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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4.26 19:26

참된 신자의 특징인 온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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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양식(2003. 8. 10.)

참된 신자의 특징인 온유

골3:12

박우택 목사

여러분은 스스로 참된 신자라고 생각하세요? 어떤 사실에 근거하여 여러분은 참된 신자라고 생각하십니까? 또 어떤 사람이 스스로 참된 신자라고 말할 때 그것을 판별할 수 있는 기준점은 무엇일까요? 교회에 다니고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로 그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 사람의 신상명세서의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적힌 것을 보고 알 수 있을까요? 아니면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우리 신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사랑"이나 "용서," "믿음," "의,"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 그리고 습관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아멘"이나 "할렐루야" 등의 용어를 많이 사용하는 것으로 알 수 있을까요? 그래서 이러한 것도 참된 신자를 구분하는 한 방법은 되겠지만 올바른 시금석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제 경험적으로 보면 성경에 나오는 용어들과 신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용어를 제일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 제일 기독교적인 삶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마치 우리 나라에 민주, 자유, 정의를 제일 많이 외치는 사람들이 가장 비민주적이며, 폭력적이고, 권위적이며, 비윤리적인 것과 같이 이율배반적으로 행동하였습니다. 저는 그들을 대할 때마다 사실 구토가 날 지경입니다. 사실 지금 우리 나라 기독교는 그 정체성에서 있어서 심각하게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곳곳에 많은 교회들이 있고,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들이 거의 우리 나라에 있어도 참된 신자의 모습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 참된 신자일까요? 어떤 사람이 참된 신자인지 가장 확실하게 증명해 주는 것은 성령의 인침입니다. 성령의 인치심은 문자 그대로 성령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인하는 도장을 찍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에게 성령의 인치심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인 사실을 확신시켜주는 일을 통하여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내면적이며 주관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내면적이며 주관적인 성령의 인침은 반드시 거기에 합당한 외적인 증거로도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택한 백성으로서 갖추어야 할 인격적인 덕목을 말하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으로 옷입고"(골3:12)라고 하였습니다. 이 본문에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처럼'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거룩하고 사랑받는 자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독특한 삶의 양식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으로 옷입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성령의 관점에서 갈라디아서 5:22-23에서 성령의 거하는 자의 삶의 열매를 설명하면서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삶의 특징들은 참된 신자에 반드시 나타나야 할 부분들입니다. 이러한 참된 신자의 특징들 가운데 오늘은 '온유' 한 부분만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제가 성도의 많은 특징 가운데 유독 온유의 덕목을 맨 먼저 강조하는 것은 우리에게 더 없이 절실한 요구이기 때문입니다.


1. 온유의 의미


그러면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인 거룩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들이 온유해야 한다고 할 때 "온유"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온유함이라는 말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이 용어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는 점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온유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매사에 조용하고 가만히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어떤 문제들을 만날 때마다 나서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온유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질 나쁜 사람들이 부정적이고 악한 말과 행동을 해도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무기력한 것이고 비겁한 것입니다. 온유는 인격의 연약성을 보이거나 비겁함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매사에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비록 불의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참고 견디는 정신이 온유한 마음의 상태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러한 태도는 악을 창궐하게 만들기 때문에 온유한 것처럼 보이지만 악의 방조자요 비겁한 사람입니다. 이것은 모두 온유의 개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는 진리나 힘과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다. 온유는 진리 위에 서 있어야 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진리의 말씀에 따라 목숨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알듯이 순교자들은 거의 온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 문제에 대하여 현실도피적인 비겁함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믿는 바의 진리에 따라서 목숨도 버릴 수 있는 강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온유한 사람들은 나약하고 힘없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모세가 그러하였고, 다윗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적으로 온유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헬라어에서 온유라는 말은 프라우스(ՐՑՁ؅Ւ)라는 말인데, 이 말의 사용 용례를 살펴보면 이 의미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그 인격이 잘 훈련되고 절제되어서 바르게 행동하는 법을 아는 사람들에게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온유를 정의할 때 다른 사람을 대하는 온화한 태도로서 다른 사람들을 사려깊게 대하고, 다른 사람들의 인격적인 권리가 침해받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을 사려깊게 대한다는 것은 부드럽고 상냥하며 예의바르게 대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많은 영어 성경은 이 온유함이라는 단어를 gentleness라는 말로 번역하였습니다. 미국의 필라델피아 제 10장로교회 제임스 보이스 목사님은 온유한 사람을 정의하기를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사랑스럽고 좋은 매너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점잖고 균형잡히고, 훌륭한 행위규범을 알고 있는 신사"라고 하였습니다.


2. 온유한 자의 삶


그러면 우리 신자들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로서 온유해야 한다고 할 때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으로 나타나야 할까요? 가장 우선적으로 예절바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예절, 또는 매너라는 말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만 이 말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사용되는 표현입니다. 온유한 삶은 예절바르고 매너있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저 사람 매너가 있다," "저 사람 신사야"라고 할 때 자기 자신에 대하여 엄격하면서 다른 사람을 친절하고 부드럽게 대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자신에게는 강인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부드럽게 대하는 것이 온유함의 아주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래서 신자들은 신사가 되어야 하고, 부드러우면서 깔끔한 매너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특히 음식을 같이 먹을 때도 신자들은 온유함의 특성 가운데 하나인 예절이 나타나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음식을 먹을 때 게걸스럽고 먹고, 음식찌꺼기를 상위에 함부로 뱉어내어 함께 먹는 사람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것을 보기도 합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사려깊게 배려하는 온유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온유한 삶의 특징은 말씨와 행동에 나타나야 합니다. 만약에 신자들의 말이 거칠고 무례하다면 누가 가까이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이 말을 걸어도 퉁명스러운 말투나 무뚝뚝한 태도를 보인다면 어떻게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겠습니까? 간혹 말을 하면 퉁명스럽고 무뚝뚝하여 말을 붙이기가 어렵고 찬바람이 쌩쌩 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같이 이야기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화를 할 때 생각나는 대로 말하고 그 말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받게될 마음의 상처를 전혀 개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윗사람 아랫사람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하지만 온유한 사람은 말을 할 때 윗사람 아랫사람을 분명히 구분하고, 마땅히 존경할 자를 존경하고 사랑할 자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말하는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고 예의바르고 사려 깊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리고 온유한 삶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일관성있는 원칙을 가지고 대합니다. 악한 행동에 대하여 방관하지 않고, 사회적 약자를 인격적으로 대우합니다. 바로 이러한 경우는 예수님께서 잘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구속사역을 이루실 때 자신을 가리켜 온유하다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1:28-29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온유함은 생애 전체를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위선과 거짓에 대하여서는 회칠한 무덤같다고, 즉 속은 썩고 부패하였으며 겉으로는 멀쩡하게 보이는 위선자라고 하시며 불같이 분노하시고 책망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동시에 병든 자와 가난한 자들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불쌍히 여기시며 인격적으로 대하셨습니다. 반대로 온유하지 못한 사람은 약자를 위하는 것처럼 말은 하지만 야비한 방법으로 깔보고 무시하고, 반대로 가진 자들과 힘있는 자들에게는 간사를 떨며, 아부합니다. 이것은 온유한 자의 삶이 아닙니다.


3. 온유를 실천하는 삶


그러면 자칭 신자라고 하는 우리는 온유할까요? 우리 신자들은 당연히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온유한 태도를 보여야 하지만 말과 행동으로 잘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온유를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 있을까요? 온유를 실천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두 가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는 훈련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기도해야 합니다. 먼저 온유한 삶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습을 올바르게 진단하고 온유의 덕목이 부족하다면 훈련해야 합니다. 온유한 성품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훈련되어야 할 부분입니다. 그런데 간혹 어떤 사람은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나대로 살지"하며 다른 사람보고 알아서 대하라고 반 협박조로 이야기하는가 하면서 자신의 잘못된 태도를 고치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너무 독단적이지 않는가? 여러분의 의견만을 고집하므로 다른 사람의 감정에 무디지 않습니까?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믿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는 흑백논리와 무장되어 자기 생각과 다르면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성격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무례하게 대하거나 지배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훌륭한 매너가 있습니까? 우리는 자신을 먼저 정직하게 진단하고 고쳐야 할 부분을 고쳐야 합니다.


온유한 삶을 실천하는 일에는 부단한 자기와의 싸움이 있어야 하고,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훈련하지 않고 성령을 받으면 저절로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이단의 무리들도 있는데 그것은 성령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훈련하지 않아도 된다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성적인 능력을 주셨을까요? 신자의 삶의 특징가운데 하나인 온유한 삶은 훈련해야 합니다. 훈련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결코 지나치지 않습니다. 벌써 오래 되었습니다. 불과 9일만에 관객 2백만명을 돌파한 영화 「조폭 마누라」를 본 일이 있습니다. 그 영화 안에 지나가는 대사가운데 조폭과 깡패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그 대답은 적절한 영어식 표현이 아닙니다만 "프로패셔내리티"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뜻을 그 영화에서 설명하기를 프로정신이라고 설명하였습니다. 실제로 그 영화에 보면 조폭들이 자신의 몸을 단련하기 위하여 운동기구로 끊임없이 연습하는 대목이 나타납니다. 사회악 가운데 한 집단인 조폭도 조폭답게 행동하려면 연습이 필요하다면, 참된 신자가 되기 위해 삶을 훈련해야 하지 않을까요?


다음으로는 훈련과 함께 나란히 강조되어야 할 대목은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사실 온유한 성품을 기르는데는 새로운 마음을 고쳐먹는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훈련만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연약한 인간 본성만을 깨달을 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안돼"라고 하면서 스스로 인간은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하면서 더 나쁜 상태로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신자다운 삶을 살 수 있도록 새로운 존재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에게 신자다운 삶을 가능하도록 성령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자가 가지고 있는 신분적 기초입니다. 우리가 이 신분됨을 인식하고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할 때 참된 신자의 삶의 덕목인 온유함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우리가 믿는 기독교윤리의 특징적인 부분입니다. 그래서 그가 신자라면 단순히 어떤 요구사항과 긴박한 필요가 있을 때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듬어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성령을 의지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그냥 힘없고 나약한 이미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대하는 온화한 태도를 말하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사려깊게 대하고, 다른 사람들의 인격적인 권리가 침해받지 않도록 주의하는 것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특히 온유한 삶의 특징은 예절바른 생활로 나타나야 하고, 말과 행동에서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그리고 사람들을 대할 때 일관성있는 삶의 태도로 나타나야 한다는 사실을 확인한 바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신자는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사랑스럽고 좋은 매너를 가지고 있어야 하며 점잖고 균형잡히고 훌륭한 행위규범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온유한 삶이 신자의 특징 가운데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이러한 삶을 실천하기 위하여 온유한 성품을 훈련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신자의 존재특성을 인식하고 기도함으로 우리 속에 내주해 계신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온유한 삶의 특성들이 우리 몸에 배이게 해야 합니다. 이러한 온유함의 특징들을 우리의 삶 가운데 드러내므로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이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지를 보여주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출처 : 한샘교회 ( http://hansaem.org/preaches/03/03-08-10.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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