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쒸, 옅은 잠이 든 채 뒤척이다가 잠에서 깨고 말았다.
엄마가 곧 수능을 볼 내 동생 때문에 벌써부터 보일러를 가동 시켰나 보다.
덥다 씨.
다시 잠이 오지 않는다.
불 꺼진 방안에서 잠이 오지 않아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다.
그냥 피식 웃었다.
은정이 누나 생각 때문에 웃었다.
학교에서도 종종 오늘 같은 일이 있었다.
누나 과 동기들이나 동아리 선배들이 종종 나와 같이 있던 누나를 빼앗아 가버린 적이 많다.
내가 모르는 놈과 웃으며 지나가는 누나를 만난적도 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근데 오늘 일은 조금 다르다.
오늘 누나를 빼앗아 가 버린 놈은 누나의 마음 속 내 앞에 서 있을 것 같은 자식이다.
기분이 이상하게 나쁘다.
분명 나는 누나와 데이트 중이었다.
누나 입으로도 데이트라고 말했다.
근데 내가 뻔히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염치 없이 나타난 승주 그 자식은 뭐야?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한거야?
나는 안중에도 없다 이거지?
그 자식이 밉다.
그리고 너무 쉽게 그 자식에게 가버린 누나도 밉다.
그래 너들 맘대로 다 해라.
나는 무시 당했다.
기분 나빠 다음 주는 누나 안 본다.
가만, 잠시 다시 생각 해 봐야겠다.
다음 주에 내가 누나를 피해 버린다고 해서 누나가 아쉬워 할 것 같지도 않다.
누나가 좋아하던 사람이 곁에 나타났는데 내 생각을 하겠냐.
괜히 나만 손해일 것 같다.
잠이 오질 않아 불을 켰다.
그리고 이불 위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일어서 창을 열었다.
하늘 한 번 쳐다 보았다.
밤 하늘 색깔이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율전 내 자취방에서 보는 하늘은 이보다 맑고 예쁘다.
그 예쁜 하늘 아래 내 옆에는 또 예쁜 여자가 살고 있다.
오늘 일을 너무 신경쓰면 그 여자가 어색해 할 수 있다.
그래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주도 늘 하던 식으로 해야 겠다.
밥도 더 사달라고 조르고 염치 없이 누나 방에도 불쑥 찾아 가는거야.
나가라고 쫓아 내면 눈물 대신 배째라고 배짱을 부리자.
그래 그러자.
차라리 잘됐다.
더 마음이 가다가 누나에게 사랑 고백까지 하고선 퇴짜 맞는 것 보다 오늘 일을 계기로 해서 내 마음을 더 잡아 둘 수 있게 되어 오히려 잘됐다.
조금만 물러서 뒷 짐을 쥐어주자.
한 걸음 뒤에서 행복을 빌어 줄 수 있는 멋있는 놈이 되자.
그래도 승주 그 자식 생각을 하면 열 받는다.
나한테 한마디 양해도 구하지 않고 누나를 가로채 가버리다니.
언제 집을 알아 놓았다가 밤 길에 혼자 오면 졸라 패버려야지.
누나가 그 사실을 알면 날 나쁜 놈이라고 욕하며 쳐다도 안 보겠지?
차라리 멋있는 놈이 되자.
아니다,
복면 쓰고 패면 난 줄 모를거다.
졸라 패고 멋있는 놈도 되자.
뭐야,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여.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쯔쯧, 웃기다.
하핫, 슬프다.
그리고 찬 바람이 들어와 춥다.
한 숨 한 번 허공에다 내 뱉고 창 문을 닫았다.
이불위에 다시 쪼그려 앉았다.
눈을 밑으로 깔아 밧데리가 터져 나간 삐삐를 보았다.
짜식아 아프냐?
삐쳤어?
불쌍해서 치료해 주었다.
완쾌중인 삐삐를 책상 위에 놓아 두고 다시 불을 껐다.
"지이잉!"
으! 뭐야.
꿈쩍 놀랐다.
삐삐가 왜 울리는 거야.
다시 불을 켰다.
지금 새벽 2시가 넘었다.
그런데 삐삐가 울렸다.
밧데리가 나가 있을 때 왔던 호출을 이제 받은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거 같다.
그냥 전원을 꺼 버렸다.
내 방의 불도 껐다.
마음에 상처를 좀 받긴 했어도 평상시처럼 누나를 대할 것이라 다짐을 하고선 잠을 청했다.
연상의 여인.
내 곁에 있는 연상의 여인은 손이 닿는 곳 내 팔 길이 만큼 떨어 져 있는 그리움이지만 팔을 당겨 껴 안을 수 있는 그리움은 아닌가 보다.
잠이나 자자.
대학로 저녁 무렵의 조명을 받은 어느 무명 가수의 모습이 내 옆에 있는 녀석을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얼굴이 닮은 건 아니었지만 잔잔한 노랫소리따라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던 가수의 얼굴이 철수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의 노래 가사처럼 사람들 속에서 그는 혼자가 아닌 듯 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감상에 젖어 이런 생각들을 하는가 봅니다.
내 시선을 받고 있는 철수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 저 가수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그냥 감상에 젖은 내 마음 때문일겁니다.
노래를 듣고 있던 내 옆에 누군가 다가 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철수가 그걸 알려 주었지요.
내 옆에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 낯익은 얼굴이었습니다.
일 년이나 보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그렇게 낯 설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반갑기도 했습니다.
많이 그리워 했던 사람이네요.
승주 그 사람을 우연찮게 만났습니다.
큰 감정의 변화를 불러 일으키진 않았지만 그의 모습에서 지난 일 년이 궁금했습니다.
잠시 내 옆에 있던 철수의 존재를 잊었습니다.
"철수야 미안한데, 오늘은 먼저 들어가라."
그 말을 남긴 채 나는 철수에게 등을 돌리고 승주에게로 갔습니다.
승주에게 아직 감정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나를 떠난 이유가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승주는 잊혀진 존재가 된 상태였고, 난 그의 이름 앞에 누군가 새겨 놓았음을 잠시 잊었습니다.
승주와 나란히 걸어가다 뒤를 돌아 보았습니다.
어깨가 쳐진 채 지하철 역으로 걸어 가는 철수를 보았습니다.
현재 내곁에 있어 주는 녀석의 모습이 조금 슬퍼 보였습니다.
내 곁에 있어 줄 것 같은 사람을 떠나 보내고 잠시 나를 찾아 온 옛 사람 따라 갑니다.
잠시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승주 그 사람은 나를 철수가 소개팅 했던 그 커피샵으로 데려 갔습니다.
걸어가면서 내내 침묵한 채였고 그와 마주 앉아서도 어색한 웃음만 지었을 뿐이지요.
"여기 놀러 왔었니?"
"응. 오늘 오후에 여대생과 미팅을 했었어. 주말 오후 여기는 낯선 사람들끼리의 만남이 많잖아.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지."
기껏 일년 만에 만나 하는 소리가 저 것인가요?
별로 변하지 않았네요.
"나는 콜라 주세요. 니가 사는 거지?"
내 목소리가 내가 듣기에도 좀 차갑습니다.
승주에게 받은 서운함이 작지가 않거든요.
"어? 응. 전 모카 커피요."
내 앞의 승주의 모습이 담담해 보입니다.
"일 년동안 뭐 했니?"
"그냥 복학하고 평범한 학생 신분이었지. 아까 그 후배하고는 계속 잘 지내나보네?"
"그래."
"너 여전히 예쁘구나."
"그래. 넌 조금 어른스러워 보인다."
"흠. 잘 지냈어?"
"잘 지냈지 그럼."
"그냥 잊혀 질 줄 알았는데 오늘 이렇게 우연찮게 만나게 되네?"
"훗! 내가 너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는 고개 돌리더니, 그리고 그냥 연락을 끊어 버릴 때는 언제고 오늘은 왜 모른 척 지나치지 않았니?"
"그냥 반가웠기 때문이다."
"반가워?"
"후회했었어. 연락 끊은 거 후회했어. 난 네가 연락해 줄 거라 믿었거든. 그 연락을 기다리다 흘러 버린 시간은 내가 너에게 연락할 용기를 꺽어 버리더군."
"니가 그런 말도 할 줄 아니?"
"오늘은 그냥 반가워서 아는 척 했어."
"날 떠난 이유나 좀 알자. 내가 부담스러웠니?"
"응."
"왜?"
"그냥 좋아했으니까."
"그게 이유가 돼?"
"사귀게 되면 차일 것 같았거든. 사랑에 빠지면 상처 받을 것 같았어."
"너 바보니?"
"사람을 만나면 느낌을 받게 되어 있어."
"내 느낌이 어땠는데?"
"넌 나를 많이 헛갈리게 했어. 넌 내게 믿음을 주지 못했거든.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넌 많이도 장난스러웠다."
"네 맘대로 판단하지마."
"모르겠다. 하지만 난 너에게 서운했던 적이 많아. 그렇지만 또 한 편으로 고마웠던 적도 많았지. 넌 나보다 높아 보였어."
"어려운 말도 하지마."
"흠! 너하고 멀어질 마음은 없었어. 그냥 곁에 있고 싶어서 네 고백을 받아 들이지 않았을 뿐, 니가 날 예전처럼 대해 줄 때까지 조금 떨어져 있겠다고 생각했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어. 근데 이렇게 되어 버렸다."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걸까.
자기들 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선 어색해 진 이유를 내게서 찾는다.
"승주 오빠."
나보다 한 살 많으니까 오빠라고 불러줘야 겠지?
"응?"
"기분 나빠."
"그래, 기분 나쁘겠지. 시간이 흐르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생각한 것 보다 네가 날 좋아했었다는 걸 알겠더라. 그 고백이 괜히 한 것이 아니라는 걸. 후후, 그래도 너에게 다가갈 자신은 생기지 않더라. 네 생일 날 네가 호출하지 않았다면 찾아 갔을 거야."
진짜 기분 나쁘네요.
나에겐 괴변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말하지 마. 지나간 일이야."
말하지 말랬다고 승주는 한 동안 침묵했습니다.
커피샵 바깥 풍경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한참 만에 승주가 입을 열었습니다.
"오늘 같이 있던 후배에게 미안하네. 나도 너하고 있을 때 몇 번 느꼈었지."
"뭘?"
"나도 녀석이 후배라고 잠시 그 생각을 못했어. 녀석이 네게 좋아하는 마음이 없진 않겠지? 그때도 제법 친하게 보였는데, 일년이 지나고도 계속 같이 있는 걸보면."
"무슨 말이야?"
"훗, 넌 오늘 걔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우연히 만난 사람 때문에 같이 있던 사람을 보내 버리면 그 사람은 어떤 기분이겠니? 오늘은 같이 만났어야 했어. 나중에 나를 따로 만나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보내 버리는 건 아니야. 후배가 나에게도 너에게도 기분 나빠 했을 거야. 만약 너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상처 받았을지도 몰라. 니가 그 사람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선 안돼지."
엉? 정말 그렇네요.
어깨가 쳐진 채 돌아 섰던 철수의 모습이 떠 올려 졌습니다.
내가 지금 옛 그리움이나 잡고 있을 때가 아니네요.
예전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모습이 조금 가엽습니다.
다시 만나 잠시간의 반가움은 주었지만 떨어져 있었던 일 년이란 시간 속에서 어색하고 평범한 존재로 변해 버린 그는 더 이상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철수 생각만으로도 그는 완전히 한 쪽으로 치워져 버립니다.
단지 철수 생각?
"나 이제 가 볼래."
"나에게 연락하지 않을거지?"
"응. 그냥 잊을래."
"훗,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나 보네? 뭐, 넌 항상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지."
"그런식으로 말하지 마. 지금은 아니지만 난 오랫동안 오빠를 가장 좋아했었어. 그것만 알아 둬. 난 처음 고백에서 퇴짜 맞은거야."
그 말 한마디로 그에게 가졌던 답답함이 조금 풀렸습니다.
승주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 섰지만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쓸쓸한 미소를 지어 준 채 잘가라는 손짓을 해 주었습니다.
멋있는 척 하기는...
커피샵을 나와서 빠른 걸음을 걸었습니다.
또 모를 답답함이 옵니다.
쓸쓸한 표정으로 앉아 나를 떠나 보낸 승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철수 그 녀석 때문입니다.
내가 그를 가볍게 생각했나요?
절대 그건 아닌데, 오늘 난 생각없이 철수를 집에 보내 버렸습니다.
승주의 말을 듣고 나니 영 찜찜합니다.
좋아하니까 피했다는 말은 승주보다 철수에게서 먼저 들었습니다.
장난처럼 술기운으로 말한 것이었지만 철수가 한 번 내 뱉은 적이 있는 말입니다.
승주와 오랜 시간 앉아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7시를 갓 넘겼을 뿐입니다.
철수를 다시 만나자.
그렇게 생각하고 철수네 집에다 전화를 했지요.
"여보시오."
아, 또 아버님이시네요.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습니다.
철수가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삐삐를 쳤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야윈 나뭇잎이 기분 좋게 부는 여운 가을 바람에도 불안해 보입니다.
그 밑 벤취에 앉아 철수에게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전화가 오지 않습니다.
그 곳에서 한 시간 동안 나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초라 하네요.
문득 혼자라고 생각을 하니까 내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껴졌습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이호선 삼성역이나 삼호선 압구정 역입니다.
집으로 가려면 다시 버스를 타야 하지요.
그 이유 때문에 택시를 탄 것이 아닙니다.
혹시 지하철을 타면 철수가 전화하는 것을 받지 못할까 봐 택시를 탔습니다.
집에 들어 와 철수에게 호출을 했지만 전화가 오지 않습니다.
내가 왜 계속 철수에게 호출을 하는지도 의아하지만 이 녀석이 또 전화 한 통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녀석이 진짜 상처를 받았을까요.
내게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한 줌 미소를 지어 봅니다.
그리고 울었습니다.
침대에 앉아 창 밖을 보며 울었습니다.
내 가벼운 말을 듣고 돌아서 가던 철수의 어깨 쳐진 뒷모습과 나를 떠나 보내며 쓸쓸히 웃던 승주의 모습이 동시에 떠올라 울었습니다.
왜 우는지도 모른 채 두 사람 생각이 나 그냥 울었습니다.
울고 나니까 기분이 좀 맑아 지네요.
오늘 승주에게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에게 좀 따뜻한 느낌을 주고 떠나 오는건데, 한 동안 그 사람 때문에 아파하고 눈물 흘린 적이 많은데, 오늘 난 너무 쉽게 그 사람을 떠나 온 것 같습니다.
승주 그 사람 생각을 하다가 또 웃습니다.
내가 집에 가랜다고 아무런 말도 없이 집으로 가 버린 철수 때문에 웃습니다.
어깨가 쳐진 채 돌아 선 철수의 모습이 조금 슬프게 느껴져 웃습니다.
오늘 그린 철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맺힌 미소를 지어 봅니다.
내가 오늘 왜 이럴까.
작년 다이어리에서 승주 사진을 꺼내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울었습니다.
기분 더럽네요.
어머, 내가 철수나 하는 이런 표현을 쓰다니...
이 자식이 왜 전화를 하지 않는거야.
오늘 사주 본 것을 되짚어 봅니다.
믿는 것은 아니지만 내 배우자를 내가 이미 만나 보았다고 했습니다.
누굴까?
철수도 이미 만나 보았다고 했었지요.
그녀석 상대는 누굴까?
지금 난 승주 사진을 들고 철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쒸!
어머, 내가 또 철수나 쓰는 이런 표현을...?
열 번째 호출을 했습니다.
이젠 오기가 생겼습니다.
도저히 못 참겠어요.
새벽에 몰래 집을 나왔습니다.
엄마 차를 몰래 훔쳐 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곧장 철수 집 앞으로 갔습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철수에게 이기고 싶었을 뿐이라고 변명해 봅니다.
나는 자기 전화를 기다리다 잠도 이루지 못했는데 녀석은 잘 자고 있는지.
후후, 녀석이 오늘 나 때문에 상처받고 불켜진 방에서 잠못 이루고 있을것이라 생각하며 그걸 확인하러 갑니다.
녀석은 그래야만 합니다.
자고 있기만 해 봐라.
나 철수방을 직접 들어 가보진 못했지만 철수 방의 창이 어떤 건지는 알고 있지요.
철수 네 집은 방 하나를 제외하곤 모두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철수 방의 창은 깜깜하네요.
아무래도 런닝 차림으로 배를 내 놓고 잘 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분 나쁘네요.
훗, 저런 녀석 때문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게 매정함을 보이고 떠나 왔다니, 저 녀석 때문에 그리웠던 사람을 이젠 과거의 사람이라고 한 쪽으로 치워 버렸다니...
연인 사이도 아닌데 이런 생각하는게 좀 우습긴 하지만, 야이 박철수!
내가 네 생각하는 것 반 만큼만이도 내 생각을 해 봐라, 내 당장 달려가 서방님 그런다 씨. 취소!
철수의 방에 불이 켜졌습니다.
그리고 철수가 창 밖을 쳐다 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직 자지 않았군요.
하늘에 무슨 그리움이라도 박혔는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저 모습을 보니까 오늘 내가 녀석을 생각없이 매정하게 돌려 보냈던 게 마음 아픕니다.
저렇게 깨여 있었으면서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건 마음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만이라도 있다면...
녀석은 승주를 닮은 구석이 많습니다.
감싸 주고 싶네요.
날 사랑하냐고 물어 보고 싶습니다.
만약 사랑한다고 대답을 한다면 오늘 내 마음은 키스라도 해주고 싶습니다.
삐삐를 쳤습니다.
깨어 있으니까 전화를 할 것 같습니다.
불러 내서 물어 봐야지요.
울린다.
울린다...
핸드폰을 보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나 끝내 울리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들어 창을 보니 철수 방의 불이 꺼져 있네요.
조금 아쉽습니다.
그냥 돌아 가야 겠네요.
다음을 기약하지요.
승주 덕에 철수 마음을 조금 헤아려 본 것 같네요.
잘 자라.
엄마가 곧 수능을 볼 내 동생 때문에 벌써부터 보일러를 가동 시켰나 보다.
덥다 씨.
다시 잠이 오지 않는다.
불 꺼진 방안에서 잠이 오지 않아 이런 저런 생각들을 했다.
그냥 피식 웃었다.
은정이 누나 생각 때문에 웃었다.
학교에서도 종종 오늘 같은 일이 있었다.
누나 과 동기들이나 동아리 선배들이 종종 나와 같이 있던 누나를 빼앗아 가버린 적이 많다.
내가 모르는 놈과 웃으며 지나가는 누나를 만난적도 있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근데 오늘 일은 조금 다르다.
오늘 누나를 빼앗아 가 버린 놈은 누나의 마음 속 내 앞에 서 있을 것 같은 자식이다.
기분이 이상하게 나쁘다.
분명 나는 누나와 데이트 중이었다.
누나 입으로도 데이트라고 말했다.
근데 내가 뻔히 옆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염치 없이 나타난 승주 그 자식은 뭐야?
도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한거야?
나는 안중에도 없다 이거지?
그 자식이 밉다.
그리고 너무 쉽게 그 자식에게 가버린 누나도 밉다.
그래 너들 맘대로 다 해라.
나는 무시 당했다.
기분 나빠 다음 주는 누나 안 본다.
가만, 잠시 다시 생각 해 봐야겠다.
다음 주에 내가 누나를 피해 버린다고 해서 누나가 아쉬워 할 것 같지도 않다.
누나가 좋아하던 사람이 곁에 나타났는데 내 생각을 하겠냐.
괜히 나만 손해일 것 같다.
잠이 오질 않아 불을 켰다.
그리고 이불 위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일어서 창을 열었다.
하늘 한 번 쳐다 보았다.
밤 하늘 색깔이 영 맘에 들지 않는다.
율전 내 자취방에서 보는 하늘은 이보다 맑고 예쁘다.
그 예쁜 하늘 아래 내 옆에는 또 예쁜 여자가 살고 있다.
오늘 일을 너무 신경쓰면 그 여자가 어색해 할 수 있다.
그래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주도 늘 하던 식으로 해야 겠다.
밥도 더 사달라고 조르고 염치 없이 누나 방에도 불쑥 찾아 가는거야.
나가라고 쫓아 내면 눈물 대신 배째라고 배짱을 부리자.
그래 그러자.
차라리 잘됐다.
더 마음이 가다가 누나에게 사랑 고백까지 하고선 퇴짜 맞는 것 보다 오늘 일을 계기로 해서 내 마음을 더 잡아 둘 수 있게 되어 오히려 잘됐다.
조금만 물러서 뒷 짐을 쥐어주자.
한 걸음 뒤에서 행복을 빌어 줄 수 있는 멋있는 놈이 되자.
그래도 승주 그 자식 생각을 하면 열 받는다.
나한테 한마디 양해도 구하지 않고 누나를 가로채 가버리다니.
언제 집을 알아 놓았다가 밤 길에 혼자 오면 졸라 패버려야지.
누나가 그 사실을 알면 날 나쁜 놈이라고 욕하며 쳐다도 안 보겠지?
차라리 멋있는 놈이 되자.
아니다,
복면 쓰고 패면 난 줄 모를거다.
졸라 패고 멋있는 놈도 되자.
뭐야,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 거여.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쯔쯧, 웃기다.
하핫, 슬프다.
그리고 찬 바람이 들어와 춥다.
한 숨 한 번 허공에다 내 뱉고 창 문을 닫았다.
이불위에 다시 쪼그려 앉았다.
눈을 밑으로 깔아 밧데리가 터져 나간 삐삐를 보았다.
짜식아 아프냐?
삐쳤어?
불쌍해서 치료해 주었다.
완쾌중인 삐삐를 책상 위에 놓아 두고 다시 불을 껐다.
"지이잉!"
으! 뭐야.
꿈쩍 놀랐다.
삐삐가 왜 울리는 거야.
다시 불을 켰다.
지금 새벽 2시가 넘었다.
그런데 삐삐가 울렸다.
밧데리가 나가 있을 때 왔던 호출을 이제 받은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거 같다.
그냥 전원을 꺼 버렸다.
내 방의 불도 껐다.
마음에 상처를 좀 받긴 했어도 평상시처럼 누나를 대할 것이라 다짐을 하고선 잠을 청했다.
연상의 여인.
내 곁에 있는 연상의 여인은 손이 닿는 곳 내 팔 길이 만큼 떨어 져 있는 그리움이지만 팔을 당겨 껴 안을 수 있는 그리움은 아닌가 보다.
잠이나 자자.
대학로 저녁 무렵의 조명을 받은 어느 무명 가수의 모습이 내 옆에 있는 녀석을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얼굴이 닮은 건 아니었지만 잔잔한 노랫소리따라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던 가수의 얼굴이 철수를 닮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사람의 노래 가사처럼 사람들 속에서 그는 혼자가 아닌 듯 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혼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감상에 젖어 이런 생각들을 하는가 봅니다.
내 시선을 받고 있는 철수가 사람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 저 가수와 닮았다고 생각하는 건 그냥 감상에 젖은 내 마음 때문일겁니다.
노래를 듣고 있던 내 옆에 누군가 다가 서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철수가 그걸 알려 주었지요.
내 옆에 어색한 모습으로 서 있는 사람은 오랜만에 보는 낯익은 얼굴이었습니다.
일 년이나 보지 못한 얼굴이었지만 그렇게 낯 설지는 않습니다.
솔직히 반갑기도 했습니다.
많이 그리워 했던 사람이네요.
승주 그 사람을 우연찮게 만났습니다.
큰 감정의 변화를 불러 일으키진 않았지만 그의 모습에서 지난 일 년이 궁금했습니다.
잠시 내 옆에 있던 철수의 존재를 잊었습니다.
"철수야 미안한데, 오늘은 먼저 들어가라."
그 말을 남긴 채 나는 철수에게 등을 돌리고 승주에게로 갔습니다.
승주에게 아직 감정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나를 떠난 이유가 듣고 싶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승주는 잊혀진 존재가 된 상태였고, 난 그의 이름 앞에 누군가 새겨 놓았음을 잠시 잊었습니다.
승주와 나란히 걸어가다 뒤를 돌아 보았습니다.
어깨가 쳐진 채 지하철 역으로 걸어 가는 철수를 보았습니다.
현재 내곁에 있어 주는 녀석의 모습이 조금 슬퍼 보였습니다.
내 곁에 있어 줄 것 같은 사람을 떠나 보내고 잠시 나를 찾아 온 옛 사람 따라 갑니다.
잠시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승주 그 사람은 나를 철수가 소개팅 했던 그 커피샵으로 데려 갔습니다.
걸어가면서 내내 침묵한 채였고 그와 마주 앉아서도 어색한 웃음만 지었을 뿐이지요.
"여기 놀러 왔었니?"
"응. 오늘 오후에 여대생과 미팅을 했었어. 주말 오후 여기는 낯선 사람들끼리의 만남이 많잖아. 나도 그 중 한 사람이었지."
기껏 일년 만에 만나 하는 소리가 저 것인가요?
별로 변하지 않았네요.
"나는 콜라 주세요. 니가 사는 거지?"
내 목소리가 내가 듣기에도 좀 차갑습니다.
승주에게 받은 서운함이 작지가 않거든요.
"어? 응. 전 모카 커피요."
내 앞의 승주의 모습이 담담해 보입니다.
"일 년동안 뭐 했니?"
"그냥 복학하고 평범한 학생 신분이었지. 아까 그 후배하고는 계속 잘 지내나보네?"
"그래."
"너 여전히 예쁘구나."
"그래. 넌 조금 어른스러워 보인다."
"흠. 잘 지냈어?"
"잘 지냈지 그럼."
"그냥 잊혀 질 줄 알았는데 오늘 이렇게 우연찮게 만나게 되네?"
"훗! 내가 너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했을 때는 고개 돌리더니, 그리고 그냥 연락을 끊어 버릴 때는 언제고 오늘은 왜 모른 척 지나치지 않았니?"
"그냥 반가웠기 때문이다."
"반가워?"
"후회했었어. 연락 끊은 거 후회했어. 난 네가 연락해 줄 거라 믿었거든. 그 연락을 기다리다 흘러 버린 시간은 내가 너에게 연락할 용기를 꺽어 버리더군."
"니가 그런 말도 할 줄 아니?"
"오늘은 그냥 반가워서 아는 척 했어."
"날 떠난 이유나 좀 알자. 내가 부담스러웠니?"
"응."
"왜?"
"그냥 좋아했으니까."
"그게 이유가 돼?"
"사귀게 되면 차일 것 같았거든. 사랑에 빠지면 상처 받을 것 같았어."
"너 바보니?"
"사람을 만나면 느낌을 받게 되어 있어."
"내 느낌이 어땠는데?"
"넌 나를 많이 헛갈리게 했어. 넌 내게 믿음을 주지 못했거든.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넌 많이도 장난스러웠다."
"네 맘대로 판단하지마."
"모르겠다. 하지만 난 너에게 서운했던 적이 많아. 그렇지만 또 한 편으로 고마웠던 적도 많았지. 넌 나보다 높아 보였어."
"어려운 말도 하지마."
"흠! 너하고 멀어질 마음은 없었어. 그냥 곁에 있고 싶어서 네 고백을 받아 들이지 않았을 뿐, 니가 날 예전처럼 대해 줄 때까지 조금 떨어져 있겠다고 생각했을 뿐 다른 이유는 없었어. 근데 이렇게 되어 버렸다."
내가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걸까.
자기들 맘대로 생각하고 행동하고선 어색해 진 이유를 내게서 찾는다.
"승주 오빠."
나보다 한 살 많으니까 오빠라고 불러줘야 겠지?
"응?"
"기분 나빠."
"그래, 기분 나쁘겠지. 시간이 흐르고 곰곰히 생각해 보니까 내가 생각한 것 보다 네가 날 좋아했었다는 걸 알겠더라. 그 고백이 괜히 한 것이 아니라는 걸. 후후, 그래도 너에게 다가갈 자신은 생기지 않더라. 네 생일 날 네가 호출하지 않았다면 찾아 갔을 거야."
진짜 기분 나쁘네요.
나에겐 괴변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습니다.
"말하지 마. 지나간 일이야."
말하지 말랬다고 승주는 한 동안 침묵했습니다.
커피샵 바깥 풍경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한참 만에 승주가 입을 열었습니다.
"오늘 같이 있던 후배에게 미안하네. 나도 너하고 있을 때 몇 번 느꼈었지."
"뭘?"
"나도 녀석이 후배라고 잠시 그 생각을 못했어. 녀석이 네게 좋아하는 마음이 없진 않겠지? 그때도 제법 친하게 보였는데, 일년이 지나고도 계속 같이 있는 걸보면."
"무슨 말이야?"
"훗, 넌 오늘 걔를 보내지 말았어야 했어. 우연히 만난 사람 때문에 같이 있던 사람을 보내 버리면 그 사람은 어떤 기분이겠니? 오늘은 같이 만났어야 했어. 나중에 나를 따로 만나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보내 버리는 건 아니야. 후배가 나에게도 너에게도 기분 나빠 했을 거야. 만약 너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다면 상처 받았을지도 몰라. 니가 그 사람을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렇게 해선 안돼지."
엉? 정말 그렇네요.
어깨가 쳐진 채 돌아 섰던 철수의 모습이 떠 올려 졌습니다.
내가 지금 옛 그리움이나 잡고 있을 때가 아니네요.
예전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의 모습이 조금 가엽습니다.
다시 만나 잠시간의 반가움은 주었지만 떨어져 있었던 일 년이란 시간 속에서 어색하고 평범한 존재로 변해 버린 그는 더 이상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철수 생각만으로도 그는 완전히 한 쪽으로 치워져 버립니다.
단지 철수 생각?
"나 이제 가 볼래."
"나에게 연락하지 않을거지?"
"응. 그냥 잊을래."
"훗,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나 보네? 뭐, 넌 항상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지."
"그런식으로 말하지 마. 지금은 아니지만 난 오랫동안 오빠를 가장 좋아했었어. 그것만 알아 둬. 난 처음 고백에서 퇴짜 맞은거야."
그 말 한마디로 그에게 가졌던 답답함이 조금 풀렸습니다.
승주는 내가 자리에서 일어 섰지만 그대로 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쓸쓸한 미소를 지어 준 채 잘가라는 손짓을 해 주었습니다.
멋있는 척 하기는...
커피샵을 나와서 빠른 걸음을 걸었습니다.
또 모를 답답함이 옵니다.
쓸쓸한 표정으로 앉아 나를 떠나 보낸 승주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철수 그 녀석 때문입니다.
내가 그를 가볍게 생각했나요?
절대 그건 아닌데, 오늘 난 생각없이 철수를 집에 보내 버렸습니다.
승주의 말을 듣고 나니 영 찜찜합니다.
좋아하니까 피했다는 말은 승주보다 철수에게서 먼저 들었습니다.
장난처럼 술기운으로 말한 것이었지만 철수가 한 번 내 뱉은 적이 있는 말입니다.
승주와 오랜 시간 앉아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7시를 갓 넘겼을 뿐입니다.
철수를 다시 만나자.
그렇게 생각하고 철수네 집에다 전화를 했지요.
"여보시오."
아, 또 아버님이시네요.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습니다.
철수가 아직 집에 들어가지 않았을까요.
삐삐를 쳤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야윈 나뭇잎이 기분 좋게 부는 여운 가을 바람에도 불안해 보입니다.
그 밑 벤취에 앉아 철수에게 전화가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전화가 오지 않습니다.
그 곳에서 한 시간 동안 나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초라 하네요.
문득 혼자라고 생각을 하니까 내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껴졌습니다.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이호선 삼성역이나 삼호선 압구정 역입니다.
집으로 가려면 다시 버스를 타야 하지요.
그 이유 때문에 택시를 탄 것이 아닙니다.
혹시 지하철을 타면 철수가 전화하는 것을 받지 못할까 봐 택시를 탔습니다.
집에 들어 와 철수에게 호출을 했지만 전화가 오지 않습니다.
내가 왜 계속 철수에게 호출을 하는지도 의아하지만 이 녀석이 또 전화 한 통 없다는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녀석이 진짜 상처를 받았을까요.
내게 조금이라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면...
한 줌 미소를 지어 봅니다.
그리고 울었습니다.
침대에 앉아 창 밖을 보며 울었습니다.
내 가벼운 말을 듣고 돌아서 가던 철수의 어깨 쳐진 뒷모습과 나를 떠나 보내며 쓸쓸히 웃던 승주의 모습이 동시에 떠올라 울었습니다.
왜 우는지도 모른 채 두 사람 생각이 나 그냥 울었습니다.
울고 나니까 기분이 좀 맑아 지네요.
오늘 승주에게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에게 좀 따뜻한 느낌을 주고 떠나 오는건데, 한 동안 그 사람 때문에 아파하고 눈물 흘린 적이 많은데, 오늘 난 너무 쉽게 그 사람을 떠나 온 것 같습니다.
승주 그 사람 생각을 하다가 또 웃습니다.
내가 집에 가랜다고 아무런 말도 없이 집으로 가 버린 철수 때문에 웃습니다.
어깨가 쳐진 채 돌아 선 철수의 모습이 조금 슬프게 느껴져 웃습니다.
오늘 그린 철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눈물이 맺힌 미소를 지어 봅니다.
내가 오늘 왜 이럴까.
작년 다이어리에서 승주 사진을 꺼내 보았습니다.
그리고 또 울었습니다.
기분 더럽네요.
어머, 내가 철수나 하는 이런 표현을 쓰다니...
이 자식이 왜 전화를 하지 않는거야.
오늘 사주 본 것을 되짚어 봅니다.
믿는 것은 아니지만 내 배우자를 내가 이미 만나 보았다고 했습니다.
누굴까?
철수도 이미 만나 보았다고 했었지요.
그녀석 상대는 누굴까?
지금 난 승주 사진을 들고 철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쒸!
어머, 내가 또 철수나 쓰는 이런 표현을...?
열 번째 호출을 했습니다.
이젠 오기가 생겼습니다.
도저히 못 참겠어요.
새벽에 몰래 집을 나왔습니다.
엄마 차를 몰래 훔쳐 타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곧장 철수 집 앞으로 갔습니다.
내가 왜 이러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냥 철수에게 이기고 싶었을 뿐이라고 변명해 봅니다.
나는 자기 전화를 기다리다 잠도 이루지 못했는데 녀석은 잘 자고 있는지.
후후, 녀석이 오늘 나 때문에 상처받고 불켜진 방에서 잠못 이루고 있을것이라 생각하며 그걸 확인하러 갑니다.
녀석은 그래야만 합니다.
자고 있기만 해 봐라.
나 철수방을 직접 들어 가보진 못했지만 철수 방의 창이 어떤 건지는 알고 있지요.
철수 네 집은 방 하나를 제외하곤 모두 불이 꺼져 있었습니다.
철수 방의 창은 깜깜하네요.
아무래도 런닝 차림으로 배를 내 놓고 잘 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분 나쁘네요.
훗, 저런 녀석 때문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에게 매정함을 보이고 떠나 왔다니, 저 녀석 때문에 그리웠던 사람을 이젠 과거의 사람이라고 한 쪽으로 치워 버렸다니...
연인 사이도 아닌데 이런 생각하는게 좀 우습긴 하지만, 야이 박철수!
내가 네 생각하는 것 반 만큼만이도 내 생각을 해 봐라, 내 당장 달려가 서방님 그런다 씨. 취소!
철수의 방에 불이 켜졌습니다.
그리고 철수가 창 밖을 쳐다 보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아직 자지 않았군요.
하늘에 무슨 그리움이라도 박혔는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고 있습니다.
저 모습을 보니까 오늘 내가 녀석을 생각없이 매정하게 돌려 보냈던 게 마음 아픕니다.
저렇게 깨여 있었으면서 전화를 하지 않았다는 건 마음에 상처를 입었기 때문인가 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조금만이라도 있다면...
녀석은 승주를 닮은 구석이 많습니다.
감싸 주고 싶네요.
날 사랑하냐고 물어 보고 싶습니다.
만약 사랑한다고 대답을 한다면 오늘 내 마음은 키스라도 해주고 싶습니다.
삐삐를 쳤습니다.
깨어 있으니까 전화를 할 것 같습니다.
불러 내서 물어 봐야지요.
울린다.
울린다...
핸드폰을 보고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나 끝내 울리지 않았습니다.
고개를 들어 창을 보니 철수 방의 불이 꺼져 있네요.
조금 아쉽습니다.
그냥 돌아 가야 겠네요.
다음을 기약하지요.
승주 덕에 철수 마음을 조금 헤아려 본 것 같네요.
잘 자라.
승주 나쁘넘,, 나두 은정이누나만큼 이쁜누나랑 서로 마음이 있다면,,
간절히바란다,,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