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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이세상

담아온 글들

연하가......
2005.05.23 10:27

[이현철] 연하가 어때서(30회)

조회 수 479 추천 수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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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의 시작은 지하철에서부터 시작된다.
삼호선에선 그렇게 비좁진 않았으나 2호선에선 장난이 아니었다.
아무리 예쁜 아가씨라도 지하철 내 사람들 틈에 끼이면 보잘것 없는 존재로 변해 버린다.
내 주위에도 그런 여자분들이 많이 보였다.
저렇게 꾸밀려면 바쁜 아침에 시간을 제법 투자했을 터인데, 여지없이 뭉개지고 있다.

엉?
참 우연이다.
창에 손을 짚었다가 저쪽 끝 문 앞에 상을 찌푸리고 있는 낯익은 여인을 보았다.
그 여인도 창을 짚고 사람들이 밀릴 때마다 표정이 안스럽게 변한다.
나 도서관 자리 잡아 주겠다더니, 이제서야 학교를 가나 보다.
누나하고 같은 전철을 타게 되다니 기분이 괜찮다.
누나 등 뒷 쪽에 서 있는 남자들 때문에 누나가 불안해 보였다.
으쒸, 아침 밥 먹은 힘을 사람들 파 헤치고 지나가는 데 모두 소비했다.
한 구역이 지나치는 시간 동안 나는 한 오미터 정도를 전진해 누나 있는 곳 까지 갈 수 있었다.
그리고 누나 뒤에 섰다.
어제 먹은 밥심으로 뒤에 붙어 있던 사람들을 밀치고 조금 여유로운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누나의 머리결 냄새가 좋다.
머리는 감고 다니다 보다.
꽃 냄새 샴푸 향기가 좋다.
누나가 주위의 공간이 갑자기 편히 서 있을 정도가 되자 이상한 듯 뒤를 돌아 보았다.
나는 아주 힘을 쓰고 있기 때문에 죽을 상이겠지?
밀리지 않을려고 졸라 힘 쓰고 있다.

"어? 너."
"헤, 우쒸 밀지 좀 말아요? 누나 안녕."
"교대서 탄거야?"
"예."
"우연이네?"
"그렇네요."

나 지금 말할 힘 없다.
침묵했다.
같은 전철을 탄 것은 우연이지만 내가 누나에게로 온 것은 많은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우연을 인연으로 만드는 내 노력이 가상하지 않나요?
누나가 미소 짓는다.
그렇지만 날 보고 짓는 미소는 아닌 것 같다.

"아, 이제 좀 살 것 같다. 그래 누나를 보호하려는 그 정신 고맙게 생각하마. 이왕 힘 쓰는 거 자리 생길 때까지 계속 힘을 써. 지하철이 비좁을 것 같으면 항상 널 데리고 다녀야겠다. 조그만한게 제법 힘이 있나 봐?"

나 평균 키보다 크다.
결코 조그만 놈이 아니다.
지금 힘을 빼면 누나에게 밀착이 될 것이고 날 믿고 무사태평으로 힘 들이지 않고 서 있는 누나는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로 픽 꼬꾸라 지겠지?
함 해볼까?
말자.
두 손으로 손잡이를 잡고 모진 힘을 쓰고 있는 내 엉덩이에 여러 가지 물건들의 감촉이 지나갔다.
각진 핸드백, 아프다.
이건 여자 손?
고개를 돌려 보니 이상한 변태 같은 자식이 웃고 있다.
이건 남자 엉덩이야 새꺄, 험한 인상으로 답례해 주었다.
엉덩이를 흔들어 보았다.
이건 뭘까?
둥글고 따뜻하다.
또 고개를 돌려 눈으로 확인해 보았다.
어느 여고생 손에 들려진 보온 도시락이 내 엉덩이에 밀착이 되어 있었다.
벌써부터 보온 도시락이 등장했나?
밥 맛 좋게 방귀나 한 방 뀌어 줘야 겠다.
약간 인상을 찌푸리는 내 주위의 사람들.
내는 모른다.
진짜 너무한다.
내가 이렇게 고생하며 자기가 서 있을 공간을 확보해 주었음 뭔가 답례가 있어야 할 것 아닌가?
누나는 자리가 생기자 마자 자기만 홀로 가 앉아 버렸다.

"편해요?"
"응. 넌 계속 서 있어."

사당을 지나니까 서 있기가 한 결 수월해 졌다.
그리고 내리려는 사람들 틈으로 자리가 하나 생겼다.
사람들 타기 전에 거기로 가면 앉을 수 있다.
빈 자리로 갈 수 없었다.
누나가 내 옷자락을 꽉 붙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놔요."
"그냥 여기 서 있어. 나 심심하단 말이야."

자기 때문에 힘 다 빼 버린 나는 심심풀이 땅콩이 되어 자리가 생겨도 그 사람 옆이 아니어서 앉을 수 없었다.

"누나는 어디서 탔어요?"
"삼성역. 너 가방 이리 줘."
"괜찮아요. 책 한 권 들었는데요 뭐."
"기분 풀렸어?"
"내가 언제 기분 나빴었나요?"
"흠. 오늘은 도서관 올거지?"
"그럴게요."

신도림에서 열차를 갈아 탔다.
재수 좋게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달려가 앉으려는 순간 누나의 새침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마워."

우쒸, 내가 앉을 자리란 말이여.
결국 나는 학교까지 서서 갈 수 밖에 없었다.

누나는 학교로 바로 갔고, 나는 수업에 필요한 책을 챙기러 자취방을 들렀다.
심심한데 문이나 한 번 차고 가야겠다.

"쾅!"

듣기 좋다.
종종 누나 방을 지나칠 때마다 현관문에 발길질을 해 보자.

수업이 끝나고 누나가 숫자로 남겨 준 도서관 열람실을 찾아 갔다.
지도 자면서 나만 맨날 잔다고 구박했단 말이지?

모질지 못한 삶 속에서 잊겠다 말하는 것은 차마 잊을 자신이 없어 하는 말입니다.

별 시덥지 않은 소리 써 놓고 있네.
누나의 연습장 한 쪽에는 몇 자 글이 적혀 있었다.
저건 내가 잘하는 짓인데...
옆 자리 누나의 가방을 치우고 앉았다.
시험 기간도 아니고, 공부할 것도 뭔지 모르겠다.
오늘 강의 노트한 것들을 꺼내 훑어 보다가 누나가 하도 일어 나지 않기에 누나 연습장을 빼어 왔다.
답을 달았다.
멋있다.
모진 사람이 어디있겠습니까.
기억되는 사람을 받아 들이는 순간부터 사람은 모질지 못합니다.
근데 누굴 못 잊겠단 거야?
승주씨하고 다시 만날려고 이러나?
누나의 엎드린 모습을 곁눈질 해 보았다.
승주 그 새끼는 안돼, 내가 그 새끼는 방해 할거야.
밤에 누나하고 자취방으로 돌아 오는 길에 팔짱을 끼고 왔다.
누나가 쌩긋 웃고 있다.

"누나."
"왜?"
"승주형하고 만났을 때 기분이 어땠어요?"
"그걸 왜 묻는데?"
"말해 봐요."
"질투하니?"
"진지하게 묻는 겁니다."
"그냥 처음엔 무덤덤했다가 헤어지고 나니까 생각이 또 나더라?"

잊기 힘들겠군.
내가 그 느낌 좀 알지.
내가 정희 누나를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그렇게 보고 싶었던 사람이지만 막상 만나고 나니까 무덤덤했었다.
그렇지만 누나와 헤어지고 집에 돌아 와 만난 반가움과 참아 왔던 그리움으로 밤새 누나 생각만 했던 적이 있다.
또 기분 나쁘다 씨.

"아까 연습장에 써 놓았던 거 승주 형 생각하고 쓴 거야?"
"엉? 그거 봤니? 나도 너 따라 해 봤어. 대상이 누군지는 잘 모르겠다. 꼭 승주를 생각하고 쓴 건 아니야. 너 지금 질투하는 거 맞지?"
"저 진지하게 말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말하니까 더 장난같아 임마."
"누나도 자기가 별로 모질지 못하다고 생각해요?"
"응. 그런 거 같애."
"그럼 모진 척 하지마요. 모질지 못한 사람이 모진 척 하면 안스러워요. 더 초라해 보이구요."
"후훗, 그런 말을 왜 하는데?"
"진지한 척 하려고."
"참 내. 사람이 아무리 장난스러워도 그 내면엔 모두 심각한 고민들과 진지함이 있는 거 알아. 진지한 척 안해도 돼."
"알았어요. 우리 아버지가 누나 한번 데리고 오래요. 우리 아버지 새벽에 잠에서 깨는 것 무지 싫어 하신다고 했죠? 다 일러 줬어요."
"엉? 뭐야?"
"장난이야 장난."
"너 말하지마? 참, 그리고 다음주 화요일이 내 생일인거 알지?"
"그래요?"
"너 작년에 나 잠옷 사주었잖아. 겨울에 입기는 좀 가벼워. 겨울에 입을 만한 걸로 예쁜 거 하나 사와."
"선물은 주는 사람 마음이지."
"그건 평민들이나 하는거구."
"진짜 자기가 공주라고 생각해요?"
"응."
"다음에 성공해서 돈 벌면 성하나 지어 줄게요. 거기서 천년 만년 잠이나 자요. 도서관에서 자지 말고."
"야, 도서관에서 잠시라도 졸지 않는 사람이 어딨냐?"
"일곱 난장이 소개시켜 줄까요?"
"가게에 가서 사과나 사가지고 가자."
"아줌마 독이 든 사과는 없어요?"
"야?"
"공주라며?"


누나 방에서 과일 깎아 먹고 자취방 생활을 시작했다.
겨울 잠옷은 얼마나 할려나?
가을 잠옷 보다는 비싸겠지?
근데 잠옷도 계절따라 입나?
나는 추리닝 하나면 사계절 다 해결되는데...



후후, 철수와 다시 도서관을 다니게 되었어요.
홀로 도서관 열람석에 앉아 있다가 하얀 연습장에 쓴 메모는 아마 시인들이 즐겨 썼던 말일거에요.
내가 승주에게 했던 말 때문에 썼지만 꼭 승주를 생각하고 쓴 건 아닙니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을 난 잊혀지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채 잊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생각 나는 사람들은 지우려고 해도 지워지지 않았어요.
나는 제법 모질다 생각했는데, 가만히 되짚어 보니 그렇지도 못한 거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 지하철에서 철수가 보여준 고마움에 미소가 맺힙니다.
녀석을 잊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시간이 오면 나는 울 것 같습니다.
지금 까지 그와 보낸 시간만으로도 철수는 남 같지 않습니다.
친동생이었다면?
친동생 하기는 싫어요.
순백의 연습장 위에 한 줄로 써 놓은 그 글 밑으로 꿈을 꾸어 봅니다.
하얀 웨딩 드레스...
철수의 손을 잡고 서 있는 내가 모르는 여인.
철수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여인은 나보다 훨씬 예쁠 것 같습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그냥 미소 한번 짓고 연습장에 검은 볼펜 자국들을 휘갈겨 메꿔 갑니다.

철수야 놀자.
공식들로 휘갈기던 연습장에 갑자기 이상한 말을 썼지요.
그래 철수에겐 이말이 어울립니다.
위에 쓴 말은 승주에게 내가 했던 말이 웃겨서 써본 말인거 같습니다.
또 한 동안 철수와는 이 처럼 지내겠지요?
내 방에 들어 온 철수가 빨간 사과를 들고 나를 보며 음흉한 미소를 짓습니다.

"이거 한 입 베고 쓰러져 봐요."
"니가 깎을래?"
"공주 아니네. 공주면 공주가 했던 일은 다 한다 말이야."
"백설 공주 안해. 착한 거 빼고 별 볼일 없는 그런 공주는 하기 싫어.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백설공주, 또 뭐 있니?"
"인어 공주."
"그래 걔들이 예쁘고 착한 거 믿고 남자 잘 만나서 공주 된거지. 걔들이 잘난거 뭐 있어?"
"그럼?"
"차라리 명성황후 할래."
"칼 조봐요."
"왜?"
"내가 일본 사무라이 할테니까. 누나는 의연한 자세로"
"나는 한 나라의 황후다. 니깐 이름없는 칼잡이가 함부로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말이지?"
"진짜 강적이다!"
"그러니까 앞으로 나한테 잘 해."

사과가 맛있네요.
독은 안 들었나 봐요.
철수가 칼을 들고 있는 바람에 빨간 사과를 그냥 한 입 베어 먹었습니다.
철수가 나를 빤히 쳐다 보네요.
나 예쁘지?
녀석과 나는 이런 식으로 또 몇 일을 보내겠지요.
철수와 나를 그린 그림은 내 방 어딘가에 잘 보관해 두었습니다.
어딘지는 비밀이지요.
철수가 다음 날 잠시 자기방으로 와 보라고 해서 갔더니 컴퓨터를 떡 켜 주더군요. 신기했습니다.

"야, 내가 어떻게 저기 있니?"
"스켄했어요. 멋있지?"
"스캔이라니? 그림을 컴퓨터에다 입력시킨거야?"
"그런게 있어요. 스켄해 놓으니까 제법 볼 만하지요?"
"신기하다. 나 유명인인가봐. 컴퓨터에도 뜰 줄이야."

철수가 약간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 봅니다.
알아, 스캔.
그 복사하는 것하고 비슷한거지?
후후, 녀석이 날 좋아하는 것은 맞는데, 어떤 마음을 품고 좋아하는지 아직은 헛갈립니다.
내 생일 때 한 번 확인을 해 봐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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