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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이세상

담아온 글들

연하가......
2006.06.04 11:23

[이현철] 연하가 어때서(3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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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 아침이 좋다.
창을 열고 아침 공기를 마셨다.
장미 나무도 한 번쯤 찬 공기를 마실 필요가 있다.
이른 아침은 아니지만 서리는 창 틀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오늘 제법 춥겠다.
멀리 보이는 학교 분위기는 썰렁하다.
가방을 챙겼다.
아침을 먹었다.
집이었다면 엄마가 차려 주시는 따끈한 밥을 부담없이 많이 먹을 수 있었을 테지만 어떤 여자가 온다고 오늘은 집에 가지 못할 것 같다.

도서관에선 내 자리까지 잡아 논 누나가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내 자리를 왜 잡아 놓았을까?
옆 자리에다 왜 가방을 올려 놓았을까?
사방이 다 빈자리다.
대부분 빈자리지만 그래도 자기 옆 좌석에 가방을 올려 놓은 건 자기는 예쁘기 때문에 남학생 누군가가 앉을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저 공주병을 누가 치료해 주나?
공부하는 누나 옆으로 가 앉았다.
누나 가방을 치우자 그 밑에 뭔가 궁금한 서류 봉투만한 종이 봉투가 놓여져 있었다.
누나는 공부하는 척 나를 쳐다 보지 않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래."

좀 쳐다 봐라.

"누나 가방 가져 가요. 그리고 이 종이 봉투는 뭐야?"
"어제 하나 샀어. 너 가져."
"뭔대?"
"목도리."

내꺼야?
호호.
나 마후라 목도리 있는데... 어제 언제 샀을까?

"승주 형 만났을 때 산거에요?"
"아니, 헤어지고 돌아 오다."
"시장에 떨이로 파는거지?"
"나는 싸구려는 안 사. 어느 옷 점을 지나치다 마네킨 목에 걸려 있는 게 예뻐서 하나 샀어."
"승주형이나 주지?"
"승주보다 너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너 주는거야."
"내가 옷걸이는 좋지, 암. 뜯어 봐도 돼요?"
"그러렴."

후후, 마후라 같은 목도리는 아니지만 제법 좋아 보인다.
음, 올 겨울 목은 따뜻하겠구만.
어울려 보이냐?
당연히 좋은 조화를 이루겠지.

"괜찮아 보여?"
"응, 그런대로."

좀 솔직해라.
졸라 잘 어울려 보이잖아.

"누나는 공부하고 있어요."
"왜? 넌 가방만 던져 놓고 바로 갈려구?"
"도서관 나온 것만도 나에겐 대단한 일이야. 열심히 하고 있어요."

목에 목도리를 감고 도서관에서 정문까지 거만하게 걸었다.
보는 사람들이 너무 없다.
방학이라 학교가 썰렁하다.
어디 사람 많은 곳이 없나 생각하나 전철로 뛰었다.
바로 서울로 갔다.
깜박 잊고 있었다.
오늘 울 동생 원서 넣는 날이다.
기집애가 시험 잘 봤다더니 다른 사람들도 잘 본 모양이다.
특차는 낙방했다.
목도리를 날리며 신사역에서 울 집까지 거의 일키로 미터가 넘는 거리를 뛰었다.

"너 왜 이제와 임마."

계단을 뛰어 올라 가는데 약방에 계시던 울 아버지가 근엄하게 꾸짖었다.

"헥헥, 제 방에 전화 놔주세요. 수희는 원서 넣으러 갔어요?"
"오후에 간단다."
"아 예, 제가 데리고 갔다 오겠습니다."
"그래라. 차 열쇠 내 서제 서람에 있을거다."
"오늘도 제가 기름 넣어야 합니까?"
"당연하지."
"지하철 타고 갔다 오겠습니다."

집에 들어 갔더니 못보던 신발이 있었다.
예쁜 여자 구두.
누구야?
수희 얘가 구두를 샀나?
새 구두는 아니다.

"똑!똑!"
"누구세요?"
"나다."
"어! 오빠 왔어? 들어 와."

동생 방으로 들어 갔다.
저게 오늘 원서 집어 넣는 학생의 자세냐?

"그쪽은 누구세요?"

방에는 여자가 둘이 있었다.
동생 얼굴에 열심히 화장을 해 주고 있는 제법 예쁜 숙녀가 하나 있었다.

"오빠는 얘 모르나? 중,고등학교 때 우리집에 자주 왔었는데. 중학교때도 고등학교 때도 내 단짝이었던 은정이잖아."

은정이?
왜 하필이면 이름이 은정이야.
전에 본 것 같기도 하지만 낯선 얼굴이다.

"안녕하세요? 전 오빠 기억하는데... 서은정입니다."
"아, 네."
"왠 존댓말?"

이것아, 숙녀를 처음 보았을 땐 존댓말을 해야지.
수희 친구면 대학 일년생이거나 아니면 같은 재수생일텐데 은정이라는 애는 제법 성숙한 숙녀의 모습이다.

"하던 일 계속 해요."

화장발이 무섭구나.
방 바닥에 앉아 한참 동안 내 동생이 변신해 가는 모습을 관찰했다.
19살에서 22살로 수수함에서 섹쉬함으로.
저 애가 화장 기술이 제법 있나 보다.

"은정이는 대학생이에요?"
"네. 수희하고 친했는데 작년엔 거의 못만났어요. 올해는 다시 뭉칠려구요."
"얘, 올해도 떨어지면요?"
"오빠!"
"미안. 은정이는 어디 학교 학생이에요?"
"말 놓으세요. 숙대 약학과 95학번입니다."

제법 예의가 바르네.
뭐여, 얘도 약대생이여?

"참 예쁘네요."
"쿠쿠, 오빠한테 안 예뻐 보이는 여자가 있긴 있어?"
"야!"
"오빠 목도리나 좀 풀고 얘기해라."

은정이라는 애가 참 귀엽게 웃는다.

"수희도 참 예쁘잖아요."

헤헤, 자네도 참 예쁘다.
동생 방을 나왔다.
은정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예쁜가?
은정이 누나와 같은 이름에 같은 약대생?
쟤하고 묘한 인연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런가?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 보았다.
목도리를 감은 내 모습이 겨울 나그네에 나오는 강우성 같다.
푸하하!
잘 생겼단 말이지.

식탁에 앉아 라면을 먹었다.
어머니가 끓여 주시는 라면은 참 맛있다.

"이번엔 합격하겠지요?"
"그래야 되는데."
"만약 떨어지면. 지방 쪽으로 내려 보내야 되나?"
"꼭 한의대 갈 필요 있나? 불안해서 어떻게 지방 내려 보내니. 그리고 성적이 아깝잖아. 약대 보낼까?"
"약대요? 쩝."

엄마와 식탁에 앉아 동생의 진로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특차에서 아쉽게 떨어졌으니 합격하겠지?"
"공부 잘하는 애들은 그냥 갈데 많아 좋겠구나 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봐요."
"니가 공부를 조금만 잘했어도 지방쪽으로라도 한의대 넣어 봤을텐데. 그러면 쟤 아무데나 편히 가라고 할수도 있고 말이야."
"수희는 우리집에서 참 귀한 자식이군요."
"원서 넣을 때 따라가?"
"그럴게요. 근데 쟤 자신 있나 봐요. 화장하고 난리도 아니던데?"
"불안하니까 그런거야. 어제 코트하고 겨울 정장한 벌 사줬다."
"나는요?"
"넌 집에 없었잖아."
"너무 하십니다 어머니. 저도 무스탕 같은거 하나 사주면 안될까요?"
"무스탕 같은 소리하고 있네."
"그럼 롱코트라도?"
"다리도 짧은게."
"저 제법 큰 키에요."
"수희 합격하면 고려해 볼게."

미치겠네 진짜.
지이잉!
어랏 삐삐가 왔네.
음성이다.

"야, 너 어디로 사라진거야? 밥 안 먹을거야? 오후에 정희 온다고 했으니까 빨리 연락 해."

아, 맞다.
목도리 자랑하려다 서울까지 왔구나.
전화 해 줘야 겠다.
"나 저녁에 갈게요."
"왜?"
"오늘 동생 원서 넣는대요."
"그래? 따라 갈려구?"
"네. 일 마치고 저녁에 갈게요."
"니 가방은?"
"누나는 가방 두개 들 힘이 없어요?"
"니 가방은 좀 무식하게 생겼잖아."
"야이 씨, 그렇게 살면 말년에 고생해요."
"알았어. 나 오후에 자리 뺄거니까 도서관으로 오지말고 내 방으로 와."
"그러지요. 참, 오늘 누나하고 이름 같은 애가 우리 집에 왔어요. 내 동생 친군데 무지 예뻐요."
"호호, 그래? 원래 은정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다 예뻐."
"걔나 꼬셔 볼까?"
"후후, 또 차일려구?"
"내가 미팅 가서 많이 당했지만 여자한테 차인 적은 없어요."
"그게 차인거지. 니 맘대로 하세요."
"나중에 봐요."
"그래."

원서 넣으러 가는 애가 참 멋을 부렸다.
수희는 어제 산 옷을 입고 아주 숙녀같은 모습으로 방에서 나왔다.

"오빠, 나 예뻐?"
"그런대로."
"솔직히 예쁘지?"
"그런대로."
"그런 우유부단한 성격을 가지면 오빠 애인 못 만든다? 나 화장하니까 연예인같지?"
"그런대로."
"은정이 얘는 예뻐?"
"응, 참 예쁘다."

수희도 예쁘지만 은정이의 모습도 참 예쁘다.
아까 앉아 있을 때는 몰랐는데 서 있으니까 키도 제법 크고 긴 머리칼을 찰랑거는게 상당히 고급스럽게 보였다. 은정이 누나보다 큰 것 같다.
수희보다 한 삼,사 센티미터 커 보인다.
은정이 누나의 외모와 맞 먹을 만한 저 애와 나란히 걷는 모습을 은정이 누나에게 보여주고 싶다.
그러면 누나가 기가 좀 죽겠지?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다.
그렇지만 나도 가능성을 보일 수는 있다.
푸하하, 얘한테 잘해 줘야 겠다.

"수희 넌 키가 얼마야?"
"나? 164정도 돼."
"그럼 친구는 167이나 8정도 되겠다?"
"흠, 169에요."

어휴, 고운 미소가 남자 여럿 잡겠다.

"너 표낸다? 키도 막 가르쳐 주고?"
"응?"

뭘 표낸다는거야?
진짜 지하철 타고 가고 싶었는데, 동생 친구도 같이 간다고 해서 할 수 없이 아버지 차를 빌렸다.
타자마자 계기판에 들어 오는 빨간 불.
기름 넣어라.
울 동생도 상당히 공주 기질이 있는 것 같다.
떡 상석에 앉았다.
"이게 학교냐? 공원이지. 저 병원이라고 적어 놓은 건 꼭 호텔 같다. 공원 앞에 있는 호텔."
"오빠야 동생이 다닐 학교를 그런식으로 말하면 안돼지."
"아직 너네 학교 아니다? 자가용 들어 갈 수 있나? 입장료 받지 않나?"
"들어 가 보자."
"관광하는 셈 치고 들어 가 보지. 돈을 쓸데 없는 데 참 많이 틀어 박았다."
"뭐야?"
"그렇지 않냐? 우리 학교 와 바. 허허 벌판에 참 경제적으로 지어 났다?"
"수원에 있죠?"

동생 친구가 내가 어디 다니고 있는 줄 아나 봐?

"수원 시내에 있으면 내가 말도 안 해. 깡촌이야 깡촌."
"왜 거기로 가셨어요?"
"난 대학로에 있는 줄 알았지."
"울 오빠 좀 바보야."

경쟁율을 별로 높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이 원서 접수 마지막 날은 아니다.
원서 넣을 때 주위 원서 넣는 남학생들이 동생하고 은정이란 애를 힐끔 쳐다 본다.
은정이란 애가 참 예뻐 보이고 동생도 참 예쁜 축에 속해서 그런가 보다.
후후, 그래도 성숙미나 조숙함,
그리고 섹시함에서 은정이 누나에게 못 미치는 것 같다.
은정이란 애는 나하고 사귀면 참 좋을 듯한 나이지만 내 느낌엔 어려만 보인다.
나이든 여자들하고 어울리다 보니까 나도 모르게 그 나이 여자들에게 시선이 맞추어졌나 보다.
나 지금 분명 앞서가고 있다.
은정이란 애가 나랑 무슨 관계라고 이런 생각을 하나?
앞날이 불길하다.

은정이란 애를 집까지 태워 주었다.
아직 해도 지지 않은 이른 시간이지만 내 동생이 걔를 집에다 보내 버렸다.
그 덕에 은정이란 애가 사는 아파트를 알게 되었다.
잠원동이면 우리 동네 근처네. 하기야 수희하고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으니 우리 집하고 멀지 않은 곳에 살았겠지.

"태워줘서 고마워요."
"아, 아네요. 내 동생 때문에 오히려 번거로운 걸음을 했을텐데..."
"다음에 보면 말 놓으세요."

다음에?
그래 동생하고 어울리다 보면 자주 볼 수도 있겠다.
잘 가라.

"오빠 쟤 예쁘지?"

친구가 사라지자 동생은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제법 예쁘네."
"쟤 남자 친구 없거든?"
"그래서?"
"소개시켜 줄까?"
"벌써 소개 받았잖아."
"내가 생각했던 것과 오빠 태도가 다르다?"
"뭘? 니가 생각했던 건 뭔대?"
"헤헤, 빨리 소개시켜줘 언제 날 잡아 좋은 자리 한 번 마련하자. 이럴 줄 알았는데."
"나 많이 가지고 논다 너?"
"쟤가 오빠한테 관심있는 거 모르지?"
"허허, 기분 좋은 말이네. 쟤가 날 언제 봤다구?"
"오빠 상당히 거만하게 나오네? 이런 반응 보이면 안돼는데?"
"왜? 니가 생각한 반응은 또 뭔대?"
"내가 생각한 거? 나한테 관심이 있어? 그럼 이야기 다 끝났네. 당장 사귀자고 연락해 줘라."
"후후, 쟤가 진짜 나에게 관심이 있었어?"
"오빠 쟤 진짜 기억안나?"
"모르겠는데?"
"오빠가 쟤하고 제법 마주쳤는데? 오빠가 내 방 문 함부로 열었다가 나하고 걔하고 속 옷만 입고 있는 걸 본 적도 있고, 오빠가 쟤 여드름도 짜 주었을 걸. 걔 울었던 적도 있잖아. 얼굴에 뽀드락지 난 거 기어이 여드름이라고 우기더니 가만히 있는 애 얼굴 잡고 난리쳤던 거 기억 안나? 오빠 시화 만들어 놓았던 것 중에 쟤가 하나 들고 갔을 걸."
"엉? 걔가 아까 쟤니? 걔는 그렇게 예쁘지 않았는데. 머리도 졸라 짧았고 선 머슴애 같았는데."
"조금 기억이 나니? 내가 친구가 주었다면서 발렌타인 데이 때 초컬릿 준 건 기억나?"
"그게 걔가 준거였니?"
"응. 여자는 변하는 거야."
"몰라. 매치가 안돼. 걔 이름이 은정이었어?"
"너무한다."
"너하고 나하고 자주 보질 못했잖아. 너네들 중학생일 때 난 고등학생이라 바빴고, 나 대학 가서는 니가 바빴으니. 야, 나 이제 대학 4학년이다. 벌써 4-5년 지난 일인데 내가 어떻게 일일히 기억하니."
"그렇다고 이름도 까 먹냐?"
"너 내 친구중에 이름 기억하는 애 있냐?"
"그건 그렇고. 쟤하고 자주 만날 수 있도록 다리 놔 줄까?"
"됐어 임마. 니 걱정이나 해. 아직 합격 발표 안 났어?"
"왠 배짱? 혼자 사는게 적응이 됐나 봐?"

우쒸, 나 좋아 하는 여자들 많아.
은정이 누나, 정희 누나. 다들 나이가 좀 많다는 게 흠이지만...

집에 들어 갔다가 동생 앉혀 놓고 몇 마디 했다.
합격해야지 암.

"실험 할 게 있어서요. 저 이 번주는 자취방에 있어야돼요. 오늘은 수희 때문에 잠깐 올라 온거에요."
"그래. 그럼 넌 가봐."

매정하신 부모님.
뭐 먹을거라도 좀 챙겨 주시지.
저녁만 먹고 집에 올 때 모습 그대로 집을 떠났다.

집 앞에 주차 시켜 놓은 승용차.
저거 탈 사람 없다.
아까, 내 돈 내고 기름 넣은 게 졸라 아까웠다.
아버지 어짜피 출근 하실 때 삼층에서 일층 아니십니까.
푸하하, 내 손에 들려 있는 자동차 키.
바로 차를 타고 안전벨트를 맸다.
부르렁.

자취방 앞에다 차를 주차시켜 놓고 누나 방 창을 보았다.
불이 켜져 있다.
주차 시켜 놓은 차가 좀 불안하다.
괜히 가져 온 것 같다.
아버지가 내일 당장 차 가져 오라고 할 것 같다.
아니 지금 당장 갖다 놓으라고 하실 것도 같다.
내 삐삐 번호 알까?
에이, 모르겠다.

"딩동!"
"누구세요?"

이 목소린 정희누나 목소리?

"접니다. 박철수."

문을 열었다.
반가운 정희 누나의 모습이다.

"오랜만이다 너?"
"그렇죠? 하하."

웃다가 웃음이 싹 가셨다.
정희 누나 뒤에 있는 은정이 누나의 모습이 참 곱지만 어색했다.
테이블 의자에 앉아 있는 은정이 누나 맞은 편에 꼴 보기 싫은 놈이 앉아 있다.
내가 즐겨 앉던 자리에 승주 그 새끼가 앉아 있다.
저 새끼 왜 온 겨.

"어제 보고 또 보죠?"
"네."
"내가 불렀어. 상가에 대해서 아는게 있어야지. 우리 학교 말고 다른 데도 알아 보고 다녔지."

정희 누나가 내 표정을 보더니 말했다.
승주 저 새끼가 뭐 좀 아나?

"상가는 구했어요?"
"쉽게 결정할 일은 아니잖아. 일단 우리 학교 앞에 좋은 상가가 하나 있긴 해. 들어 와서 얘기 해."

누나 침대에 가 앉았다.
승주 저 새끼가 곁눈질 해 나를 쳐다 보았다.
확 들어 누워 버릴까 보다.
그려, 나 이 침대에서 자 보기도 한 사람이여?
부럽냐?

"승주형은 올 해 졸업반이에요?"

이야기 하기 싫었지만 그냥 예의상.

"아니에요. 복학을 애매하게 해서 내 년에 코스모스 졸업할 겁니다."
"아, 네. 전공이 어떻게 되시는데요?"
"도시 공학과에 다녀요."

도시 공학?
도시 공학과에 다니는 새끼가 상가에 대해 뭘 안다고...

"제가 형이 어느 학교 다니는 거 모르거든요? 물어 봐도 돼요?"
"시립대 다녀요."
"부동산 시세 같은 거 잘 아시나 봐요?"
"아니에요. 그냥 뭐."

은정이 누나가 승주 형보다 나쪽을 더 살핀다.
내 말투가 조금 거슬릴거다.

"난 이제 가볼게?"
"그럴래?"

그래 가라 새끼야.
제법 눈치가 있구만.
승주 형은 내가 자리에 앉자, 채 십분이 지나지 않아 일어 서 집에 갈 차비를 했다.
나란 존재가 좀 어색했나?
승주형이 일어 나자 은정이 누나도 따라 일어 섰다.
조심스런 모습이다.
서로 잘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두 사람 사이엔 장난스러움이 없어 보였다.
다소곳하고 수줍어 하는 연인의 모습이다.
부럽다.

"집이 어디신데요?"

내가 왜 물어 봤지?

"왕십리 쪽이라 지금 출발해도 10시 훨씬 넘겨야 집에 들어 갈 거에요."

새끼가 끝까지 존댓말 쓰네.

"정희 누나는 오늘 여기서 잘 거에요?"
"응."
"승주형은 직접 운전해서 온 거에요?"
"하하, 저 자가용 없어요. 전철 타고 가야죠."
"에?"

은정이 누나가 내 손을 잡더니 쿡쿡 찌른다.
맞다, 저 형은 내가 그때 그 삼류영화를 봤던 것을 모르겠지?
그때는 그럼 아버지 차였나?
저 형 태도가 날 어려워 하는 것 같다.
내게 잘못한 거 하나도 없는 자식인데, 내가 너무 쌀쌀맞게 대한 거 같다.
아버지 차도 오늘 밤 여기 두어서는 아니 되겠다 싶다.

"제가 태워 드릴게요."
"엉?"

정희 누나가 날 빤히 쳐다 보며 묻는다.
나도 베스트 드라이버에요.

"너 차가지고 왔니?"
"네. 아무래도 집에 차를 갖다 놔야 겠어요. 저 아버지 차 몰고 왔거든요."
"아, 안 그래도 되요."
"어짜피 가야 돼요. 말도 안하고 가져 온 거라."
"다시 오기 힘들텐데."
"집에 들어 가 자면 돼요."

내가 왜 이럴까.
적과의 동행이다.
은정이 누나의 표정이 별로 좋지 못하다.
억지로 승주 새끼를 차에다 태웠다.
정희 누나는 춥다고 방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은정이 누나는 배웅을 했다.

"조심해서 가."
"알았어요."
"나중에 연락할게."

승주 새끼가 은정이 누나에게 고운 미소를 보냈다.
누나도 그런 미소를 지어 보인다.

"그래. 잘 가."

보조석에 앉혔지만 거의 침묵한 채 서울로 왔다.
왕십리 역 가까이 와서야 몇 마디 나누었다.
승주 형이 질문을 던졌기 때문에 대답을 해 주어야 했다.

"은정이와는 어떻게 알게 됐어요?"
"에? 정희 누나 때문이지만 은정이 누나가 내게 잘못을 했죠. 흙탕물을 튀겼거든요."
"흠, 은정이 좋아해요?"
"에?"
"부러운 모습이네요. 은정이 곁에 철수씨 만큼 자연스러워 보였던 사람이 없었던 것 같아요."
"아, 친한 후배라서 그렇지요 뭐."
"은정이가 철수씨한테는 조금 조심스러워 하더군요."

에?
안 그런데.
자네한테 훨씬 더 조심스럽더만.

"헛! 전혀 아닙니다."
"난 항상 은정이에게 조심스러웠죠. 지금도 자신있게 대할 수 없어요."

그런 말을 내게 왜 하냐.

"너무 소극적이지 마세요."
"흠. 자기 앞에 보이는 모습이 너무 당당하면 그 사람에게 소극적으로 변할수밖엔 없어요. 날 좋아한다면서 내 마음을 참 아프게 했지요."
"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죠? 요즘은 은정이에게서 그 동안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그런 감정을 느껴요."

사랑한다는 말 같은 거 하려구?

"다시 만났으니까 조금 다르겠죠."
"후후, 전에 내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그래도 날 대할 땐 내가 젤 앞이었어요. 그런 것 정도는 느낄 수 있었죠. 근데 요즘 은정이의 모습을 보면 내가 누군가에게 밀려 난 느낌이에요."

무슨 말이야.
무시하자.

"저기 왕십리 역 보이거든요. 어디 세워 드릴까요?"
"제일 가까운 곳에 세워 주세요."
"그러죠."

좋겠다 새꺄.
은정이 누나와 오래 사귄거 자랑하냐?
밀려난 거 같어?
맨날 동생으로만 취급 받는 나는 죽어야 되게?

"태워줘서 편히 왔습니다. 고마워요."
"뭘요."
"훗, 은정이에게 저처럼 그런 모습은 보이지 마세요."
"에?"
"조심해서 가십시오."

내가 니가 했던 그런 삼류 버라어티 쇼를 할 수 있을 것 같냐?

집 앞에다 차를 갖다 놓았다.
지금 시각 열 시 오분.
아슬 아슬 하다.
집으로 들어 갈까.
다시 율전으로 내려 갈까?
쌈쟁이 할머니가 웬 보따리를 들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율전 가자.

신도림 역에서 아슬하게 수원 가는 전차를 잡아 탈수 있었다.
자취방 앞에 도착하니까 11시 50분 가까이 됐다.
늦은 밤이다.
오늘 참 많이 돌아 다닌 거 같다.
피곤하다.
그냥 자야지.

내 방으로 그냥 들어 갈까 하다 은정이 누나 방에 불 빛이 새어 나와서 초인종을 한 번 눌러 보았다.

"누구세요?"
"아직 안 자요?"
"응? 너 다시 내려 온거야?"

그럼 여기 안 오고 이렇게 말할 수 있나?
아무리 내가 거리감 없는 연하지만 그렇게 잠옷을 입고 나와 문을 열면 안돼지.

"정희 누나는요?"
"침대에 있어. 걔 옷차림이 지금 좀 야해."
"후후. 안 자고 뭐했어요?"
"이런 저런 얘기. 들어 올래?"
"들어가도 돼요?"
"허, 니가 그런 말 하니까 좀 우습다. 승주는 잘 갔니?"
"네."
"데려다 줘서 고마워."
"훗, 뭐 둘이 사귄다고 대신 감사하는 거에요?"
"아니 그것보다 오늘 니가 좀 성숙해 보여서."
"하하, 저 원래 성숙해요."
"에그, 칭찬 좀 해주면 도로 돌아오지?"

누나 방에 들어 갔다.
이불을 감싸고 날 빤히 쳐다 보는 정희 누나에게 괜히 장난을 치고 싶었다.

"야, 밤 늦게 숙녀 방을 이렇게 꺼림낌 없이 들어와도 되는거야?"
"여기 누나 방 아니잖아요."

화장 지운 정희 누나의 얼굴을 본 게 얼마만이냐.

"철수야, 차 한잔 끓여 줄까?"
"차 한잔 하고 가도 될까요?"
"그래라."

은정이 누나가 차 끓이는 동안 이불을 감싸고 안은 정희 누나 곁에 앉아 보았다.

"누나 얼만큼 야한 옷차림인데?"
"궁금해?"
"나 같이 반가운 사람이 왔는데도 침대에서 나올 생각을 안했다? 이거 문제 있는데?"

이불을 잡아 당기는 포즈를 취해 보았다.

"난 은정이 하고 틀리다?"
"뭐가?"
"이불 당기면 그 날로 넌 날 책임져야 돼."

그러니까 더 궁금하다.
눈 딱감고 이불을 잡아 당겨 볼까?
지가 야하면 얼마나 야하다구...

"책임질게."
"야!"

잠시간의 어색한 눈이 마주쳤다.
정희 누나가 이불을 꽉 붙들고 있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잡아 당겼는데 이불은 힘없이 내게로 와 버렸다.
누나의 허리 아래까지 이불은 걷어져 버렸다.
"누나 안 추워요?"
"너 죽었어."

그날 밤 참 남사스런 꼴을 봤다.
아무리 입을 게 없다고 저딴 걸 얻어 입었냐.
정희 누나는 씩씩 거리며 침대 속에 있다.
나하고 친한 사이였기 때문에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진 않았다.
이건 비밀인데, 나 어릴적에 엄마 따라 대중탕 갔다가 정희 누나 알몸도 봤다.
뭐 같이 놀았는데...
은정이 누나와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며 키득 거렸다.

"정희 누나가 입고 있는 저거 누나 꺼죠?"
"응."
"저런 거 입고 잤었어요?"
"너 한 번 봤었잖아. 니가 잠옷 사주전에 간 혹 저거 입고 잤었어."
"그게 저거였어요?"
"응."
"참 자연스럽게 말하네요."
"뭐 어때."

고개를 돌렸다.
정희 누나에게 한 마디 하고 싶어서...
정희 누나를 빼꼼히 쳐다 보았다.
속옷 같은 하얀 잠 옷에 정희 누나 진짜 속 옷이 확연이 드러 났었다.
물론 위만 봤지만.

"나이를 생각해라. 까만 브라자 뭐냐. 다 비치더라 다 비쳐."
"너 씨. 내 나이가 어때서?"
"너네 둘인 진짜 친했나 보구나?"

은정이 누나가 날 보며 고운 미소를 보냈다.
지금 상황이 그런 미소 보낼 때가 아니지.
하여튼 나이 많은 여자들은 나이 어린 남자에게 별 조심성이라던지 부끄러워 하는 표정을 잘 보이지 않는다.
서럽다.
내가 정희 누나를 은정이 누나보다 덜 부담스러워 하는 건 아마 사소한 감정 하나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 사소한 감정이다.
그 감정만 없어진다면 은정이 누나에게도 정희 누나에게 하는 것처럼 할 수 있다.
이마가 아니라 입술에 키스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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