어린애 쳐다 보는 듯한 모습을 하며 비웃네요.
"누나 이제 24살 된 거 맞아요? 하는 짓 보니까 아닌 것 같애."
타종식이 끝나고 사람들은 하나 둘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지요.
그래도 새벽 한시를 넘길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종각 주변에 모여 있었습니다.
철수가 자꾸 시계를 쳐다 보길래 더 있고 싶었지만 자리를 떴습니다.
주차 시킬데가 없어서 종각에서 아주 먼 곳에 차를 주차 시켜 놓았습니다.
종각에서 인사동을 거쳐 차 있는 곳으로 걸었습니다.
인사동은 고운 빛을 하고 저녁 같은 모습이었지요.
따끈한 새벽 녹차나 한 잔 했으면 했는데, 철수는 시계를 쳐다 보며 짙은 입김만 뿜더군요.
그냥 지나쳤습니다.
새해 첫날이라 돌아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래도 밤 거리가 신경이 쓰였지요.
차 주차 시켜 놓은 곳은 사람이 뜸한 곳이었거든요.
철수가 쌈 잘한다고 했으니 괜찮겠지요.
"나 이제 집에 못 들어가요."
철수는 걸으면서 투덜 거렸습니다.
"왜?"
"나, 차라리 외박은 가능해도 열두시 넘겨 집에는 못 들어가요."
"열쇠 가지고 나왔어야지."
"나는 누나처럼 작정하고 나온 게 아니잖아요."
"그럼 찻 집에서 밤을 샐까?"
"잠 와요."
"그럼 우리 집 가서 잘래?"
"이 여자가 진짜! 새벽에 싸돌아 다니는 것도 모자라서 집에 남자를 끌어 들여요? 부모님이 아시면 진짜 좋아하시겠다."
"싸돌아 다녀? 나 여기 간다고 얘기하고 나왔어. 당당히 허락 맞고 나온 거란말이야."
"안 추워요?"
"조금 춥긴 하다."
"누나는 집에 가요."
"너 집에 못 들어간다며? 벌써 새벽 두시다. 나 가버리면 너는 갈 데 있니?"
"그런다고 마냥 이렇게 있을 수는 없잖아요. 나는 집에 아침 아홉시를 넘겨야 들어 갈 수 있단 말입니다."
"그래서? 집에 몰래 숨어 들어 갈거야?"
"나 집에는 못 가요. 유일한 출입구인 현관문 잠궈 놨을 거 분명하거든요. 그리고 울 아버지 주무시다 깨시면 엄청 무서워요."
"그런데 너 어디 갈데 있냐구? 아까 찻집이나 가자니까."
"여관."
"뭐? 나도 따라 가야 되는거야?"
"그런 농담 하면 내가 재미있어 할 것 같아요? 웃지 말아요."
"호호, 이럴 때 보면 참 귀여운 데 말이야. 말투는 항상 톡톡 쏜다 말이야. 그냥 우리 집 가자."
"에, 그 자꾸 말도 안되는 소리 하지 말구요. 누나는 집에 가요."
"우리 집 가자니까."
"누나 집은 그래요? 밤 늦게 남자 데리고 가도 괜찮은 그런 집이에요?"
"당연히 아니지. 그렇지만 우리 부모님은 지금 주무셔. 나는 집 열쇠를 가지고나왔구."
"그래서요?"
"우리 집에 방 많아. 몰래 들어 가서 내일 아침에 밥 먹고 가면 되잖아."
"헛, 부모님은요?"
"우리 아빠, 엄마 아침 일찍 출근 하실거야."
"내일 노는 날이에요."
"그렇네. 그럼 다음에 재워 줄게."
"놀리는 거에요?"
"그럼 우리 집 근처 여관에서 자라. 우리 부모님 노는 날이라도 하루 종일 집에 계시지는 않아. 오전 중으로 다 어디 가실거야. 아침은 우리 집에서 먹어. 내가 차려 줄게."
"정말요?"
"응."
"누나 나따라 여관에서 자는 것은 아니죠?"
"왜? 진짜 따라 가 줄까?"
"자꾸 어린 애 취급 하지 말아요."
"그럼 니가 나보다 나이가 많니?"
"됐어요. 그럼 누나 동네로 갑시다. 나는 여관가서 잘테니까, 부모님 어디 가시고 나면 꼭 밥 차려 줘요."
"알았어."
철수가 나를 자주 놀렸죠.
나도 그것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아 냈습니다.
나, 새해 첫 날부터 여관 신세를 지었다.
요즘들어 누나가 날 어린애 취급 하는 게 못마땅하다.
예전보다 강도가 심해졌다.
저 여자에게 다시 한번 마음 단단히 먹어야 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정희 누나는 저거 애인하고 깨지면 뭔가 나에게 기댈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이 누나는 그게 아닌 것 같다.
진짜 동생으로 밖에는 생각 하지 않는 것 같다.
여관 아줌마가 낮 열두시가 되니까 날 내 쫓았다.
그때까지 누나는 연락이 없었다.
어떻게 된겨?
밥 차려 준다더니...
할 수 없이 집으로 갔다.
집에 다 도착하니 삐삐가 울렸다.
전화를 했더니 내가 어딨냐고 묻는다.
아침 차려 주겠다던 여자가 낮 1시까지 자빠져 자?
누가 남편 될지 골치 아프겠다.
할 줄 아는 음식이나 있을려나?
"다녀왔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근엄하게 날 맞으셨다.
"타종식은 잘 보았느냐?"
"네."
"누구랑 갔었느냐?"
"어제 전화 드렸잖아요."
"널 자주 꼬시던 그 여자하고 있었느냐?"
"네."
"밤은 어디서 샜느냐?"
"여관이요."
"물론 너 혼자 잤겠지?"
"물론이지요. 이상한 생각하지 마십시오."
"안했다 녀석아. 음, 그 여자가 두 살 연상이라고 했느냐?"
"네."
"앞으로 그 아가씨 자주 만나지 마라."
"싫은데요."
"자식이 바로 싫다고 그러네. 나는 너네 엄마하고 동갑이지만 별로 좋은 대우못 받았다. 여자를 사귈려면 나이를 좀 더 먹은 후에 한 여덟 살 어린 여자하고 사귀어라."
"전 그냥 선후배 사이로 만나는 거에요."
"지금은 그렇게 생각을 하겠지. 어제는 새해라 그러려니 했지만 여자하고 밤을 지새고 오는 그런 일은 삼가해라. 특히 연상의 여자하고는 말이다."
"네."
그 여자 내 방에서 세 번이나 자고 갔는데요.
그렇게 답을 해 버릴까 생각을 해 보았다.
그 말을 했다간 자취방 빼고 등,하교 여기서 하라고 할 것 같아서 참았다.
그리고 들고 계시는 티비 리모콘도 맞으면 상당히 아플 것 같았다.
우리 아버지도 상당히 도둑님 심보시네요.
여덟살 차이?
나보고 중, 고등학생하고 사귀란 말은 아닐테고 그러면 28살까지 여자 사귀지 말라는 말 아닌가.
너무 하십니다 아버지.
안 그래도 비참한 현실 속에 살고 있는데...
침대에 누워 어제 일을 떠올려 보았다.
은정이 누나와 손을 잡아 보았다.
추운 겨울 날씨였지만 장갑을 끼지 않은 채 오랫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그 곳을 촬영 나온 리포터 한 명이 옆의 사람 손을 잡고 흔들어 보라고 부탁을 했지만, 누나는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손은 잡지 않았다.
따뜻했는지 오랫동안 내 손을 놓지 않았었다.
나도 좋았다.
연상에 대해서 연구를 한 번 해 봐야 겠다.
겨울 방학 동안 누나를 자주 만났지만 늘 그런식이었다.
의식해서 받아 들이니까 너무 표가 났다.
누나는 분명 나를 좋아하고 있고, 나를 편한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예전보다 더 날 남자로 취급하지 않는 것 같다.
이월 달이 되고 정희 누나에게서 몇 번 연락이 왔었다.
정희 누나는 일월 달부터 이미 학생이 아니었다.
출근을 했으니까.
강북 어느 종합 병원 약재부에서 어엿한 약사로 사회에 첫 발을 내딛었다.
졸업식 때 보자며 연락이 몇 번 왔었다.
방은 나 모르는 사이 이미 빼 버렸다고 한다.
야속한 사람...
병원에 자주 놀러오라고 하지만, 학교에서 노원구까지면 졸라 먼데 가능한 일이냐.
이제 안 보이니까 조금씩 잊혀 질거라 생각하니 가심이 좀 시리다.
날 참 좋아해 주던 그 누나가 이제 잊혀지겠구나.
그 누나에겐 연상이라도 고려해 볼 마음이 있다고 말해 주었는데, 한 번도 진지하게 받아 준 적이 없어서 그냥 잊혀지게 생겼다.
그런 내 마음을 모르고 은정이 누나는 날 가지고 놀았다.
마음이 허한데 말이다.
"진짜 해 줘요?"
이월의 어느 날이었다.
저녁에 영화 한 편 같이 보고 날 집으로 데려다 준 누나가 며칠 전 부터 놀리던 발언을 또 했다.
그래서 차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
자뭇 심각한 표정으로 누나를 쏘아 보며 말했다.
날 집 앞에 데려다 주던 누나가 요즘 새로운 장난을 쳤다.
생글 생글 웃으며 말이다.
"잘 들어 가."
"그래요.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작별 하는데 키스도 안해 주고 가?"
"뭐여?"
"영화에서 봤을 거 아냐? 키스 해주며 달아 나는 사람도 봤을거구, 그냥 분위기 있게 키스 해 버리는 남자도 봤을테지? 하기야 거긴 대부분 남자가 운전을 했었구나. 그럼 내가 해 주어야 되나?"
해 주지도 않을 거면서 저런 말 내뱉으면 잼있을까?
"무슨 말 하는거에요? 장난 치지 말고 조심해서 잘 가요."
내 표정을 보며 웃는 누나가 귀엽기도 했지만 얄밉기도 했다
한 일주일 그런 표정을 보니까 기분이 살 나빠지대요.
나도 남잔데...
그래서 그 날은 바로 떠나지 않았다.
영화를 봤기 때문에 뭔가 배운 것도 있었다.
생글 웃는 누나에게 자뭇 진지하게 대답하고는 누나에게로 다가 갔다.
누나 어깨를 잡고 얼굴을 디밀어 버렸다.
진짜 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누나의 운전대를 잡고 있던 한 손마저 꽉 붙들고 제법 강하게 밀어 붙였다.
"야, 박철수. 너 뭐하는거야?"
"해 주라며?"
머리로 날 받아 버리는 누나 때문에 많이 슬펐다.
누나가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나를 씩씩되며 쳐다 본다.
진짜 슬프다.
그리고 억울하다.
난 진짜로 할 생각은 아니었단 말이다.
그냥 놀리길래 잘못하면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했을 뿐인데, 이 여자가 머리로 날 받았다.
그럴 거면서 그런 얘기들은 왜 했냐.
섧다.
연상에겐 진짜 맘주지 말아야지.
아프고 슬프다.
"이제 그런 장난 하지 말아요."
난 조금 어색하게 돌아섰다.
내가 했던 짓도 어색하고 날 받아 버린 누나도 어색했다.
말이 조금 서툴게 나왔다.
한 동안 삐친 척 해야겠다.
손잡이를 잡은 손이 다 떨렸다.
더 이상 안 놀릴 줄 알았는데, 누나는 문을 열고 나가려는 나를 잡았다.
그리고 또 놀렸다.
"하고 싶으면 해 봐."
이 여자가 진짜.
또 받을려구 그러나?
잠시 어색했던 마음도 없어졌다.
누나는 웃음이 가신 얼굴로 말똥히 나만 쳐다 보고 있다.
"진짜로 해요?"
기분이 별로 안 좋다.
누나 표정이 얄밉다.
"해 봐."
"진짜로?"
"그래."
"뽀뽀 아니고 키스로 합니다?"
"그래. 키스할테면 해."
무슨 작정으로 저러는지 진짜 헛갈린다.
지 머리 단단한 걸 믿나 보다.
어쩌냐 이걸.
누나는 내가 못할 거라 알고 있었더군요.
잠시 그걸 생각했나 봐요.
내가 한참동안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는데 씩 웃더군요.
"넌 아직 어려."
두살차이 가지고 이 여자도 되게 잰다.
"누나는 뭐 많아요?"
"내가 올해는 진짜 좋은 애하나 소개 시켜 줄게."
"됐어요. 나는 소개팅 타입이 아니라며?"
"그렇긴 하더라. 정희 졸업식 때 나올거야?"
그냥 나가려 했을 때 보다는 맘이 편하다.
말을 돌리면 어떻냐 분위기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 왔는데.
"네."
"그때 보자."
"그러지요. 조심해서 들어가요."
"미안했어."
"뭐가요? 머리로 받은 거?"
"아니, 너에게 장난친 거."
"그러니까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마요."
"그래도 너 이건 알아라. 아까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리 장난같이 해도 전혀 맘이 없었으면 그런 말 못해. 훗, 너도 어찌 보면 그 사람을 좀 닮은 것 같다."
그 사람?
승주씨를 말하는 거야?
내가 더 잘생겼지.
"누나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런 장난 많이 쳤죠? 그래 놓고 하려고 하면 머리로 다 받아 버렸죠?"
"훗! 너 알아서 생각 해."
진짜 해 버릴걸 그랬나?
그랬다면 어색했겠지?
저 여자가 어떤 맘을 먹고 있는지 짐작이 안된다.
일편단심파일거 같은 느낌도 주고, 아무나 홀리는 불여우 같기도 하고, 헛갈린다.
에이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친한 사이로 지내면 되지 뭐.
단순한 공대생이 복잡한 걸 생각하면 다치겠지?
암 그렇지.
잘가라 잘 난 여자야.
내가 철수를 너무 많이 놀렸나 봐요.
너무 어린 애 취급을 했나요?
철수는 내행동에 맘 상하지 않을 거라 믿었는데, 철수도 남자였다는 것을 잠시 잊었네요.
아무렇게나 대해서는 안되겠어요.
철수가 내 어깨와 한 손을 잡고 내게 키스하려고 달려 들었을 때, 잠시 당황이 되었지요.
상대가 철수라는 생각을 잊고, 예전 누군가에게 내 입술을 빼앗겼을 때가 생각이 나더군요.
머리로 받아 버렸지요.
철수의 모습이 순간 슬퍼 보였습니다.
내가 잘 못한 것인데, 순진한 철수에게 내 기분따라 마음을 다치게 한 것 같아 마음이 아팠습니다.
저 녀석 지금 표정을 보니까 아까 진짜로 할 마음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네요.
억울하다는 표정이에요.
지금 이대로 보내면 나도 그렇고 저 녀석도 그렇고 한 동안 어색하겠지요.
그래 할테면 해 봐라.
차라리 그게 나을 것 같아요.
키스 한 번 하면 어때요.
그거 하고 나면 쟤가 남자로 보일까요?
훗!
그는 아직은 나에게 남자로 보이기를 꺼려 하는 것 같습니다.
흠, 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하지 말자라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표정이 승주를 닮았네요.
녀석과는 이런 식으로 오랫동안 지내고 싶어요.
지금 심정은 어색한 사이가 되어 버릴지도 모르는 남,녀 사이가 아니라 지금처럼 계속 편하게 만날 수 있는 동생과 누나 사이가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녀석은 내게 이미 잊혀지기 싫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내년엔 정희도 곁에 없는데, 학교에서 녀석처럼 친근하고 맘 편한 사람은 곁에 있기 힘들겠지요.
잘 가라 귀여운 녀석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