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한 친구는 나보다 먼저 학교를 떠나 갔습니다.
정희의 졸업식장에는 그녀의 부모님과 오빠와 그리고 철규씨, 그도 나왔더군요.
아, 철수와 저도 있었어요.
철수는 그날 무시당했습니다.
철수의 표정이 약간 슬퍼 보였던 것은 그것 때문이겠지요.
그의 말처럼 철수는 정희를 상당히 마음에 두고 있었나 봐요.
철수는 철규씨를 그날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상상한 것보다 멋있지 않은 놈이라서 실망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훨씬 낫다고 말하더군요.
뭐,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면 살 때는 즐겁죠.
정희의 부모님에게 철수는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 때의 꼬마 모습으로만 기억되어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그냥 정희의 귀여운 동생 정도로만 배려해 주었지요.
확실히 철규씨와는 차이를 두는 모습이었습니다.
정희도 마찬가지였어요.
철수는 무시당했습니다.
철규씨는 철수에게 별다른 경쟁의식도 느끼지 않았고, 철수에게 별 시선도 두지 않았습니다.
철수는 나와 정희 사이에서 사진 한 장을 찍은 다음 그냥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가족들과, 그리고 정희와 단 둘이 사진을 찍는 철규씨의 모습이 싫었나 보지요.
정희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나도 자리를 떴습니다.
다음 날 나는 수원으로 내려 갔습니다.
철수가 수원에 있다고 전화가 왔더군요.
내가 단지 그 녀석을 보러 학교를 간 것은 아닙니다.
학교에서 볼 일을 보고, 철수의 오피스텔을 찾아 갔지요.
철수가 자기 자취방을 오피스텔로 불러 달라고 하더군요.
침대까지 있으니까 일반 자취방들과 다르게 불러 달라고 했어요.
내가 철수네 방을 찾았을 때, 그는 침대 앞에서 상도 없이 끓여 놓은 라면을 먹고 있더군요.
쫌 불쌍하네요.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기대하는 대답이 있는 것인지 의미 파악이 되지 않는 말을 꺼내었습니다.
"두고 보자 새끼."
"뭐?"
철수는 내가 뺏어 먹을까봐, 국물까지 후루룩 마신 다음 남비를 턱 놓더니 장엄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습니다.
"어제 그 새끼가 나보고 귀여운 녀석이라며 머리를 쓰다듬었어. 지가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몇살이나 많다고."
코트를 옷걸이에 걸며 대답을 해 주었지요.
그리고 침대에 걸터 앉았습니다.
"아, 철규씨 얘기구나. 다섯 살."
"내가 올해 한 살을 더 먹었는데, 그래도 다섯살 차이래요? 바보새끼. 하여튼, 내가 정희누나를 알아도 10년은 먼저 알았을텐데, 애인이 되고 나서도 내가 더 자주 만났는데 새끼가 날 아주 무시하는 투로 내려다 봤어. 사람들만 없었어도 쌈 났다 진짜. 얼굴살은 쪘는데, 팔 다리는 가는 것 같았어. 목선을 보면 알지. 새끼 맨날 야한 상상만 하고 있을거야."
무슨 말을 저리 쉬지도 않고 한답니까.
"겨우 졸업식장에 남자 친구 한 번 나타난 걸로 그 정도면 결혼 식장에서는 진짜 난리 나겠다. 결혼 식장에선 어디 정희가 네게 말 한마디 할 정신이 있겠니? 그리고 정희의 남편 되는 사람하고 나란히 있는 모습 보면 상당히 소외된 느낌 받을텐데."
"내가 먼저 가면 돼."
"니가 어떻게 먼저 가니? 같은 나이라도 여자가 먼저 가는데."
"정희 누나가 그 새끼하고 결혼 한대요?"
"모르지. 근데 철규씨가 니 친구야? 왜 새끼라고 그래? 너 예전에 승주 보고도 새끼라고 그랬니?"
"아니에요. 그 사람에게는 질투심을 별로 못 느꼈지. 그때 누나는 정희 누나에게 상대가 안됐어. 누나가 누굴 사귀던 뭔 상관이야?"
이게 진짜 질투심 유발하는 발언을 심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내뱉네요.
승주는 많이 잊혀졌나 봅니다.
이제 나에게 조연같은 느낌으로 이름이 거론 되어지네요.
"너 기분 나쁘다아?"
"지금은 둘이 비슷비슷 해요. 에, 정희 누나가 자주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났기 때문에 곧 누나가 더 좋아 지겠지요. 하지만 배운게 있어서 정희 누나하고는 조금 다를 거에요. 하하."
뭘 배웠는지는 대충 알지요.
자주 내 뱉던 말이니까요.
연상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 뜻이겠지요.
그래라 뭐.
"후후, 나한테 잘 해라. 앞으로 학교에서만 3년을 더 봐야 하는데."
"알았어요. 라면 끓여 드릴까요?"
"옥수수는 없니?"
"그때 누나가 다 먹어 치웠잖아요."
"라면은 염분 많고, 칼로리 많아서 잘 안 먹는데..."
"벨 이상한 소릴 다하네. 라면 없으면 이 곳 율전에서만 1000명 이상이 굶어 죽을 거에요. 자취생들 주식량인데. 자취생들은 그럼 맨날 염분 하고 칼로리 쌓아두면서 살게요."
"그래, 하나 끓여줘."
짜식이 라면은 잘 끓이더군요.
라면 하나를 먹었지요.
배가 부르고 스팀이 모락 모락 나는 실내는 따뜻하고 몸을 나른하게 만들더군요.
집에 갈때까지 여기서 조금 자다 일어 날까?
"너 오늘 서울 안 갈거야?"
"곧 개강인데 왜 가요?"
"나 혼자 가면 심심한데. 너 당구장 안가니?"
"왜? 한 게임 할래요?"
"그게 아니고, 나 여기서 좀 자다 일어 나면 안될까?"
"날 무시하는 행동이다."
"널 믿는다는 행동이라곤 생각 못하지?"
"안돼요. 저기 삼층의 어떤 녀석이 동거한다는 소문 나가지고 주인 아줌마가 쫓아 낼 생각만 하고 있단 말입니다. 나도 그런 소문 나면 쫓겨 난다 말입니다."
"그런 소문 두려운 녀석이 내가 여기 찾아 온 건 왜 말리지 않았니? 별 희한한 생각하고 있어."
"진짜 쫓겨 나는데..."
"나도 방 하나 얻을까? 이 오피스텔에 빈 방 있니?"
"이게 무슨 오피스텔이야?"
"그렇게 불러 달라며. 여기가 정희네 방보다 훨씬 크고 깨끗해."
"음, 그렇지요. 누나 진짜 자취하게요?"
"몰라. 이 번 학기까지는 다녀 보다 안되겠다 싶으면 방 하나 얻지 뭐. 얻으면 이 곳에다 얻어야지."
"에이쒸."
"내가 가까이 있는 게 싫어?"
"너무 가까워 지면 안되는데?"
"왜?"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치, 너 간혹 시를 적던데, 그 대상이 누구야? 정희지?"
녀석이 또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리네요.
"내가 가지고 간 그 시도 그럼?"
"어떤 신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뭐 그립다, 못 잊겠다 그런 말 적어 놓았으면 맞을 거에요. 이제 끝이다. 신난다."
"뭐가?"
"아, 이제는 떠났으니까 정희 누나에 대해서는 안 쓰야지. 그 새끼하고 잘 살아라 그래. 이제 누나를 대상으로 한 번 적어 볼까?"
"그래, 그래라."
"그러지요. 그래도 오늘 여기서 조금 자다 일어나는 것은 안돼요. 그냥 지금 서울 갑시다."
"너는 여기 있고?"
"따라 가죠 뭐."
정희 누나는 졸업을 하고 학교를 떠났다.
허전하다.
이제 허전하고 생각나면 찾아 가던 정희 누나의 방은 딴 사람이 들어 서 내가 가지 못하는 곳으로 변했다.
은정이 누나가 곁에 있지만 통학을 하기 때문에 앞으로 잠들기 전 밤이 외로우면 찾아 갈 곳이 없다.
여자 친구를 사귀면 이런 느낌이 안들텐데, 내가 연상들 틈에서 이 무슨 꼴이냐.
은정이 누나가 자취를 할까 생각 중이다.
아주 환영하는 바이지만, 너무 티를 내면 은정이 누나가 거만해 질 것이기 때문에 관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헛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그리운 사람이라면 붙어 있는게 좋지 떨어져 있는게 좋냐.
붙어 있으면서도 충분히 그리울 수 있다.
당신이 그리운 건 내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정희 누나가 그랬는데...
아직 춥다.
주위의 색깔들도 아직은 겨울 색이다.
아침엔 입김이 안개처럼 퍼져 나간다
그래도 봄이랜다.
나, 삼학년 됐다.
삼학년이 되고 학교를 가 보니까, 모르는 놈들 투성이다.
동기들 대부분이 군대로 사라져 갔다.
동기들은 자퇴하지 않는다.
다만 군대로 징집되어 사라졌을 뿐이다.
90, 91학번 늙은이들과 같이 수업 들을려니 별로 신나지 않았다.
군대 갔다 오더니 곱게 늙지 못하고, 모두들 이상하게 변한 것 같았다.
공부도 좀 해야 겠다.
내가 그런대로 성적이 좋지만 군발이들을 상대하려면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당구장에서는 조금 낄낄 될 수 있었다.
군대 가서 당구 실력이 줄은 선배들 탓에 난 승승장구 했다.
난 이제 120을 넘어 섰다.
150도 머지 않았다.
기다려라 홍은정, 그대를 따라 잡을 날도 멀지 않았소.
누나는 삼월 초에는 자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삼월 말이 되면서도 자주 보지못했다.
약대 내에서도 복학한 형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 사귀어라.
"아버지, 오늘은 잠실까지 갔다 오겠습니다."
"빨리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도록 노력해라. 그래야 내 심부름도 하고, 네 엄마도 나 대신 모시고 다니지. 이건 오면서 배달하고 오너라."
"그러지요. 저걸 배달까지 하고 오는데, 오늘도 제가 기름을 넣어야 합니까?"
"당연한 것은 자주 묻는 것이 아니다."
젊은 놈이 타고 다니기에는 대형차라 바로 아버지 차 타고 나온게 티가 나지만 그래도 기분 좋다.
산지 이년 가까이 됐는데, 계기판을 보면 이제 8천 키로 밖에 되지 않는다.
거의 새차구만.
우리 아버지 차도 오토매틱이다.
에이비에스 브래끼에다 에어백도 있다.
실내도 넓다.
의자도 전동식이다.
실내가 우드 그래인으로 장식 되어 있다.
2500씨씨 6기통이다.
쉽게 말해서 고급차란 뜻이다.
신형 그랜져다.
그렇지만 그 잘난 은정이 누나차가 더 비싼 차다.
내가 그런 것에 꼴리면 안되는데, 요즘들어 내가 누나보다 잘난 게 뭐가 있는지 따지는 짓을 자주 한다. 마음이 가고 있다는 뜻이겠지?
봄 색깔이 초록으로 물들고 있다.
여자는 봄에 약하다더니, 이 여자가 봄 바람이 났나?
최근들어 누나를 자주 보지 못했다.
운전 연습을 하면서 누나 동네를 가 보았다.
누나가 사는 빌라 앞에서 차를 정차 시켜 놓고 음악을 듣다 왔다.
집에 누나가 있을까?
요즘들어 삐삐도 쳐주지 않는 누나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진짜 봄바람 났나?
여자는 색조에 약하지요.
가슴 떨리게 하는 봄의 색조들은 많은 그리움을 떠 올리게 하더군요.
봄이 되니까 승주 그 사람이 자주 생각이 났어요.
그립기 때문에 잊혀지지 않는 것일까요.
잊혀지기 때문에 그리운 것일까요.
꽃이 하나 피어 날 때 그 사람 기억하나가 피어 나고, 꽃 잎 하나 떨어 질 때 설레이는 느낌 하나가 내 맘에 내려 앉았지요.
봄의 색깔은 점점 나를 유혹해 갔습니다.
그 유혹 따라 설레었지요.
군대 갔던 동기들이 돌아 왔어요.
어른 스러워 진 모습들이었지요.
그들과 어울렸습니다.
공허함을 지우기 위해서, 봄의 유혹에 못 이겨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괜찮더군요.
철수와 아옹다옹하는 것도 좋았지만 내 또래와 내 위 사람들을 만나면서 철수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그런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지요.
승주에게서 느꼈던 그런 것들 말입니다.
나도 연하를 좋아하고 할 타입은 아닌가봐요.
동기 한 명과 사귈뻔 했지요.
내게 적극적인 녀석이 한 명 있었어요.
제법 남자 다웠지요.
매너도 있었고, 여자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서둘렀습니다.
그는 나를 너무 쉽게 봤나 봐요.
이제 호감이 가려는 시점에서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지요.
그의 서두름으로 과 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소문은 나에게서 그를 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중간 고사 기간에 그가 나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과 내의 다른 시선은 상관없이 그는 나를 원했지요.
편지는 시도 적혀있고 제법 애틋한 말들로 꾸며져 있었지요.
그렇지만 난 어색함이 싫었습니다.
나는 그 편지를 무시했습니다.
나를 어색하게 찾아 온 그에게 나는 또 쌀쌀함을 보였지요.
내 버릇일까요?
시험이 끝나고 과 동기들이 모인 어느 술좌석에서 술에 취한 그가 내게 서운했던 것을 털어 놓더군요.
그리고 자기 분에 못이겨 나쁜 술버릇이 나왔습니다.
한 마디로 꼬장을 부린 거지요.
귀엽게 술주정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가서도 심한 언사를 내 뱉더군요.
나는 저런 게 싫어요.
술을 먹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거.
취중진담?
추한 모습일 뿐입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례를 범하는 행동이 싫었습니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좋은 기억들도 그는 스스로 던져 버렸습니다.
한 달 고작 친하게 지냈다고 내게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었습니다.
내게 심한 말도 했지요.
무시했습니다.
다른 남자 동기들이 술에 취했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사람 편을 들었어요.
같이 술에 취한 그의 친구가 심하게 그를 편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똑같을 수는 없지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대쉬하는 남성을 좋아하는 여자도 있지만, 적어도 난 그렇지 않아요.
술에 취한 그는 내가 너무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고 있다고 하더군요.
뭐, 어때.
난 여자 후배들과 집에 가지도 못하고 그의 술주정을 들어 주어야 했습니다.
남자 동기들은 그를 어디론가 데려 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 왔어요.
나 그 사람 술버릇 때문에 한 대 맞았어요.
눈물이 나오고 사람이 싫어지더군요.
너 이제 끝이야.
나, 그 남자에게 심하게 뺨을 맞았습니다.
주위에 있던 여자 후배들은 놀란 듯 나를 둘러쌓았지요.
남자들에게 끌려간 그 남자는 여전히 씩씩되며 나를 노려 보았습니다.
그때 왜 그 녀석이 생각이 났을까요.
울면서 삐삐를 쳤습니다.
내게 다시 전화가 올때까지 앉아서 울었습니다.
주위 후배들이 의아한 표정이더군요.
"0865로 호출하신 분이요?"
"나 장난칠 기분 아니야."
"오랜만이네요?"
"나 좀 데려가."
"누나가 어디있는 줄 어떻게 알아요. 나 지금 당구친다 말이에요."
"나 누구한테 맞았어. 심하게 뺨을 맞았단 말이야. 앙..."
"에? 거기 어딘데요?"
"여기? **호프집 뒷 골목이야."
녀석은 5분만에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나를 데려 가려 했지요.
철수는 아무말없이 주위 사정 살피지 않고 그냥 나를 데려 가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나 봅니다.
술취한 그 남자가 달려와 철수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아주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는 철수를 보았지요.
주위에선 술 취했으니까 참아라 그러며 대신 사과하는 녀석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과의 모르는 남자가 와서 나를 데려가려 하자 못마땅해 하는 모습이었지요.
"누나, 얼굴이 빨갛거든요. 나보다 더 쌔게 맞았어요?"
"응."
그때부터 나는 무협 영화를 보았지요.
두 사람이 철수의 어깨를 잡고 늘어 졌으며, 술취한 그 사람 말고 다른 한 명도 철수에게 맞았습니다.
그 사람을 포함해 우리 과에 다섯 명의 남자들이 있었는데 철수 혼자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잡고 있던 두명에 의해 나에게로 왔다가 잡고 있던게 풀리자 날 때린 그 사람에게 쫓아 가서 다시 날아차기 하는 철수를 보았습니다.
철수는 진짜 쌈을 잘했습니다.
기분 좋았지요.
근데 문제가 될 것도 같아요.
술에 취한 그 사람은 철수에게 계속 시비를 걸었고, 철수는 날아차기 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선 철수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나보고 누나,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버릇 없는 놈이라며 하나, 둘 날 때린 그 사람 편을 들기 시작했지요.
1대5였지요.
그래도 철수는 계속 날아차기 하려 했습니다.
다섯명이 험한 표정을 지으며 철수를 위협했지만 철수는 하나도 기가 죽지 않더군요.
진짜 큰 싸움 날 뻔 했어요.
그러자 여자 후배 중에 누가 신고를 했어요.
우리나라 경찰차 빨리 오더군요.
경찰차 두대에 나를 포함해 철수, 그리고 우리 동기 남자들 다섯명 모두가 파출소로 끌려 갔더랬습니다.
"이 새끼가 날 다짜고짜 팼어요."
날 때린 녀석은 분함을 표시하며 큰 소리로 떠들었지만 철수는 조용하더군요.
다른 말은 안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계속 그 말만 했습니다.
"얘는 나 때문에 그랬어요. 저 사람이 술 먹고 날 때렸단 말이에요."
제가 대신 변명을 해 주었지요.
동기들에게도 사실을 말하도록 잘 타일렀습니다.
옥신 각신하며 동기들끼리 의견이 나누어져 쟤가 잘했니, 철수가 잘했니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조서는 꾸미지 않더군요.
그냥 훈방 조취 되었지만 철수는 한 동안 고개를 들지 않고 계속 죄송하다는 말만 내 뱉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철수는 별 다른 취조를 당하지 않았어요.
날 때린 그 남자만 계속 깡을 부리다 출석부 같은 걸로 두들겨 맞고 야단도 맞았지요.
한 때 저 남자에게 호감을 가졌던 게 다 원망스럽습니다.
근데 철수는 왜 그 난리를 부렸던 것일까요?
내가 한 대 맞았던게 기분이 나빴을까요.
자기가 한 대 맞은 게 기분이 나빴을까요.
오늘 집에 가긴 걸렀습니다.
11시가 넘어 파출소로 끌려 갔었는데, 지금은 새벽 한시가 다 되었습니다.
"야, 너 왜 그랬어?"
"저 새끼들 91학번이에요?"
"응."
"큰일났네. 우리 과 선배들에게 알리면 안되는데... 그리고 말입니다. 파출소 끌려 갔을 때는 고개를 숙이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는게 가장 빨리 풀려나는 지름길이거든요. 웬만하면 다 훈방 조취인데, 변명할 거 없어요. 죄를 뒤집어 쓰지 않을 정도의 경범죄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는 게 최고에요. 경험으로 배운
겁니다. 누나도 앞으로 파출소 끌려 가면 그러세요."
"뭐야? 나 오늘 너 아니었으면 파출소 가지 않았어. 앞으로 갈 일 없단 말이다."
"누가 알아요 그걸. 그리고 누나 왜 그래요? 또 그 버릇 나온거야?"
"뭘? 남자 차는 거? 모르겠다. 조금 서글프네."
"오늘 누나 때문에 3년만에 파출소 구경했네. 집에 연락하면 어쩌나 졸라 떨었잖아요."
"내가 맞은게 기분 나빴던 거니? 아니면 니가 맞아서 열 받은거니?"
"저 새끼가 내 머리 때렸을 때 졸라 아팠거든요. 누나 뺨은 더 세게 맞았다면서요. 누나가 때릴 데가 어딨다고..."
"후후, 그 말 믿어도 돼?"
"그럼요."
"오늘 나 잘데 없는데?"
"오늘만 내 방에서 재워 준다."
"열쇠 줘. 나 먼저 몰래 들어가 있을 테니까, 넌 숙취제거제 하고 치솔하고, 뭐 내게 필요한 거 있으면 다 사가지고 와."
"돈을 줘야죠."
"그래. 만화책도 빌려 올래?"
"만화방이 지금까지 열었을래나?"
"후후, 한 번 가 봐. 그리고 너 진짜 쌈 잘하나 봐?"
"정의를 위해서만 사용하지요."
"푸후!"
나는 철수의 방에서 네 번째 밤을 맞이 했습니다.
모르겠어요 아직은. 연하가 뭐 어때?
이런 감정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철수는 내 잠옷을 따로 한 서랍에다 넣어 두었습니다.
자기 서랍에는 꾸깃 꾸깃 여러 옷들을 겹쳐 넣어 놓았으면서 내 잠옷은 넓은 서랍의 공간에 홀로 넣어
두었더군요.
녀석이 오기 전에 옷을 갈아 입고 세수를 했지요.
그리고 녀석의 침대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거울에 얼굴을 보니 말이 아니네요.
핏줄이 튀겼어요.
그 자식 내가 다시 보면 인간이 아니다.
철수가 열받을 만도 했겠어요.
호호. 철수 때문에 뺨을 맞았던 기분 나쁜 감정을 지울 수 있었습니다.
내 곁에 있는 호랑이가 자세히 보니 철수를 닮았네요.
이런 인형을 왜 사다 놓았을까?
한 마리 사줘야 겠군요.
내가 방에 들어 온지 30분이 훨씬 더 지났는데도 녀석은 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푸우.
"누나, 만화방 열었어요. 누나? 드래곤 볼 다 안봤죠? 38권까지 나왔더라구요. 이거 다시 봐도 잼있어요."
녀석은 드래곤 볼만 20권 가까이 빌려 왔더군요.
저것 때문에 늦었군요.
한 쪽엔 만화책을 잔뜩 들고, 다른 한 쪽엔 먹을 것과 칫솔 하나가 든 비닐 봉지가 들렸군요.
연하는 저렇군요.
정희의 졸업식장에는 그녀의 부모님과 오빠와 그리고 철규씨, 그도 나왔더군요.
아, 철수와 저도 있었어요.
철수는 그날 무시당했습니다.
철수의 표정이 약간 슬퍼 보였던 것은 그것 때문이겠지요.
그의 말처럼 철수는 정희를 상당히 마음에 두고 있었나 봐요.
철수는 철규씨를 그날 처음 봤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상상한 것보다 멋있지 않은 놈이라서 실망했다고 했습니다.
자기가 훨씬 낫다고 말하더군요.
뭐,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면 살 때는 즐겁죠.
정희의 부모님에게 철수는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 때의 꼬마 모습으로만 기억되어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그냥 정희의 귀여운 동생 정도로만 배려해 주었지요.
확실히 철규씨와는 차이를 두는 모습이었습니다.
정희도 마찬가지였어요.
철수는 무시당했습니다.
철규씨는 철수에게 별다른 경쟁의식도 느끼지 않았고, 철수에게 별 시선도 두지 않았습니다.
철수는 나와 정희 사이에서 사진 한 장을 찍은 다음 그냥 집으로 가버렸습니다.
가족들과, 그리고 정희와 단 둘이 사진을 찍는 철규씨의 모습이 싫었나 보지요.
정희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 나도 자리를 떴습니다.
다음 날 나는 수원으로 내려 갔습니다.
철수가 수원에 있다고 전화가 왔더군요.
내가 단지 그 녀석을 보러 학교를 간 것은 아닙니다.
학교에서 볼 일을 보고, 철수의 오피스텔을 찾아 갔지요.
철수가 자기 자취방을 오피스텔로 불러 달라고 하더군요.
침대까지 있으니까 일반 자취방들과 다르게 불러 달라고 했어요.
내가 철수네 방을 찾았을 때, 그는 침대 앞에서 상도 없이 끓여 놓은 라면을 먹고 있더군요.
쫌 불쌍하네요.
내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내게 기대하는 대답이 있는 것인지 의미 파악이 되지 않는 말을 꺼내었습니다.
"두고 보자 새끼."
"뭐?"
철수는 내가 뺏어 먹을까봐, 국물까지 후루룩 마신 다음 남비를 턱 놓더니 장엄한 표정으로 말을 뱉었습니다.
"어제 그 새끼가 나보고 귀여운 녀석이라며 머리를 쓰다듬었어. 지가 나보다 나이가 많으면 몇살이나 많다고."
코트를 옷걸이에 걸며 대답을 해 주었지요.
그리고 침대에 걸터 앉았습니다.
"아, 철규씨 얘기구나. 다섯 살."
"내가 올해 한 살을 더 먹었는데, 그래도 다섯살 차이래요? 바보새끼. 하여튼, 내가 정희누나를 알아도 10년은 먼저 알았을텐데, 애인이 되고 나서도 내가 더 자주 만났는데 새끼가 날 아주 무시하는 투로 내려다 봤어. 사람들만 없었어도 쌈 났다 진짜. 얼굴살은 쪘는데, 팔 다리는 가는 것 같았어. 목선을 보면 알지. 새끼 맨날 야한 상상만 하고 있을거야."
무슨 말을 저리 쉬지도 않고 한답니까.
"겨우 졸업식장에 남자 친구 한 번 나타난 걸로 그 정도면 결혼 식장에서는 진짜 난리 나겠다. 결혼 식장에선 어디 정희가 네게 말 한마디 할 정신이 있겠니? 그리고 정희의 남편 되는 사람하고 나란히 있는 모습 보면 상당히 소외된 느낌 받을텐데."
"내가 먼저 가면 돼."
"니가 어떻게 먼저 가니? 같은 나이라도 여자가 먼저 가는데."
"정희 누나가 그 새끼하고 결혼 한대요?"
"모르지. 근데 철규씨가 니 친구야? 왜 새끼라고 그래? 너 예전에 승주 보고도 새끼라고 그랬니?"
"아니에요. 그 사람에게는 질투심을 별로 못 느꼈지. 그때 누나는 정희 누나에게 상대가 안됐어. 누나가 누굴 사귀던 뭔 상관이야?"
이게 진짜 질투심 유발하는 발언을 심각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내뱉네요.
승주는 많이 잊혀졌나 봅니다.
이제 나에게 조연같은 느낌으로 이름이 거론 되어지네요.
"너 기분 나쁘다아?"
"지금은 둘이 비슷비슷 해요. 에, 정희 누나가 자주 볼 수 없는 곳으로 떠났기 때문에 곧 누나가 더 좋아 지겠지요. 하지만 배운게 있어서 정희 누나하고는 조금 다를 거에요. 하하."
뭘 배웠는지는 대충 알지요.
자주 내 뱉던 말이니까요.
연상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 뜻이겠지요.
그래라 뭐.
"후후, 나한테 잘 해라. 앞으로 학교에서만 3년을 더 봐야 하는데."
"알았어요. 라면 끓여 드릴까요?"
"옥수수는 없니?"
"그때 누나가 다 먹어 치웠잖아요."
"라면은 염분 많고, 칼로리 많아서 잘 안 먹는데..."
"벨 이상한 소릴 다하네. 라면 없으면 이 곳 율전에서만 1000명 이상이 굶어 죽을 거에요. 자취생들 주식량인데. 자취생들은 그럼 맨날 염분 하고 칼로리 쌓아두면서 살게요."
"그래, 하나 끓여줘."
짜식이 라면은 잘 끓이더군요.
라면 하나를 먹었지요.
배가 부르고 스팀이 모락 모락 나는 실내는 따뜻하고 몸을 나른하게 만들더군요.
집에 갈때까지 여기서 조금 자다 일어 날까?
"너 오늘 서울 안 갈거야?"
"곧 개강인데 왜 가요?"
"나 혼자 가면 심심한데. 너 당구장 안가니?"
"왜? 한 게임 할래요?"
"그게 아니고, 나 여기서 좀 자다 일어 나면 안될까?"
"날 무시하는 행동이다."
"널 믿는다는 행동이라곤 생각 못하지?"
"안돼요. 저기 삼층의 어떤 녀석이 동거한다는 소문 나가지고 주인 아줌마가 쫓아 낼 생각만 하고 있단 말입니다. 나도 그런 소문 나면 쫓겨 난다 말입니다."
"그런 소문 두려운 녀석이 내가 여기 찾아 온 건 왜 말리지 않았니? 별 희한한 생각하고 있어."
"진짜 쫓겨 나는데..."
"나도 방 하나 얻을까? 이 오피스텔에 빈 방 있니?"
"이게 무슨 오피스텔이야?"
"그렇게 불러 달라며. 여기가 정희네 방보다 훨씬 크고 깨끗해."
"음, 그렇지요. 누나 진짜 자취하게요?"
"몰라. 이 번 학기까지는 다녀 보다 안되겠다 싶으면 방 하나 얻지 뭐. 얻으면 이 곳에다 얻어야지."
"에이쒸."
"내가 가까이 있는 게 싫어?"
"너무 가까워 지면 안되는데?"
"왜?"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치, 너 간혹 시를 적던데, 그 대상이 누구야? 정희지?"
녀석이 또 자연스럽게 고개를 끄덕거리네요.
"내가 가지고 간 그 시도 그럼?"
"어떤 신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뭐 그립다, 못 잊겠다 그런 말 적어 놓았으면 맞을 거에요. 이제 끝이다. 신난다."
"뭐가?"
"아, 이제는 떠났으니까 정희 누나에 대해서는 안 쓰야지. 그 새끼하고 잘 살아라 그래. 이제 누나를 대상으로 한 번 적어 볼까?"
"그래, 그래라."
"그러지요. 그래도 오늘 여기서 조금 자다 일어나는 것은 안돼요. 그냥 지금 서울 갑시다."
"너는 여기 있고?"
"따라 가죠 뭐."
정희 누나는 졸업을 하고 학교를 떠났다.
허전하다.
이제 허전하고 생각나면 찾아 가던 정희 누나의 방은 딴 사람이 들어 서 내가 가지 못하는 곳으로 변했다.
은정이 누나가 곁에 있지만 통학을 하기 때문에 앞으로 잠들기 전 밤이 외로우면 찾아 갈 곳이 없다.
여자 친구를 사귀면 이런 느낌이 안들텐데, 내가 연상들 틈에서 이 무슨 꼴이냐.
은정이 누나가 자취를 할까 생각 중이다.
아주 환영하는 바이지만, 너무 티를 내면 은정이 누나가 거만해 질 것이기 때문에 관조적인 태도를 취했다.
당신이 그리운 건 내게서 조금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헛소리 하지 말라고 그래.
그리운 사람이라면 붙어 있는게 좋지 떨어져 있는게 좋냐.
붙어 있으면서도 충분히 그리울 수 있다.
당신이 그리운 건 내 곁에 있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정희 누나가 그랬는데...
아직 춥다.
주위의 색깔들도 아직은 겨울 색이다.
아침엔 입김이 안개처럼 퍼져 나간다
그래도 봄이랜다.
나, 삼학년 됐다.
삼학년이 되고 학교를 가 보니까, 모르는 놈들 투성이다.
동기들 대부분이 군대로 사라져 갔다.
동기들은 자퇴하지 않는다.
다만 군대로 징집되어 사라졌을 뿐이다.
90, 91학번 늙은이들과 같이 수업 들을려니 별로 신나지 않았다.
군대 갔다 오더니 곱게 늙지 못하고, 모두들 이상하게 변한 것 같았다.
공부도 좀 해야 겠다.
내가 그런대로 성적이 좋지만 군발이들을 상대하려면 조금 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당구장에서는 조금 낄낄 될 수 있었다.
군대 가서 당구 실력이 줄은 선배들 탓에 난 승승장구 했다.
난 이제 120을 넘어 섰다.
150도 머지 않았다.
기다려라 홍은정, 그대를 따라 잡을 날도 멀지 않았소.
누나는 삼월 초에는 자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삼월 말이 되면서도 자주 보지못했다.
약대 내에서도 복학한 형들이 있을 것이다.
그래 사귀어라.
"아버지, 오늘은 잠실까지 갔다 오겠습니다."
"빨리 베스트 드라이버가 되도록 노력해라. 그래야 내 심부름도 하고, 네 엄마도 나 대신 모시고 다니지. 이건 오면서 배달하고 오너라."
"그러지요. 저걸 배달까지 하고 오는데, 오늘도 제가 기름을 넣어야 합니까?"
"당연한 것은 자주 묻는 것이 아니다."
젊은 놈이 타고 다니기에는 대형차라 바로 아버지 차 타고 나온게 티가 나지만 그래도 기분 좋다.
산지 이년 가까이 됐는데, 계기판을 보면 이제 8천 키로 밖에 되지 않는다.
거의 새차구만.
우리 아버지 차도 오토매틱이다.
에이비에스 브래끼에다 에어백도 있다.
실내도 넓다.
의자도 전동식이다.
실내가 우드 그래인으로 장식 되어 있다.
2500씨씨 6기통이다.
쉽게 말해서 고급차란 뜻이다.
신형 그랜져다.
그렇지만 그 잘난 은정이 누나차가 더 비싼 차다.
내가 그런 것에 꼴리면 안되는데, 요즘들어 내가 누나보다 잘난 게 뭐가 있는지 따지는 짓을 자주 한다. 마음이 가고 있다는 뜻이겠지?
봄 색깔이 초록으로 물들고 있다.
여자는 봄에 약하다더니, 이 여자가 봄 바람이 났나?
최근들어 누나를 자주 보지 못했다.
운전 연습을 하면서 누나 동네를 가 보았다.
누나가 사는 빌라 앞에서 차를 정차 시켜 놓고 음악을 듣다 왔다.
집에 누나가 있을까?
요즘들어 삐삐도 쳐주지 않는 누나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진짜 봄바람 났나?
여자는 색조에 약하지요.
가슴 떨리게 하는 봄의 색조들은 많은 그리움을 떠 올리게 하더군요.
봄이 되니까 승주 그 사람이 자주 생각이 났어요.
그립기 때문에 잊혀지지 않는 것일까요.
잊혀지기 때문에 그리운 것일까요.
꽃이 하나 피어 날 때 그 사람 기억하나가 피어 나고, 꽃 잎 하나 떨어 질 때 설레이는 느낌 하나가 내 맘에 내려 앉았지요.
봄의 색깔은 점점 나를 유혹해 갔습니다.
그 유혹 따라 설레었지요.
군대 갔던 동기들이 돌아 왔어요.
어른 스러워 진 모습들이었지요.
그들과 어울렸습니다.
공허함을 지우기 위해서, 봄의 유혹에 못 이겨서 여러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괜찮더군요.
철수와 아옹다옹하는 것도 좋았지만 내 또래와 내 위 사람들을 만나면서 철수에게서 느끼지 못했던 그런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지요.
승주에게서 느꼈던 그런 것들 말입니다.
나도 연하를 좋아하고 할 타입은 아닌가봐요.
동기 한 명과 사귈뻔 했지요.
내게 적극적인 녀석이 한 명 있었어요.
제법 남자 다웠지요.
매너도 있었고, 여자에 대해 아는 것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서둘렀습니다.
그는 나를 너무 쉽게 봤나 봐요.
이제 호감이 가려는 시점에서 그는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지요.
그의 서두름으로 과 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돌았습니다.
그 소문은 나에게서 그를 어색하게 만들었습니다.
중간 고사 기간에 그가 나에게 사랑한다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과 내의 다른 시선은 상관없이 그는 나를 원했지요.
편지는 시도 적혀있고 제법 애틋한 말들로 꾸며져 있었지요.
그렇지만 난 어색함이 싫었습니다.
나는 그 편지를 무시했습니다.
나를 어색하게 찾아 온 그에게 나는 또 쌀쌀함을 보였지요.
내 버릇일까요?
시험이 끝나고 과 동기들이 모인 어느 술좌석에서 술에 취한 그가 내게 서운했던 것을 털어 놓더군요.
그리고 자기 분에 못이겨 나쁜 술버릇이 나왔습니다.
한 마디로 꼬장을 부린 거지요.
귀엽게 술주정 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친구들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가서도 심한 언사를 내 뱉더군요.
나는 저런 게 싫어요.
술을 먹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거.
취중진담?
추한 모습일 뿐입니다.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무례를 범하는 행동이 싫었습니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좋은 기억들도 그는 스스로 던져 버렸습니다.
한 달 고작 친하게 지냈다고 내게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 싫었습니다.
내게 심한 말도 했지요.
무시했습니다.
다른 남자 동기들이 술에 취했으니 이해해 달라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 사람 편을 들었어요.
같이 술에 취한 그의 친구가 심하게 그를 편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다 똑같을 수는 없지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대쉬하는 남성을 좋아하는 여자도 있지만, 적어도 난 그렇지 않아요.
술에 취한 그는 내가 너무 이상적인 사랑을 꿈꾸고 있다고 하더군요.
뭐, 어때.
난 여자 후배들과 집에 가지도 못하고 그의 술주정을 들어 주어야 했습니다.
남자 동기들은 그를 어디론가 데려 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갑자기 나에게 달려 왔어요.
나 그 사람 술버릇 때문에 한 대 맞았어요.
눈물이 나오고 사람이 싫어지더군요.
너 이제 끝이야.
나, 그 남자에게 심하게 뺨을 맞았습니다.
주위에 있던 여자 후배들은 놀란 듯 나를 둘러쌓았지요.
남자들에게 끌려간 그 남자는 여전히 씩씩되며 나를 노려 보았습니다.
그때 왜 그 녀석이 생각이 났을까요.
울면서 삐삐를 쳤습니다.
내게 다시 전화가 올때까지 앉아서 울었습니다.
주위 후배들이 의아한 표정이더군요.
"0865로 호출하신 분이요?"
"나 장난칠 기분 아니야."
"오랜만이네요?"
"나 좀 데려가."
"누나가 어디있는 줄 어떻게 알아요. 나 지금 당구친다 말이에요."
"나 누구한테 맞았어. 심하게 뺨을 맞았단 말이야. 앙..."
"에? 거기 어딘데요?"
"여기? **호프집 뒷 골목이야."
녀석은 5분만에 달려 왔습니다.
그리고 나를 데려 가려 했지요.
철수는 아무말없이 주위 사정 살피지 않고 그냥 나를 데려 가려고 했습니다.
그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했나 봅니다.
술취한 그 남자가 달려와 철수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아주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짓는 철수를 보았지요.
주위에선 술 취했으니까 참아라 그러며 대신 사과하는 녀석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과의 모르는 남자가 와서 나를 데려가려 하자 못마땅해 하는 모습이었지요.
"누나, 얼굴이 빨갛거든요. 나보다 더 쌔게 맞았어요?"
"응."
그때부터 나는 무협 영화를 보았지요.
두 사람이 철수의 어깨를 잡고 늘어 졌으며, 술취한 그 사람 말고 다른 한 명도 철수에게 맞았습니다.
그 사람을 포함해 우리 과에 다섯 명의 남자들이 있었는데 철수 혼자를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잡고 있던 두명에 의해 나에게로 왔다가 잡고 있던게 풀리자 날 때린 그 사람에게 쫓아 가서 다시 날아차기 하는 철수를 보았습니다.
철수는 진짜 쌈을 잘했습니다.
기분 좋았지요.
근데 문제가 될 것도 같아요.
술에 취한 그 사람은 철수에게 계속 시비를 걸었고, 철수는 날아차기 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선 철수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나보고 누나,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버릇 없는 놈이라며 하나, 둘 날 때린 그 사람 편을 들기 시작했지요.
1대5였지요.
그래도 철수는 계속 날아차기 하려 했습니다.
다섯명이 험한 표정을 지으며 철수를 위협했지만 철수는 하나도 기가 죽지 않더군요.
진짜 큰 싸움 날 뻔 했어요.
그러자 여자 후배 중에 누가 신고를 했어요.
우리나라 경찰차 빨리 오더군요.
경찰차 두대에 나를 포함해 철수, 그리고 우리 동기 남자들 다섯명 모두가 파출소로 끌려 갔더랬습니다.
"이 새끼가 날 다짜고짜 팼어요."
날 때린 녀석은 분함을 표시하며 큰 소리로 떠들었지만 철수는 조용하더군요.
다른 말은 안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계속 그 말만 했습니다.
"얘는 나 때문에 그랬어요. 저 사람이 술 먹고 날 때렸단 말이에요."
제가 대신 변명을 해 주었지요.
동기들에게도 사실을 말하도록 잘 타일렀습니다.
옥신 각신하며 동기들끼리 의견이 나누어져 쟤가 잘했니, 철수가 잘했니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조서는 꾸미지 않더군요.
그냥 훈방 조취 되었지만 철수는 한 동안 고개를 들지 않고 계속 죄송하다는 말만 내 뱉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철수는 별 다른 취조를 당하지 않았어요.
날 때린 그 남자만 계속 깡을 부리다 출석부 같은 걸로 두들겨 맞고 야단도 맞았지요.
한 때 저 남자에게 호감을 가졌던 게 다 원망스럽습니다.
근데 철수는 왜 그 난리를 부렸던 것일까요?
내가 한 대 맞았던게 기분이 나빴을까요.
자기가 한 대 맞은 게 기분이 나빴을까요.
오늘 집에 가긴 걸렀습니다.
11시가 넘어 파출소로 끌려 갔었는데, 지금은 새벽 한시가 다 되었습니다.
"야, 너 왜 그랬어?"
"저 새끼들 91학번이에요?"
"응."
"큰일났네. 우리 과 선배들에게 알리면 안되는데... 그리고 말입니다. 파출소 끌려 갔을 때는 고개를 숙이고 무조건 잘못했다고 비는게 가장 빨리 풀려나는 지름길이거든요. 웬만하면 다 훈방 조취인데, 변명할 거 없어요. 죄를 뒤집어 쓰지 않을 정도의 경범죄는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는 게 최고에요. 경험으로 배운
겁니다. 누나도 앞으로 파출소 끌려 가면 그러세요."
"뭐야? 나 오늘 너 아니었으면 파출소 가지 않았어. 앞으로 갈 일 없단 말이다."
"누가 알아요 그걸. 그리고 누나 왜 그래요? 또 그 버릇 나온거야?"
"뭘? 남자 차는 거? 모르겠다. 조금 서글프네."
"오늘 누나 때문에 3년만에 파출소 구경했네. 집에 연락하면 어쩌나 졸라 떨었잖아요."
"내가 맞은게 기분 나빴던 거니? 아니면 니가 맞아서 열 받은거니?"
"저 새끼가 내 머리 때렸을 때 졸라 아팠거든요. 누나 뺨은 더 세게 맞았다면서요. 누나가 때릴 데가 어딨다고..."
"후후, 그 말 믿어도 돼?"
"그럼요."
"오늘 나 잘데 없는데?"
"오늘만 내 방에서 재워 준다."
"열쇠 줘. 나 먼저 몰래 들어가 있을 테니까, 넌 숙취제거제 하고 치솔하고, 뭐 내게 필요한 거 있으면 다 사가지고 와."
"돈을 줘야죠."
"그래. 만화책도 빌려 올래?"
"만화방이 지금까지 열었을래나?"
"후후, 한 번 가 봐. 그리고 너 진짜 쌈 잘하나 봐?"
"정의를 위해서만 사용하지요."
"푸후!"
나는 철수의 방에서 네 번째 밤을 맞이 했습니다.
모르겠어요 아직은. 연하가 뭐 어때?
이런 감정이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철수는 내 잠옷을 따로 한 서랍에다 넣어 두었습니다.
자기 서랍에는 꾸깃 꾸깃 여러 옷들을 겹쳐 넣어 놓았으면서 내 잠옷은 넓은 서랍의 공간에 홀로 넣어
두었더군요.
녀석이 오기 전에 옷을 갈아 입고 세수를 했지요.
그리고 녀석의 침대위에 앉아 있었습니다.
거울에 얼굴을 보니 말이 아니네요.
핏줄이 튀겼어요.
그 자식 내가 다시 보면 인간이 아니다.
철수가 열받을 만도 했겠어요.
호호. 철수 때문에 뺨을 맞았던 기분 나쁜 감정을 지울 수 있었습니다.
내 곁에 있는 호랑이가 자세히 보니 철수를 닮았네요.
이런 인형을 왜 사다 놓았을까?
한 마리 사줘야 겠군요.
내가 방에 들어 온지 30분이 훨씬 더 지났는데도 녀석은 들어 오지 않았습니다.
푸우.
"누나, 만화방 열었어요. 누나? 드래곤 볼 다 안봤죠? 38권까지 나왔더라구요. 이거 다시 봐도 잼있어요."
녀석은 드래곤 볼만 20권 가까이 빌려 왔더군요.
저것 때문에 늦었군요.
한 쪽엔 만화책을 잔뜩 들고, 다른 한 쪽엔 먹을 것과 칫솔 하나가 든 비닐 봉지가 들렸군요.
연하는 저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