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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이세상

담아온 글들

연하가......
2005.03.07 22:08

[이현철] 연하가 어때서(26회)

조회 수 485 추천 수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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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대학생 신분의 마지막 학기가 시작 된 지도 벌써 5일이 지났습니다.
자취방의 팽팽 돌아 가는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집에 돌아 갈 준비를 합니다.
오늘은 개강한 첫 주라 동아리와 학과들 모두 개강 파티를 한다고 떠들썩 할 겁니다.
우리 동아리도 오늘 모임이 있지요.
그렇지만 나는 집에 가렵니다.

철수는 개강한 첫 주엔 꼭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지요.
녀석은 내 곁에 오래 머물러 줄 것 같습니다.
그래서 며칠 보지 못했지만 그러려니 하겠습니다.

퇴근 시간을 피해 저녁 8시경에 전철을 탔습니다.
그 시간에 집으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많네요.
자리 하나를 잡고 오랜만에 다이어리에 몇 자 끄적여 봤습니다.
맞은 편에 신입생으로 보이는 두 남학생에게 누나 행세를 하는 여학생 하나가 눈에 들어 옵니다.
귀엽네요.
내 눈에는 다 같은 또래의 친구로 보이는데 저 여학생 말 머리에는 꼭 누나가 뭐 어쩌고, 누나가 잘해 줄게, 그래 누나가, 그 말을 꼭 붙이네요.
훗!
나도 철수에게 저러나요?
그래도 철수는 나보다 많이 어려 보일거에요.
내가 맞은편 여학생처럼 어린 나이도 아니고 말이죠.

수영장 갔던 일이 생각이 나네요.
미소를 지어 봅니다.
수영장에서 잠시 불안한 미소를 맺었던 적이 있습니다.
스프링 보드에서 다이빙 풀로 제법 멋있게 뛰어 내리고는 철수가 허우적 거렸지요.
나는 철수가 장난치는 줄 알았습니다.
철수의 허우적 거림을 보고 나는 웃었어요.
그것이 철수가 물 속으로 영영 사라질수도 있었던 위급한 상황이었음을 모른 채 그냥 웃었습니다.

"은정아, 쟤 장난이 아닌 것 같애."

정희의 그 말을 듣고도 한 동안 난 철수가 장난치는 것이 아닌가 관찰까지 했었어요.
그러다 웃음이 가시고 가슴이 덜컥 내려 앉는 줄 알았습니다.

"쟤, 장난 아냐!"

정희의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서야 난 자리에서 일어섰습니다.
철수를 건져 내고 많이 미안했습니다.
창백한 철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입술도 푸른 빛으로 변해 있었지요.
내가 구해내긴 했지만 철수의 위급함을 알아 챈 것은 정희였어요.
이젠 내가 더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철수가 정희를 좋아했던 이유를 알겠네요.
헤아려 주는 마음.
나는 정희보다 헤아려 주는 마음이 적나봐요.
정희가 밋밋하지만 철규씨와 오래토록 유지되는 것도 그 것 때문이겠지요.
다이어리에 철수 이름을 적어 보았습니다.
후배, 동생. 어쩌면... 그리고 세모표.

"은정이 누나십니까?"

새벽 1시경에 철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녀석은 서울로 돌아 오지 못했나 봅니다.
밤 늦게 예의도 없이 그것도 술에 취한 목소리로 내게 전화하는 철수의 목소리가 그렇게 싫지만은 않습니다.

"왜?"
"아, 제 목소리 아시겠습니까?"
"철수야, 누나가 지금 자다가 일어 났거든? 용건만 말해."
"오늘 왜 안 나왔어요?"
"뭐? 동아리 모임 말이니?"
"네."
"나는 4학년이잖니. 이제 자중해야지."
"에이, 그럼 나도 서울 올라가는건데. 누나 나올 줄 알고 끝까지 남아 있었잖습니까."
"나 보고 싶던? 근데 이번 주엔 왜 연락 한 번 없었어. 내 바로 근처에 살면서 한 번 찾아 오지도 않았잖아."
"좋아하기 때문에 못 찾아 갔죠."
"그게 말이 되니?"
"당연히 되죠. 누나가 삐삐를 좀 치지."
"바로 옆에 사는 데 삐삐를 왜 치니? 그 말하려고 전화 한거야?"
"누나!"
"왜?"

철수가 날 불러 놓고선 한 참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잘 사세요. 안녕."

싱거운 놈이네요.
술을 먹은 것 같으니까 방으로 들어가 금방 잠이 들겠네요.
내일 아침 철수의 자는 모습이 상상이 갑니다.
침대 위에 넌닝 차림으로 배를 내 놓고 자겠죠?
술기운에 머리도 좀 아프겠네요.
아마 내게 전화한 것을 기억 못할지도 몰라요.
잠이 들었다가 깨니까 금방 잠이 오질 않습니다.
아까 전철에서 끄적이던 다이어리를 꺼내 보았습니다.
올 해 다이어리에는 별로 적힌 게 없습니다.
잠시 옛 기억을 잡고 싶었습니다.
책 상 서랍에서 작년 다이어리를 꺼내 보았습니다.
그 속엔 올 해보다는 많은 내용의 글 들이 적혀 있네요.
그리고 사진 두장을 발견했습니다.
내가 승주를 좋아했던 것은 사실인가 봅니다.
승주 옆에 서 있는 내 모습이 참 예쁘네요.
그리움은 공백기가 있지요.
사년 전 다이어리와 삼년 전 다이어리를 모두 꺼내 보았습니다.
제가 그때 보다는 철이 들었겠지요?
기억에 없는 이름들이 제법 눈에 띕니다.
그리고 승주라는 이름을 또 많이도 적어 놓았네요.
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기대를 했었나 봅니다.
이름 한자 한자에는 내 기대 하나 하나가 들어 가 있었습니다.
철없이 말입니다.
승주의 사진은 옛 다이어리에 그대로 꼿아 두겠습니다.
철수 녀석 말대로 만난 시간 만큼은 그리울 수가 있으니까, 기대한 한 만큼 생각날 수가 있으니까, 한때의 감정으로 흔적을 지워버리고 나면 나중에 후회한다고 합니다.

올 해 자주 만났으면서도 철수의 이름은 별로 적히지 못했습니다.
연하라 기대하지 않아서일까요.
조금 미안하네요.
그래 기분이다.
열 번정도 적어주자.
밤의 기분 때문에, 아늑한 내 방의 기분 때문에 한 페이지 가득 철수의 이름을 적어 주었습니다.
걔하고는 사진도 같이 찍은 적이 없네요.
아직 정리하지 못한 올 여름에 찍은 사진들 중 호숫가의 내 모습이 담긴 사진 한 장을 철수 이름이 적힌 그 페이지에다 끼워 놓습니다.
그때 철수를 생각했었거든요.

9월부터는 나름대로 대학원 갈 준비를 해야 했습니다.
학기 초부터 밤 늦게까지 도서관에 붙어 있자니 체질상 힘드네요.
11시 경에 집으로 돌아 가는 길은 조금 무섭습니다.
길 가에 늘어선 옥수수들의 키가 나보다 커요.
바람이 불면 으시시한 소리를 내지요.
멀리 내 자취방 건물의 불빛들이 보이긴 하지만 옥수수 밭에서 누군가 뛰어 나와 나를 끌고 들어가도 나는 도움을 받지 못할 것 같습니다.
옥수수 밭을 지나칠 때면 항상 발걸음이 빨라지지요.
철수의 방에 불이 켜져 있네요.
내일부터는 마중 나오라고 그럴까?
도서관에 혼자 있기가 심심한데 저 녀석 공부를 좀 시킬까?

"왜 내 방으로 먼저와요?"
"좀 놀다 가려고."
"이런 야심한 시간에 아녀자께서 남자 혼자 사는 방을 찾는 것은 보기가 좋지 못하옵니다."

녀석은 아직 나에게 장난기 섞인 말 밖에는 내 뱉지 못하는군요.

"뭐 했어?"
"학기 초부터 레포트가 많네요."
"물 끓는 소리 들린다."
"아, 레포트 쓰는 일은 체력 소모가 많기 때문에 중간에 새참을 먹어줘야 되거든요."
"나도 하나 끓여 줘 그럼."
"라면은 고칼로리, 고 염분인데 괜찮겠어요?"
"괜찮아."

라면 하나 먹고 잔다고 내 외모가 급작스레 변하지는 않겠지요.
철수 방에서 라면을 먹습니다.
그냥 바닥에 앉아 철수를 마주보며 약간은 초라한 모습으로 라면을 먹습니다.
철수 방에는 그릇이 빈약했기 때문에 냄비 통째로 들고 와 나눠 먹었지요.
저 녀석 입에 들어 갔던 젓가락이 그대로 다시 냄비 속으로 들어 가네요.
먹지 말까?
이런 고민하고 있을 동안 철수는 계속해서 라면을 먹습니다.
그래서 아무 생각않고 먹기로 했습니다.
자취생들이 라면을 잘 끓인 다는 말은 사실입니다.

"너 삼학년이니까 공부할 거 많지?"
"응."
"냄비는 내가 씻어 줄게."
"냄비 다 씻었으면 누나 방에 가요."
"갈 때되면 어련히 알아서 가겠니."

철수는 진짜 레포트 쓸게 많나 보네요.
바로 책상 앞으로 가 앉습니다.
침대 위에는 인형이 다섯개로 늘어 있네요.
녀석이 내가 주었다고 여기로 몇 개 갖다 놓았습니다.
호랑이 두개. 도깨비 하나. 노란 오리 하나. 외계인 같은 이상한 놈 하나.
이 방에 목동 인형은 보이지 않습니다.
인형 하나를 보듬고 침대 위에 앉았습니다.

"안가요?"
"누나가 주었다고 인형을 여기에 모두 갖다 놓았구나. 많이 발전했다."
"집에 놔두기 쪽팔려서 가지고 왔어요."
그래 자식아, 이제 좋은 답 기대하지 않을게.

"너 시험기간에 어디서 공부하니?"

녀석을 도서관에 보디가드 겸 동반자로 데리고 다녀야 겠어요.
하지만 시험 기간이 아니라, 나 때문에 도서관 나오라는 소리를 하기가 좀 머뭇거려 집니다.
작년 정희가 부탁했을 때는 잠을 자는 한이 있어도 옆에 있어 주었으면서 내게는 거절을 할까봐 바로 부탁하기가 좀 어렵습니다.

"내 방에서요. 문 잠궈 놓고 방에서 하는 편이에요."

뭐야?

"그럼 저 번 학기에도? 내가 찾아 갔을 때 너, 방에 있었던 거야?"
"누나가 찾아 왔던 거에요? 진작 말을 하지. 나는 내 친구들인 줄 알았잖아요."
"너 도서관엔 잘 나가지 않니?"
"시험 소스 구하고 어려운 프로그램 짤 일 있으면 나가요. 나도 제법 도서관 나가는 편입니다."
"정희가 외롭다고 했을 때, 같이 있어 주었지?"
"응."
"내가 같이 나가자고 하면 안 들어 줄거지?"
"왜? 누나도 외로워요?"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너 도서관 나와라. 나는 계속 도서관 나가야 된다 말이야. 내 옆에 앉아서 공부도 좀 하고 레포트 같은 것도 도서관에서 쓰면 되잖아. 누나가 맛있는 거 사줄게. 나 혼자 밤길 오는 거 무서워. 내일부터 나랑 도서관 다니자."
"그러지요 뭐."

엉?
이 녀석이 대답을 너무 쉽게 해 버리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어렵게 부탁하는 게 아니고 내 식대로 하는건데.
이렇게요.

"야, 내일부터 도서관에 나와. 아침에 나랑 같이 가자. 그리고 집에 올 때 나랑 같이 와."

그냥 혼잣 말인데 철수가 날 빤히 쳐다 보면서 고개를 끄덕거립니다.

"그럴게요. 어짜피 나도 공부를 해야 되는 처지고..."

괜히 말돌리고 어렵게 부탁했네요, 씨.
내 방으로 돌아 왔지요.
9월 들어서니까 밤에는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기도 합니다.
철수가 준 잠옷을 꺼내 입었습니다.
촌스럽긴 하지만 자취방에선 올 가을이 잠옷으로 하렵니다.

철수는 나를 따라 계속 도서관을 나왔습니다.
작년 정희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기 싫은 공부였지만 도서관만큼은 꼭 나왔습니다.
철수는 낮에는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녁 먹을 시간에 왔다가 저녁을 먹고는 또 한 시간 정도 보이지 않아요.
7시 쯤부터 조금 공부하는 척 하지요. 나는 집에 돌아 갈 시간이 되면 거의 일상으로 내 뱉는 말이 생겼습니다.
엎드린 철수 의 등을 쿡쿡 찌르면서 하는 말입니다.

"철수야 일어 나아. 이제 집에 가자."

철수는 10시를 못 넘기고 꼭 잠이 들었습니다.
그래 자라.
철수는 계속 내 옆에 있어 주고 있습니다.
남,녀 관계로 사귀는 것은 아니지만 녀석 덕분에 나는 다른 사람을 곁에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추석도 지나갑니다.
완전한 가을이 왔습니다.
철수를 먼 곳에서 유학 온 학생으로 잠시 착각을 했었네요.
추석이 끝나고 철수 생각에 집에서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 왔는데, 철수도 마찬가지로 내 생각을 하고선 먹을 것을 많이도 싸가지고 왔네요.

"누나 집에서도 송편을 만들었어요?"
"그래."
"우리 집에서 만든 게 더 맛있을 거에요."
"아니야. 우리 집 것도 맛있어."
"그럼 바꿔 먹읍시다."
"그러지 뭐."
"그런대로 먹을 만 하네요."

내 방을 찾아 온 철수가 내 삶의 하나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참, 나 집에서 사진기 가져 왔어."
"사진 찍게요?"
"여기서 사진 한 판 찍을래?"
"나하고 말인가요?"
"응. 그리고 주말에 어디 사진 찍으러 가자. 가을이잖니. 단풍이 물들어 가고 있는 풍경이 멋있을 것 같지?"
"사진 찍는 거 좋아해요?"
"뭐, 예쁘니까 결과에 만족하는 편이지."
"좋겠수. 나는 결과에 별로 만족하는 편이 아니라 사진 찍는 거 즐기는 편이 아닌데..."
"너도 괜찮게 생겼어."
"그렇죠? 나도 자세히 보면 잘 생겼죠?"

녀석에겐 되도록 칭찬을 아껴야 겠어요.
조금 띄워 주면 끝을 알 수 없을 것 같네요.
그래도 오늘은 띄워 줘야 겠네요.
녀석이 웃는 모습이 좋거든요.

"그래, 자세히 안 봐도 잘 생겼어."
"푸하핫! 드디어 나보고 잘생겼다 하는 여자가 셋이나 생겼다."
"응? 누가 너보고 또 잘 생겼다 그래?"
"우리 엄마하고, 정희 누나요."
"그래, 나를 포함해서 세 명? 좋겠다."
"뭐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만 나보고 잘 생겼다 그러면 만족해요."

훗, 그것도 괜찮겠네요.
그 말을 하는 녀석이 부럽기도 합니다.
저런 녀석이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할 것도 같습니다.

"촛점 잘 마춘거에요? 근데 추리닝 차림인데 괜찮을까요?"
"너 아무거나 입어도 멋있어."
"자꾸 띄워주면 농담인거 표가 난다 말입니다."

타이머를 맞추고 철수 곁으로 갔습니다.

"웃어 빨리."
"뒷 배경이 누나 침댄데 좀 어색하지 않아요? 더군다나 누나는 잠옷차림이구..."
"찰칵!"
"에이, 너 말하고 있을 때 찍혔잖아. 다시 찍어."
"그 필름 학교 근방에선 맡기지 마요. 오해 받기 딱 좋거든요."
"좀 그렇다 그지?"

위에 스웨터 하나를 껴 입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사진 한 장을 찍었지요.

"너무 붙지 마요."
"뭐 어때."

녀석 곁에 꼬옥 붙어서 후일 미소 짓게 만들 수 있는 사진 하나를 찍었습니다.
거의 볼이 맞닿을 정도로 얼굴을 붙였더니 녀석이 일순간 굳어 지더군요.
그때 사진이 찍혔습니다.

주말에 관악산을 갔었습니다.
정상까지 가면서 철수와 같이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부분 그녀석과 나 독사진이었지요.
철수는 생각보다 산을 잘 탔습니다.
높은 산이 아니었지만 빈 손으로 가는 내 손을 잡아 주며, 그리고 베낭까지 짊어 지고 잘 올라 갔습니다.
정상에서 비로소 철수와 나란히 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어떤 아저씨께 부탁을 드렸습니다.

"둘이 부부에요?"
"네?"
"제가 그렇게 늙어 보여요?"

나보다 철수가 더 열을 받더군요.
확 밀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내가 더 기분 나빠했어야 했는데 철수의 그 말 한마디를 듣고 그런 생각들 떨쳐 버렸지요.
철수의 팔짱을 꽉 끼고 사진 찍는 아저씨께 미소를 보여 주었지요.

"제 약혼자에요. 예쁘게 찍어 주세요."
"아, 그러세요. 자 사진기를 보지 마시고 저기 먼 산을 보십시오."

철수가 아무말 없네요.
철수가 산을 내려 가면서도 별 말 하지 않았습니다.
녀석이 또 기분 나쁜 표정이었습니다.

"너 왜 그래?"
"누나 남자들 만나서 아까 같은 말 잘해요?"
"뭐?"
"약혼 했다는 그런 말 쉽게 내 뱉을 수 있던가요?"
"뭐 어때 모르는 사람에게 장난삼아 말한건데."
"내 생각은? 그런 말하면 남자들은 착각한다고 했잖아요."
"뭐 또? 저 년이 내게 맘이 있구나. 이거? 나 너한테 마음이 있어 왜?"
"나 사랑하는 건 아니잖아요. 요즘 내가 뭘 참고 있느라 힘들거든요. 그런 말하지 마세요."
뭘 참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녀석은 삐친 모양으로 나를 앞서 휭하니 산을 내려 갑니다.

"같이 가 철수야."

흠, 내가 아까 아저씨에게 농담삼아 철수를 약혼자라고 말했을 때 가슴이 떨렸었거든요.
기분 좋은 농담이었는데 저 벤댕이 녀석은 삐친 모양으로 나를 기다리지 않고 산을 내려가 버립니다.
저거 삐친 척 해 봤자 금방 풀어질 것을 압니다.
가소로운 놈.

"철수씨, 같이 가. 웨잇 포 미 달링!"
"우이쒸!"

모든 사진은 사람수에 관계없이 두장씩 뽑았습니다.
그리고 철수와 똑같이 나누었습니다.

"누나 사진 잘 보관해라. 액자 같은 곳에 끼워 두면 더 좋고."
"누나하고 나하고 제법 키 차이가 나네요. 상당히 큰 줄 알았더니..."
"나는 너 키 작다고 놀린 적 없다?"
"176이 작아요?"
"그럼 작지. 요즘 키크고 잘난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우쒸, 여기 이 사진 우리 동아리 방에다 걸어 놓는다? 이건 암만 봐도 신방 분위기 같애. 이 사진 돌면 누나 시집 못가요?"

녀석이 내 방에서 찍은 사진을 들고 협박하는군요.
웃음기 맺힌 얼굴로 말입니다.
시켜도 그렇게 하지 못할 녀석이 말로만...
진짜 해 봐?
내가 눈하나 깜박거리나...

"누나는 그 정돈 극복할 수 있는 미모가 있잖니."
"장기 치료가 필요할 것 같군요."
"이렇게 살아도 별 불편함 못 느끼고 살았어."
"그럼 남편 될 짜식이 고생할 것 같군요."
"내 낭군님을 욕하지 마라."
"낭군님?"
"난 결혼을 할 것이고 그럼 내 남편 될 사람이 어딘가 살고 있을 거 아냐. 그사람 욕하지 말라고. 그 사람이 네가 짜식 이러는 걸 알면 기분이 좋겠니? 니 마누라 될 사람 걱정이나 해. 너 보니까 네 마누라 될 사람도 그리 편치 만은 못하겠다."
"으이쒸. 빨리 내 반쪽을 만나야 되는데. 하여튼 사진은 잘 보관할게요."
"누나 사진 끼울 액자 하나 사서 네 책상위에 놓아 둬. 니 방 분위기가 살거다. 액자에다 존경하는 누님과 함께. 이렇게 써 놔라."

내가 자꾸 이런 말 하는 건 철수에게 맘이 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전보다 더 나를 표현하는 말에 누나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을 내 뱉고 나서 꼭 후회를 하기도 합니다.

도서관엔 계속 나갔습니다.
철수는 실험 때문에 도서관 내 옆자리에 앉지 못하는 경우는 있어도 집에 갈 때쯤에는 꼭 나를 데리러 왔습니다.
오늘은 9시 못되어 자기 시작하더니 여태 일어 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은 거의 11시가 다되었습니다.
자리에서 일어 섰어요.
철수를 깨우려다 연습장에 적어논 글들을 보았습니다.
녀석이 또 공부는 거의 하지 않았군요.
곧 중간 고사 기간인데...

내 팔 길이 만큼의 그리움.
방 하나의 공간만큼 떨어져 있는 아련함.
곁에 있어면서도 다른 사람을 꿈 꾸어야만 하는 아쉬움.
딱 좋다.
언젠가는 제 사람을 만나 남남이 되겠지만 그 시간까지는 이것으로 만족해야겠지.
그녀와의 지금 이거리가 딱 좋다.

뭐야 이녀석.
이건 아무리 봐도 나를 생각하고 쓴 글 같네요.
흠, 아쉽네요.
녀석의 이런 생각이...
모른 척 해야 겠습니다.
남남이라는 말이 내 마음을 조금 아프게 합니다.

"철수야 가자."

그냥 침묵으로 집까지 걸었습니다.
최근들어 난 철수를 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점점 철수에 대한 생각들을 고쳐 가고 있었는데, 내 마음을 붙들어 두어야 겠네요.
더 이상 가지 못하도록 말입니다.
열매가 보기 좋게 맺힌 옥수수가 바람에 흔들립니다.
녀석이 내 침묵한 모습이 어색했는지 옥수수를 보더니 딴 말을 합니다.

"누나 옥수수 좋아하죠?"
"잘 먹는 편이야."
"올해도 서리를 해야겠군. 오늘 밤에 할까?"
"너 작년에도 그게 서리한 거였니?"
"네."
"치! 나이가 몇살인데 그런 짓을 하니?"
"오늘 밤에 서리 합시다."
"응?"
"누나가 망 좀 봐줘요. 아직 제대로 익은 건 많지 않을거라 시간이 좀 걸릴 것같아요. 작년에 내가 제법 서리를 했고, 다른 자취생들도 몇 개씩 뜯어 갔을 거에요. 올해는 뭔가 감시가 있을 것 같기도 하거든요. 새벽에 같이 서리 합시다."
"싫어."
"같이 하자니까요. 누나가 작년에 옥수수를 많이 먹었기 때문에 누나도 공범이야."
"뭐가?"
"발빼지 마요. 오늘 새벽 한시에 행동에 들어 갑시다."
"나 공부해야 돼."
"한시에 누나 데리러 갈게요."

자기 맘대로군요.
늦게까지 잠들지 않았습니다.
책상에 앉아 생각을 해 봅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뭘까.
자기가 외롭기 때문에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 나는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나는 결혼을 하겠지요.
길어도 3년 안에는 제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릴 겁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잊고, 그 사람 세계의 사람들을 받아 들이겠지요.
녀석의 글처럼 제 사람을 만나면 철수와 난 서로를 잊어갈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거라 다짐 할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자기도 모르게 잊어갈 겁니다.
아직까지 우리 사회는 배우자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과거의 사람들은 잊어 주는게 예의입니다.
나는 분명 철수의 짝에게 필요없는 사람으로 생각되어 질 겁니다.
남남이라...
철수에 대해서는 아직 생각해 보지 못한 단어군요.

"딩동!"

뭐야?
초인종 소리에 시계를 보니 새벽 1시입니다.
진짜로 왔어.

"이런 야심한 시간에 아녀자 혼자 사는 방을 남정네가 찾는다는 것은 무례한 일이 아닌지요?"
"빨리 옷 입고 나와요."
"진짜 갈려구?"
"옥수수 먹고 싶지 않아요? 윗도리만 하나 걸치고 바로 나와요."

자기 생각으로 내가 고민했다는 것을 알까?
전혀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군요.

"망 잘 봐요. 혹시 주인 아저씨가 나오면 말 붙여서 시간 끌어요."
"이런 시간에 주인이 왜 나오니? 그리고 내가 주인 아저씨가 누군줄 어떻게 알아?"
"대충 보면 알지."

잠옷에 가디언 하나 걸치고 이런 야밤에 밖에 나와 보기는 처음이다.
그냥 자기 혼자 서리해도 되겠네.
지나가는 사람이라고는 술에 취한 양복 입은 어떤 아저씨 뿐이었다.
그냥 봐도 저 사람은 이 밭 주인이 아니다라는 것을 알겠다.
저 아저씨가 날 보고 배시시 웃더니 혀를 찼다.
제법 무서웠었는데 철수가 가까이 있다는 생각으로 같이 혀를 차 주었다.
집에 들어 가면 마누라에게 바가지 많이 긁히겠수.
내가 이게 무슨 꼴이야.
저런 술취한 아저씨에게 놀림이나 당하고...
엄마야!

"누나 왜?"
"고양이가 뛰어 나왔어."
"주인 아저씨 아니면 소리 지르지 마요."

검은 밤은 옥수수 밭이 부스럭 거리며 흔들렸다.
무서운 풍경이다.
그 어두운 옥수수 밭에서 검은 물체가 툭 튀어 나왔다.
함박 웃음을 지은 채 말이다.

"이제 갑시다."

세상에나...

"그렇게 많이 떼어 오면 이 밭 주인은 어떡하라고?"
"다른 사람이 서리 하지 않으면 괜찮을거에요. 빨리 튑시다."

녀석이 근 스무개 가까이 되는 옥수수를 안고도 나보다 빨리 뛰어 갑니다.
철수가 새벽이지만 내 방에 있습니다. 옥수수를 잔뜩 내려 놓은 채 말입니다.

"불 켜면 의심 받으니까 그냥 스탠드 불 빛으로 놔 둬요."
"치, 새벽 2시가 다되어 이게 무슨 짓이냐."
"자 누나 몫."

녀석이 내 배분으로 옥수수 다섯개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방으로 가려고 하네요.
밖에 나갔다 와서 잠도 오지 않는데 그냥 가 버리면 안돼지요.

"야, 난 왜 다섯개야. 반반으로 나눠야지."
"다섯개면 많이 준거야. 그래 기분이다. 2개 더 줄게. 됐어요?"
"그 두개 삶아 먹자."
"지금?"

옥수수는 영양식으로 괜찮죠.
새벽 두시 경에 서리한 옥수수 삶아 먹기도 처음입니다.
옅은 스탠드 불빛 아래에 녀석의 웃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자기 것이라고 남은 옥수수를 꼭 챙겨서 안고 내 방을 나갈 때 지어준 녀석의 웃음도 보기 좋았고, 걸어가는 뒷 모습도 사랑스럽습니다.
저 녀석하고도 언젠가는 남남이 될 것이다?
싫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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