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척 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보통 사람들은 거짓말을 할 때 표정이 변한다.
나도 보통사람이다.
아닌척 하려니 내 행동 자체가 어색하다.
방학이 끝이 나면 은정이 누나를 하루에 한 번씩은 보게 될 것이다.
누나의 보금자리는 내 바로 곁에 있다.
내 어색한 모습을 금방 들켜 버릴 것 같다.
누나가 한국으로 돌아 온 다음 날 누나를 다시 만났다.
내 마음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미소 짓는 누나가 연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스트리아 잘츠카메르부트 남부 지방에는 할슈타르 호수가 있어. 그 호수 바로 가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동화 속에 나오는 풍경 같았어. 안개 낀 아침에 멀리서 보면 마을이 꼭 호수 위에 떠 있는 것 처럼 보였거든?"
"가 봤다고 자랑하는 거에요?"
"응."
"나도 꼭 외국을 나가 봐야지."
누나는 내 말에 별 신경을 쓰지 않네요.
머리 속에 무언가 그리고 있는지 턱을 고은 채 자기의 이야기만 하고 있다.
"호수 속에 나무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지어 논 작은 호텔에서 이틀을 지냈어. 밤이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너무 낭만적이었거든. 참, 사진 나오면 그 곳 풍경을 보여줄게. 언제 한 번 같이 갈래?"
"사진 찾으러 가는 거 말입니까? 같이 가 주죠 뭐."
"흠, 거기 말고, 할슈타르 호숫 가 그 마을에 언제 한 번 같이 가자."
"오스트리아가 어디 마음만 먹으면 그냥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인 줄 아나 보죠?"
"멀지. 시간이 흐른 뒤 기회가 되면 같이 가자는 소리야. 근데 말이야? 다시 찾을 기회가 있다면 하필 너와 함께였으면 하고 생각했을까?"
그런 말하면 내가 더 빠져든다 말입니다.
"부려 먹을려고 생각했나 보지요."
"그 이유 때문일까?"
"그 이유 때문일거에요."
그래 어디라도 좋으니 누나와 단 둘이 여행을 가고 싶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빨리 변하는 구나.
그냥 누나라고만 생각했는데, 불과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감히 누나를 사랑한다고 단정까지 짓게 생겼다.
내가 누나에게 남자로서 다가가면 누나가 날 어색해 하겠지?
누나가 남자를 오래 사귀지 못한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말은 내 뱉기 쉽다.
내가 누나를 거의 모르던 작년 봄, 나는 누나에게 책임지지 못할 말들을 생각나는대로 내 뱉은 거 같다.
사람을 사귀는 데 있어 많은 생각을 하지 말라고?
어떻게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생각을 많이 해서 누나 곁에 오래 존재해야 겠다.
이틀 뒤에 누나가 찍어 온 사진들을 보았다.
누나는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를 여행 다녔다고 했다.
이국적인 풍경 속에 누나의 모습은 멋있었다.
"누구 같이 다닌 사람 있어요?"
"아니, 나 혼자 다녔어."
"어깨 동무하고 있는 이 새끼는 누구야?"
"너 또? 이 새끼가 뭐니? 베낭 여행 온 한국 사람들 자주 만났어."
"혼자서 사진을 참 많이도 찍었네요."
"응. 예쁘지?"
"예쁘긴 한데..."
"뭐?"
"마음까지 예쁠까요?"
여름 방학 동안 난 어디 놀러 간 곳이 없다.
여름도 끝이 나고 있다.
이 무슨 처량한 신세더냐.
누구는 바다다, 계곡이다 잘도 놀러를 가는데, 나는 수영장도 한 번 못 가보고 방학을 끝마치게 생겼다.
수영장?
수영장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속옷만 입고 다닌다.
방수용 속옷. 크크, 누나 생각이 났다.
누나와는 같은 방에서 자 본적도 있지만 속옷이라고는 브라자 끈 한 번 본게 다다.
야외 수영장은 파장 분위기라서 별로 일 것이고 실내 수영장이라도 한 번 가 봐야지.
"누나 수영복 있어요?"
"그럼 수영복 없는 사람도 있니?"
나.
"날씨도 더운데 수영장이나 함 갑시다."
"날씨 별로 안 더워."
"수영장 가기 싫어요?"
"그래 가자. 정희도 데려가자. 얘가 심심하다고 주말에 놀러 오라고 했거든. 주말에 얘도 데리고 가자."
"정희 누나 애인은 어떡하구요?"
"그 사람하고 만날 약속이 되면 나더러 놀러 오라고 했겠니? 근데 어디 수영장 갈건데?"
"아파트 단지 내에 보면 수영장 많잖아요."
멀리 가지 않아도 되는데.
누나는 저기 무슨 체육관인가 거기가 좋다고 한다.
물이 깊어야 수영할 맛이 난다나?
나 수영 못한다.
십여초간 물에 떠 있는 것이 전부다.
허우적 거려 보지만 1미터도 나가지 못하고 꼬로록 가라 앉아 버린다.
그래서 나는 물과 별로 안친하다.
누나와 수영장 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순전히 속옷을 보기 위해서다.
나도 남자다.
수영복 하나와 수영모, 그리고 물안경 하나를 샀다.
방수용이라서 그런지 그냥 팬티 하고는 비교가 안되는 비싼 가격의 수영팬티다.
누나가 토요일날 날 데리러 왔었다.
저 엄마 차를 빌렸댄다.
은정이 누나는 정희 누나를 데리고 나에게로 왔다.
"정희 누나 오랜만이죠?"
"그래. 은정이 돌아 오고 나서는 전화도 한 통 없네?"
조수석 자리 정희 누나에게 뺏겼다.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누나 차를 타면 뒷좌석을 고집하던 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아쉽다.
"근데 수영장 갈 생각을 어떻게 했니? 너 누나들 수영복 입은 거 보려고 계획한거지?"
눈치 잘 채네.
운전이나 똑바로 해요.
수영장에는 8월이 끝이 나는 무렵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여자들은 탈의실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
다리만 담그고 누나들이 나올 때까지 수영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내 등뒤로 지나가는 아가씨들의 속옷 입은 모습도 쳐다 보며 앉아 있었다.
여자들의 속살이 하얗고 곱다.
물이 그런대로 따뜻하다.
놀고 있네 진짜.
어디가나 연인들 투성이다.
수영 가르쳐 준다면서 저 놈은 아까부터 지 여자친군지 모르겠지만 여자를 물에 띄워 놓고 잘록한 허리를 만지고 있다.
나도 누나에게 수영 가르쳐 준다 그래놓고 저래 볼까?
나 수영 못한다 참.
"으악!"
누가 갑자기 등 뒤에서 나를 밀었다.
그래서 준비 운동도 못한 채 물에 빠졌다.
심장 마비 걸렸을 수도 있다.
내 비명 소리를 듣고 수영하던 사람 몇 명이 나를 쳐다 보았다.
물에 빠진 생쥐 모양으로 뒤돌아 보았다.
쪼그려 앉아 나를 보며 생글생글 웃는 은정이 누나를 보았다.
팰 수도 없고 진짜.
"그렇다고 그렇게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니?"
누나가 일어섰다.
야, 저 여자 진짜 이쁘긴 이쁘다.
하얀 속살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등살이 파인 수영복 사이로 보였다.
브라자 끈이 없다?
흐흐.
진짜 파랑색 좋아하나 보다.
누나의 수영복은 푸른색에 가까운 파랑색이다.
정희 누나는 하얀색.
핑크색으로 메이커가 크게 적혀 있는 하얀색 수영복이다.
저들 좋아하는 색깔대로 수영복을 구비하고 있었구만.
정희 누나도 봐줄만 하다.
솔직히 많이 예쁜데, 은정이 누나 때문에 내 눈이 높아졌다.
수영 가르쳐 주는 것은 포기하고 누나에게 수영이나 배워야 겠다.
누나 둘이는 이 긴 풀장 끝에서 끝까지 장난치 듯 왔다 갔다 했다.
자유형으로 갔다가 배형으로 돌아 오기도 했다.
나는 몸은 물에 담그고 머리만 내 놓은 채 구경만 했다.
"넌 수영 안해?"
"하고 있잖아요."
손을 젓는 척 해 주었다.
수영 못한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다.
누나 둘이가 풀장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더니 휴식할 만한 곳을 찾아 나가더이다.
뭔가 모르는 야릇함과 알수 없는 충동과 가슴이 떨려 온다.
누나의 수영복 차림과 물에 젖은 살갗을 보니까 이상한 기분이 막 든다.
조용히 물에서 나와 누나가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갔다.
"음료수라도 좀 사와."
"어디 파는데? 돈은?"
"수영복 입고 있는데 돈이 어딨니?"
갖은 고생을 해서 콜라 세개를 사 가지고 왔다.
내가 탈의실에서 옷까지 갈아입고 가서 사온 성의를 몰라주고 누나들은 어디 한 곳에 시선이 가 있었다.
"저 남자 괜찮지 않니?"
정희 누나의 말에 은정이 누나도 배시시 웃으며 동의를 한다.
"어, 근육질이다. 차인표 닮았다 그지?"
"저기 다이빙대 근처의 안전요원 봐. 가슴에 털도 있다?"
"그래 저 남자 멋있다. 키가 180이 훨씬 넘겠는데? 수영을 해서 그런지 근육도 멋있고 가슴이 넓다."
여자들도 별수 없구나.
은정이 누나가 안전요원을 쳐다 보고 나서 나를 안됐다는 듯이 아래 위로 쳐다 본다.
그래 나 근육도 별로 없고, 가슴에 털이라고는 젖꼭지에 난 긴 털 하나 뿐이다.
키도 170대 중반밖에는 안된다.
그러는 댁은 잘났수?
좀 잘났군.
"어! 저 여자 좀 봐요. 글래머네요. 나올 땐 나오고 들어갈 땐 들어가고. 가슴이 볼록한게 섹쉬해요. 누나들 작은 가슴하고는 비교가 안돼네요. 빈약원, 빈약투."
은정이 누나와 정희 누나에게 손가락질 했다가 사람들 쳐다 보는데서 은정이 누나에게 세대, 정희 누나에게 두대를 맞았다.
같이 가슴 얘기 했는데 왜 나만 맞아야 하는 걸까.
하긴 여자들은 가슴을 가리고 다니지.
그것도 일종의 관습인데...
여자가 가슴을 가린 이유는 활동하는데 불편하기 때문에서이지 결코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고정시키기 위해 가려졌고, 그것이 시간이 흐르고 모두들 가리고 다니니까 당연 가려야 되는 것으로 고정 관념화 된 것이다.
근데 여자가 남자들 가슴 얘기하는 것은 괜찮고, 남자가 여자 가슴 얘기하는 것은 잘못하면 성희롱으로 걸린다.
우쒸.
"나 내년 봄에는 관둘까봐."
"병원 말이야?"
"응. 개인적인 시간을 갖기가 힘들어. 철규씨랑 시간 맞추기도 힘들고. 초년생이라고 당직 서는 날이 너무 많아."
"나도 병원에 취직할까 생각했는데."
"너네 아빠 약국에 약사가 몇 명이야?"
"다섯 명."
"넌 약국에서 근무해라. 병원은 힘들어. 나도 약국이나 알아 봐야지."
"약국 한 번 알아 봐 줄까? 참, 지은이 언니가 약국 차릴거라며?"
"계획만 세우고 있어. 조금 크게 시작하고 싶나 봐. 언니가 일산에 있잖아. 자기 아파트 단지 내에 약국이 없대. 나더러 동업하자고 자꾸 꼬셔. 3000만원 정도만 투자하면 그 이자하고 월급은 따로 계산해 준다고 하는데. 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해. 하지만 안정적이지 못해 망설여 지기도 해."
"차라리 네 스스로 약국을 차려?"
"나 돈 없어. 그리고 사업 수완도 없고."
"울 학교 근처도 약국이 적잖아. 한 번 생각해 봐. 학교 근처는 아무래도 도심보다 점포세가 약할 거 아냐."
"모르겠다."
둘이서만 이야기 하네요.
섧다.
계속 얘기해라.
아까부터 나는 저기 다이빙 하는 곳에 시선이 가 있었다.
스프링 보드에서 모두들 장난처럼 뛰어 내렸다.
대부분 다리부터 떨어지는 어정쩡한 모습이다 그게 그렇게 무섭나?
내가 멋있게 다이빙 한 번 해 주지.
내가 슬 일어서자 이야기하던 은정이 누나가 한 번 쳐다 봐 준다.
하하, 의연하게 침묵한 모습으로 다이빙대 있는 곳으로 갔다.
줄을 서 기다리다가 내 차례가 되어 다이빙 위에 올라 섰다.
생각보다 높다.
저기 보니까 누나가 이쪽을 보고 있다.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자!
머리부터 들어간다.
"풍덩!"
잘 들어 갔다.
계속 들어 간다.
뭐야 이거!
한 없이 들어 간다.
나는 잠시 착각했었다.
저기 아까 수영하던 풀장과 같은 수심일 것이라고...
머리부터 다이빙을 했더니 더 깊이 들어 가 버린 것 같다.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허우적 거렸다.
그렇지만 맘대로 몸이 물에 뜨지 않았다.
왜 아무도 안 도와 주는거야.
겨우 발버둥 쳐 수심위로 머리를 내 밀었으나 그냥 또 가라 앉고 만다.
나는 10여초 이상 물에 떠 있지 못한다.
발버둥 치면 사람들이 구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렇게 허우적 거리지도 못했다.
물 속에서 허우적 거려봤자 밖에서는 고요하게 보일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오래 나오지 않으면 구해 주어야 되는것 아닌가.
마신 물 때문에 숨이 가픈지도 모르고 나는 목숨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으!"
한 번 더 머리를 수면위로 내 뱉고 한 웅큼 소리를 내 뱉고 또 빠져 들어갔다.
이젠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풍덩!"
푸른 수영복이다.
내 목을 감고 위로 올라 가는 사람은 참 낯이 익은 사람이다.
허우적 거림을 멈추고 내 목을 감은 사람을 따라 그냥 수심위로 올라 갔다.
물을 많이 먹었지만 인공호흡 받을 정도 까진 아니다.
그냥 힘없이 끌려 나와 바닥에 누웠다.
"수영도 못하면서 다이빙을 했나 봐."
쪽팔렸다.
"괜찮아?"
훗, 은정이 누나다.
제법 걱정하는 얼굴 표정이다.
옆에는 아주 근육질의 수영안전 요원도 있었다.
그 놈이 날 야단쳤다.
내가 눈을 뜨고 무사한 걸 보니까 안심이 되는지 야단을 막 쳤다.
"아니, 수영도 못하면서 다이빙 하러 왔단 말입니까. 뭐에요? 이 곳 수심이 9미터인거 몰라요? 사고 나면 전부 제 책임이란 말입니다."
새끼가 덩치 믿고 날 구박한다.
내가 수심이 9미터인지 9센티인지 어떻게 알아.
경고 문구하나 달아 놓지도 않았으면서.
수영도 못하면서 잘난 척하러 다이빙하면 죽음이야.
이런 문구를 달아 놓았어야지.
에구 힘없다.
"이봐요. 안전요원이라는 사람이, 사람이 빠졌는데 뭐 한거에요? 얘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 했어요? 모르고 들어 갈 수도 있는 거지 되려 야단을 쳐요?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는 거에요?"
아까 멋있다 할 때는 언제고 그렇게 화를 내면 안돼지.
내가 잘못해 빠진건데...
"내가 눈이 여러개 달린 것도 아니고 못 볼수도 있죠. 수영 못하는 사람이 다이빙하러 온게 그럼 잘한거야?"
"뭐야? 안전요원이 왜 있는데? 저 풀장 근처를 잘못 거닐다 빠져 허우적 거려도, 모른척 할거야? 아니면 구해놓고 수영 못하는 사람이 여길 들어와? 그러며 야단 칠거야? 제 직분을 다하지 못했으면 정중하게 사과를 해야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나도 달려 왔어요. 그 아가씨가 먼저 왔다고 너무 재는 거 아냐? 충분히 이 사람할 구할 시간안에 나도 왔었다구요. 에이씨."
내가 빠졌을 때 날 구해준 사람은 은정이 누나였다.
짧은 찰나 내가 물 밖으로 나왔을 때 날 보고 달려 온 것은 은정이 누나였다.
안전요원보다 먼저 달려와 날 구해 놓고는 안전 요원과 싸우고 있었다.
참아라 잘못하면 맞을 수도 있다.
나 물 먹어서 지금 속이 느끼하거든요.
허우적 거려서 힘도 없어요.
저 녀석하고 싸우면 이길 자신이 없는데, 뭘 믿고 저렇게 대드냐?
누나가 안전요원에게 분풀이 하고선 날 봤다.
시선이 사랑스럽다.
주위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쪽팔렸지만 누나의 시선 때문에 그걸 느끼지 못했다.
"놀랬지?"
"내가 그래도 2-3미터는 나가거든요.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였어요."
"그래, 이만하길 다행이다. 일어 설 수 있겠어?"
"그럼요."
다리가 후들거리고 옆에서 보는 사람들 때문에 쪽팔렸지만 누나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누나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
물론 누나가 아니었더라도 안전요원에게 구조가 되었을테지만 날 구하기 위해 뛰어와 준 누나가 너무 고맙다.
내 마음이 한 걸음 더 가버렸다.
아까 안전 요원에게 따지던 누나의 모습은 진짜 화가 난 것이었다.
동생으로만 생각해도 괜찮다.
누나가 날 위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정희 누나가 나와 은정이 누나를 쳐다 보았다.
"후훗! 대충 내 예상이 맞을 거 같애."
"뭐가?"
"나중에 가 보면 알겠지. 철수는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고 있지?"
"다 까먹었어요."
혹시나 내가 은정이 누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말할 까봐 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수영 배우기 전에 다시 수영장을 오진 말아야 겠다.
"아까 저 사람 다이빙 풀에서 빠져 죽을 뻔 한 사람이지?"
"응, 저 여자가 애인인가봐. 자기 애인 죽을 뻔 했다고 사납게 굴던데?"
"남자가 수영도 못하고 쯔쯧, 여자가 아깝다."
나는 뛰어난 청각으로 인해 사람들이 궁시렁 거리는 소리를 여럿 들었다.
여자가 아깝다?
치명적이다.
보통 사람들은 거짓말을 할 때 표정이 변한다.
나도 보통사람이다.
아닌척 하려니 내 행동 자체가 어색하다.
방학이 끝이 나면 은정이 누나를 하루에 한 번씩은 보게 될 것이다.
누나의 보금자리는 내 바로 곁에 있다.
내 어색한 모습을 금방 들켜 버릴 것 같다.
누나가 한국으로 돌아 온 다음 날 누나를 다시 만났다.
내 마음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것일까?
미소 짓는 누나가 연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스트리아 잘츠카메르부트 남부 지방에는 할슈타르 호수가 있어. 그 호수 바로 가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동화 속에 나오는 풍경 같았어. 안개 낀 아침에 멀리서 보면 마을이 꼭 호수 위에 떠 있는 것 처럼 보였거든?"
"가 봤다고 자랑하는 거에요?"
"응."
"나도 꼭 외국을 나가 봐야지."
누나는 내 말에 별 신경을 쓰지 않네요.
머리 속에 무언가 그리고 있는지 턱을 고은 채 자기의 이야기만 하고 있다.
"호수 속에 나무 기둥을 박고 그 위에 지어 논 작은 호텔에서 이틀을 지냈어. 밤이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너무 낭만적이었거든. 참, 사진 나오면 그 곳 풍경을 보여줄게. 언제 한 번 같이 갈래?"
"사진 찾으러 가는 거 말입니까? 같이 가 주죠 뭐."
"흠, 거기 말고, 할슈타르 호숫 가 그 마을에 언제 한 번 같이 가자."
"오스트리아가 어디 마음만 먹으면 그냥 갈 수 있는 가까운 곳인 줄 아나 보죠?"
"멀지. 시간이 흐른 뒤 기회가 되면 같이 가자는 소리야. 근데 말이야? 다시 찾을 기회가 있다면 하필 너와 함께였으면 하고 생각했을까?"
그런 말하면 내가 더 빠져든다 말입니다.
"부려 먹을려고 생각했나 보지요."
"그 이유 때문일까?"
"그 이유 때문일거에요."
그래 어디라도 좋으니 누나와 단 둘이 여행을 가고 싶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은 빨리 변하는 구나.
그냥 누나라고만 생각했는데, 불과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나는 감히 누나를 사랑한다고 단정까지 짓게 생겼다.
내가 누나에게 남자로서 다가가면 누나가 날 어색해 하겠지?
누나가 남자를 오래 사귀지 못한 이유를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
말은 내 뱉기 쉽다.
내가 누나를 거의 모르던 작년 봄, 나는 누나에게 책임지지 못할 말들을 생각나는대로 내 뱉은 거 같다.
사람을 사귀는 데 있어 많은 생각을 하지 말라고?
어떻게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생각을 많이 해서 누나 곁에 오래 존재해야 겠다.
이틀 뒤에 누나가 찍어 온 사진들을 보았다.
누나는 스위스와 오스트리아를 여행 다녔다고 했다.
이국적인 풍경 속에 누나의 모습은 멋있었다.
"누구 같이 다닌 사람 있어요?"
"아니, 나 혼자 다녔어."
"어깨 동무하고 있는 이 새끼는 누구야?"
"너 또? 이 새끼가 뭐니? 베낭 여행 온 한국 사람들 자주 만났어."
"혼자서 사진을 참 많이도 찍었네요."
"응. 예쁘지?"
"예쁘긴 한데..."
"뭐?"
"마음까지 예쁠까요?"
여름 방학 동안 난 어디 놀러 간 곳이 없다.
여름도 끝이 나고 있다.
이 무슨 처량한 신세더냐.
누구는 바다다, 계곡이다 잘도 놀러를 가는데, 나는 수영장도 한 번 못 가보고 방학을 끝마치게 생겼다.
수영장?
수영장에는 사람들이 대부분 속옷만 입고 다닌다.
방수용 속옷. 크크, 누나 생각이 났다.
누나와는 같은 방에서 자 본적도 있지만 속옷이라고는 브라자 끈 한 번 본게 다다.
야외 수영장은 파장 분위기라서 별로 일 것이고 실내 수영장이라도 한 번 가 봐야지.
"누나 수영복 있어요?"
"그럼 수영복 없는 사람도 있니?"
나.
"날씨도 더운데 수영장이나 함 갑시다."
"날씨 별로 안 더워."
"수영장 가기 싫어요?"
"그래 가자. 정희도 데려가자. 얘가 심심하다고 주말에 놀러 오라고 했거든. 주말에 얘도 데리고 가자."
"정희 누나 애인은 어떡하구요?"
"그 사람하고 만날 약속이 되면 나더러 놀러 오라고 했겠니? 근데 어디 수영장 갈건데?"
"아파트 단지 내에 보면 수영장 많잖아요."
멀리 가지 않아도 되는데.
누나는 저기 무슨 체육관인가 거기가 좋다고 한다.
물이 깊어야 수영할 맛이 난다나?
나 수영 못한다.
십여초간 물에 떠 있는 것이 전부다.
허우적 거려 보지만 1미터도 나가지 못하고 꼬로록 가라 앉아 버린다.
그래서 나는 물과 별로 안친하다.
누나와 수영장 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순전히 속옷을 보기 위해서다.
나도 남자다.
수영복 하나와 수영모, 그리고 물안경 하나를 샀다.
방수용이라서 그런지 그냥 팬티 하고는 비교가 안되는 비싼 가격의 수영팬티다.
누나가 토요일날 날 데리러 왔었다.
저 엄마 차를 빌렸댄다.
은정이 누나는 정희 누나를 데리고 나에게로 왔다.
"정희 누나 오랜만이죠?"
"그래. 은정이 돌아 오고 나서는 전화도 한 통 없네?"
조수석 자리 정희 누나에게 뺏겼다.
작년 여름까지만 해도 누나 차를 타면 뒷좌석을 고집하던 나였다.
그런데 오늘은 아쉽다.
"근데 수영장 갈 생각을 어떻게 했니? 너 누나들 수영복 입은 거 보려고 계획한거지?"
눈치 잘 채네.
운전이나 똑바로 해요.
수영장에는 8월이 끝이 나는 무렵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여자들은 탈의실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다.
다리만 담그고 누나들이 나올 때까지 수영하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내 등뒤로 지나가는 아가씨들의 속옷 입은 모습도 쳐다 보며 앉아 있었다.
여자들의 속살이 하얗고 곱다.
물이 그런대로 따뜻하다.
놀고 있네 진짜.
어디가나 연인들 투성이다.
수영 가르쳐 준다면서 저 놈은 아까부터 지 여자친군지 모르겠지만 여자를 물에 띄워 놓고 잘록한 허리를 만지고 있다.
나도 누나에게 수영 가르쳐 준다 그래놓고 저래 볼까?
나 수영 못한다 참.
"으악!"
누가 갑자기 등 뒤에서 나를 밀었다.
그래서 준비 운동도 못한 채 물에 빠졌다.
심장 마비 걸렸을 수도 있다.
내 비명 소리를 듣고 수영하던 사람 몇 명이 나를 쳐다 보았다.
물에 빠진 생쥐 모양으로 뒤돌아 보았다.
쪼그려 앉아 나를 보며 생글생글 웃는 은정이 누나를 보았다.
팰 수도 없고 진짜.
"그렇다고 그렇게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니?"
누나가 일어섰다.
야, 저 여자 진짜 이쁘긴 이쁘다.
하얀 속살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등살이 파인 수영복 사이로 보였다.
브라자 끈이 없다?
흐흐.
진짜 파랑색 좋아하나 보다.
누나의 수영복은 푸른색에 가까운 파랑색이다.
정희 누나는 하얀색.
핑크색으로 메이커가 크게 적혀 있는 하얀색 수영복이다.
저들 좋아하는 색깔대로 수영복을 구비하고 있었구만.
정희 누나도 봐줄만 하다.
솔직히 많이 예쁜데, 은정이 누나 때문에 내 눈이 높아졌다.
수영 가르쳐 주는 것은 포기하고 누나에게 수영이나 배워야 겠다.
누나 둘이는 이 긴 풀장 끝에서 끝까지 장난치 듯 왔다 갔다 했다.
자유형으로 갔다가 배형으로 돌아 오기도 했다.
나는 몸은 물에 담그고 머리만 내 놓은 채 구경만 했다.
"넌 수영 안해?"
"하고 있잖아요."
손을 젓는 척 해 주었다.
수영 못한다는 말은 차마 못하겠다.
누나 둘이가 풀장을 몇 번 왔다 갔다 하더니 휴식할 만한 곳을 찾아 나가더이다.
뭔가 모르는 야릇함과 알수 없는 충동과 가슴이 떨려 온다.
누나의 수영복 차림과 물에 젖은 살갗을 보니까 이상한 기분이 막 든다.
조용히 물에서 나와 누나가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갔다.
"음료수라도 좀 사와."
"어디 파는데? 돈은?"
"수영복 입고 있는데 돈이 어딨니?"
갖은 고생을 해서 콜라 세개를 사 가지고 왔다.
내가 탈의실에서 옷까지 갈아입고 가서 사온 성의를 몰라주고 누나들은 어디 한 곳에 시선이 가 있었다.
"저 남자 괜찮지 않니?"
정희 누나의 말에 은정이 누나도 배시시 웃으며 동의를 한다.
"어, 근육질이다. 차인표 닮았다 그지?"
"저기 다이빙대 근처의 안전요원 봐. 가슴에 털도 있다?"
"그래 저 남자 멋있다. 키가 180이 훨씬 넘겠는데? 수영을 해서 그런지 근육도 멋있고 가슴이 넓다."
여자들도 별수 없구나.
은정이 누나가 안전요원을 쳐다 보고 나서 나를 안됐다는 듯이 아래 위로 쳐다 본다.
그래 나 근육도 별로 없고, 가슴에 털이라고는 젖꼭지에 난 긴 털 하나 뿐이다.
키도 170대 중반밖에는 안된다.
그러는 댁은 잘났수?
좀 잘났군.
"어! 저 여자 좀 봐요. 글래머네요. 나올 땐 나오고 들어갈 땐 들어가고. 가슴이 볼록한게 섹쉬해요. 누나들 작은 가슴하고는 비교가 안돼네요. 빈약원, 빈약투."
은정이 누나와 정희 누나에게 손가락질 했다가 사람들 쳐다 보는데서 은정이 누나에게 세대, 정희 누나에게 두대를 맞았다.
같이 가슴 얘기 했는데 왜 나만 맞아야 하는 걸까.
하긴 여자들은 가슴을 가리고 다니지.
그것도 일종의 관습인데...
여자가 가슴을 가린 이유는 활동하는데 불편하기 때문에서이지 결코 부끄러워서가 아니었다.
고정시키기 위해 가려졌고, 그것이 시간이 흐르고 모두들 가리고 다니니까 당연 가려야 되는 것으로 고정 관념화 된 것이다.
근데 여자가 남자들 가슴 얘기하는 것은 괜찮고, 남자가 여자 가슴 얘기하는 것은 잘못하면 성희롱으로 걸린다.
우쒸.
"나 내년 봄에는 관둘까봐."
"병원 말이야?"
"응. 개인적인 시간을 갖기가 힘들어. 철규씨랑 시간 맞추기도 힘들고. 초년생이라고 당직 서는 날이 너무 많아."
"나도 병원에 취직할까 생각했는데."
"너네 아빠 약국에 약사가 몇 명이야?"
"다섯 명."
"넌 약국에서 근무해라. 병원은 힘들어. 나도 약국이나 알아 봐야지."
"약국 한 번 알아 봐 줄까? 참, 지은이 언니가 약국 차릴거라며?"
"계획만 세우고 있어. 조금 크게 시작하고 싶나 봐. 언니가 일산에 있잖아. 자기 아파트 단지 내에 약국이 없대. 나더러 동업하자고 자꾸 꼬셔. 3000만원 정도만 투자하면 그 이자하고 월급은 따로 계산해 준다고 하는데. 해 볼까 하는 생각도 들긴 해. 하지만 안정적이지 못해 망설여 지기도 해."
"차라리 네 스스로 약국을 차려?"
"나 돈 없어. 그리고 사업 수완도 없고."
"울 학교 근처도 약국이 적잖아. 한 번 생각해 봐. 학교 근처는 아무래도 도심보다 점포세가 약할 거 아냐."
"모르겠다."
둘이서만 이야기 하네요.
섧다.
계속 얘기해라.
아까부터 나는 저기 다이빙 하는 곳에 시선이 가 있었다.
스프링 보드에서 모두들 장난처럼 뛰어 내렸다.
대부분 다리부터 떨어지는 어정쩡한 모습이다 그게 그렇게 무섭나?
내가 멋있게 다이빙 한 번 해 주지.
내가 슬 일어서자 이야기하던 은정이 누나가 한 번 쳐다 봐 준다.
하하, 의연하게 침묵한 모습으로 다이빙대 있는 곳으로 갔다.
줄을 서 기다리다가 내 차례가 되어 다이빙 위에 올라 섰다.
생각보다 높다.
저기 보니까 누나가 이쪽을 보고 있다.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자!
머리부터 들어간다.
"풍덩!"
잘 들어 갔다.
계속 들어 간다.
뭐야 이거!
한 없이 들어 간다.
나는 잠시 착각했었다.
저기 아까 수영하던 풀장과 같은 수심일 것이라고...
머리부터 다이빙을 했더니 더 깊이 들어 가 버린 것 같다.
순간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허우적 거렸다.
그렇지만 맘대로 몸이 물에 뜨지 않았다.
왜 아무도 안 도와 주는거야.
겨우 발버둥 쳐 수심위로 머리를 내 밀었으나 그냥 또 가라 앉고 만다.
나는 10여초 이상 물에 떠 있지 못한다.
발버둥 치면 사람들이 구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렇게 허우적 거리지도 못했다.
물 속에서 허우적 거려봤자 밖에서는 고요하게 보일 뿐이다.
그래도 이렇게 오래 나오지 않으면 구해 주어야 되는것 아닌가.
마신 물 때문에 숨이 가픈지도 모르고 나는 목숨에 위협을 받고 있었다.
"으!"
한 번 더 머리를 수면위로 내 뱉고 한 웅큼 소리를 내 뱉고 또 빠져 들어갔다.
이젠 정신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풍덩!"
푸른 수영복이다.
내 목을 감고 위로 올라 가는 사람은 참 낯이 익은 사람이다.
허우적 거림을 멈추고 내 목을 감은 사람을 따라 그냥 수심위로 올라 갔다.
물을 많이 먹었지만 인공호흡 받을 정도 까진 아니다.
그냥 힘없이 끌려 나와 바닥에 누웠다.
"수영도 못하면서 다이빙을 했나 봐."
쪽팔렸다.
"괜찮아?"
훗, 은정이 누나다.
제법 걱정하는 얼굴 표정이다.
옆에는 아주 근육질의 수영안전 요원도 있었다.
그 놈이 날 야단쳤다.
내가 눈을 뜨고 무사한 걸 보니까 안심이 되는지 야단을 막 쳤다.
"아니, 수영도 못하면서 다이빙 하러 왔단 말입니까. 뭐에요? 이 곳 수심이 9미터인거 몰라요? 사고 나면 전부 제 책임이란 말입니다."
새끼가 덩치 믿고 날 구박한다.
내가 수심이 9미터인지 9센티인지 어떻게 알아.
경고 문구하나 달아 놓지도 않았으면서.
수영도 못하면서 잘난 척하러 다이빙하면 죽음이야.
이런 문구를 달아 놓았어야지.
에구 힘없다.
"이봐요. 안전요원이라는 사람이, 사람이 빠졌는데 뭐 한거에요? 얘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 했어요? 모르고 들어 갈 수도 있는 거지 되려 야단을 쳐요? 도대체 정신을 어디다 팔고 있는 거에요?"
아까 멋있다 할 때는 언제고 그렇게 화를 내면 안돼지.
내가 잘못해 빠진건데...
"내가 눈이 여러개 달린 것도 아니고 못 볼수도 있죠. 수영 못하는 사람이 다이빙하러 온게 그럼 잘한거야?"
"뭐야? 안전요원이 왜 있는데? 저 풀장 근처를 잘못 거닐다 빠져 허우적 거려도, 모른척 할거야? 아니면 구해놓고 수영 못하는 사람이 여길 들어와? 그러며 야단 칠거야? 제 직분을 다하지 못했으면 정중하게 사과를 해야지.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나도 달려 왔어요. 그 아가씨가 먼저 왔다고 너무 재는 거 아냐? 충분히 이 사람할 구할 시간안에 나도 왔었다구요. 에이씨."
내가 빠졌을 때 날 구해준 사람은 은정이 누나였다.
짧은 찰나 내가 물 밖으로 나왔을 때 날 보고 달려 온 것은 은정이 누나였다.
안전요원보다 먼저 달려와 날 구해 놓고는 안전 요원과 싸우고 있었다.
참아라 잘못하면 맞을 수도 있다.
나 물 먹어서 지금 속이 느끼하거든요.
허우적 거려서 힘도 없어요.
저 녀석하고 싸우면 이길 자신이 없는데, 뭘 믿고 저렇게 대드냐?
누나가 안전요원에게 분풀이 하고선 날 봤다.
시선이 사랑스럽다.
주위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쪽팔렸지만 누나의 시선 때문에 그걸 느끼지 못했다.
"놀랬지?"
"내가 그래도 2-3미터는 나가거든요. 오늘은 컨디션이 별로였어요."
"그래, 이만하길 다행이다. 일어 설 수 있겠어?"
"그럼요."
다리가 후들거리고 옆에서 보는 사람들 때문에 쪽팔렸지만 누나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누나는 내 생명의 은인이다.
물론 누나가 아니었더라도 안전요원에게 구조가 되었을테지만 날 구하기 위해 뛰어와 준 누나가 너무 고맙다.
내 마음이 한 걸음 더 가버렸다.
아까 안전 요원에게 따지던 누나의 모습은 진짜 화가 난 것이었다.
동생으로만 생각해도 괜찮다.
누나가 날 위하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알았다.
정희 누나가 나와 은정이 누나를 쳐다 보았다.
"후훗! 대충 내 예상이 맞을 거 같애."
"뭐가?"
"나중에 가 보면 알겠지. 철수는 내가 예전에 했던 말 기억하고 있지?"
"다 까먹었어요."
혹시나 내가 은정이 누나에게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말할 까봐 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수영 배우기 전에 다시 수영장을 오진 말아야 겠다.
"아까 저 사람 다이빙 풀에서 빠져 죽을 뻔 한 사람이지?"
"응, 저 여자가 애인인가봐. 자기 애인 죽을 뻔 했다고 사납게 굴던데?"
"남자가 수영도 못하고 쯔쯧, 여자가 아깝다."
나는 뛰어난 청각으로 인해 사람들이 궁시렁 거리는 소리를 여럿 들었다.
여자가 아깝다?
치명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