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ncity.org/home2/reads/reads.php?mode=view&item=3전설의 갈색폭격기, 차붐
요즘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국민적인 영웅 대접을 받고 있죠.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곳에서 한국 선수가 통쾌하게 삼진을 잡는 모습을 보면 스트레스가 풀릴 만도 하죠.
만일 그런 박찬호가 야구계의 현실을 비판했다고 해서 야구계에서 제명을 당한 다면? 국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죠. 하지만, 야구로 따지면 사이영상까지 받은 국민적 영웅임에도 축구계에서 징계를 받고 결국 외국으로 떠난 사람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바로 차범근입니다.
어렸을 때, 차범근의 플레이를 직접 볼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그 명성에 차범근이 나오면 축구는 무조건 이기는 줄 알았더랍니다. 그래서, 멕시코 월드컵때 차범근이 나왔음에도 1승도 못 거두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 실망을 많이 했지요. ^^;;
그 당시엔 그냥 차범근이 유명한 선수인 줄로만 알았지, 얼마나 대단했는가는 잘 몰랐습니다. 아마 지금도 축구에 웬만큼 관심이 없으면 자세한 경력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걸로 생각됩니다. 그러니 겨우 나카타 정도의 선수와 비교를 하는 사람도 나오는 거겠죠.
그래서 차범근에 대한 경력을 찾아서 이렇게 올려 봅니다. 아마 보시면 정말 놀라울 정도라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원글은 benign(서형욱)님의 글입니다. 어느 통신사인지 모르겠군요.
77년
대통령배 축구대회(Park's Cup).
말레이지아 전 1:5로 뒤지던 상황.
종료 5분 남겨놓고 4골의 소나기 골.
79년 8월
프랑크 푸르트 입단으로 분데스리가 데뷔
데뷔전 상대는 도르트문트.
스타팅으로 75분까지 뜀. 어씨스트 기록.
최고권위 축구전문지 'KICKER'紙 선정 주간 베스트11.
세번째 경기 슈투트가르트 전.
헤딩으로 승리 결정 골. KICKER지 선정 이주일의 골.
네번째 경기 바이에른 뮌헨 전.
그라보스키 어씨스트로 선취골.
다섯번째 경기 최강호 보루시아MG 전.
한가운데 돌파에 이어 찬 공, 왼쪽 포스트 맞고 골. 선취골. 세경기 연속 골.
이날 KICKER지, 처음으로 <차붐>이라는 단어 씀.
9월
강호 함부르크 전.
페차이의 어씨스트를 받아 강슛. 그라보스키 센터링, 헤딩 슛. 30M 중거리 슛. 첫 해트트릭 기록.
11월
일본의 오데쿠라가 소속된 쾰른 전.
두 동양인의 대결로 관심 집중. 차 선취골, 결승골로 두골 기록. 오쿠데라 헛발질 7번. 차붐 대승.
프랑크푸르트 3:1로 승리.
일간스포츠 톱기사 <차범근 두골! 오쿠데라 누르다> 이때 부터 MBC 차범근 경기 녹화방송 시작. 매주 월요일 밤. 시청률 최고.
80년 3월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1차전.
당시 20세의 나이로 '게르만의 혼'이라 불리던 로타 마테우스(90년 월드컵 MVP), 갈색 폭격기 '차붐' 전담마크 특명. 신문 <마테우스! 차붐을 막아라> 톱기사.
경기 마테우스의 완승. 차붐 속수무책. 2:3 패.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2차전.
역시 마테우스 차붐 전담 마크. 이번엔 마테우스 속수 무책. 차붐 대활약. 우측사이드 마테우스 여유롭게 제치고 어씨스트. 1:0 프랑크푸르트 승리.
차붐, 이날의 선수. 원정팀 득점 우선권으로 프랑크푸르트 창단이후 첫 UEFA컵 우승.
경기 후 신문 마테우스 인터뷰 "나는 아직 어리다. 하지만, 차는 현재 세계 최고 공격수이다."
79~80 시즌
득점 랭킹 7위 랭크. 테레사 수녀와 함께 세계 상승세 베스트 4 선정됨. 세계축구 베스트 11 선정됨. 연봉 독일에서 세번째 액수. 협상 타결.
독일 대표팀 감독 차붐 귀화 추진. 실패.
81년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겔스도프에게 육탄공격 받아 심한 부상. 프랑크푸르트 팬들 레버쿠젠까지 가서 겔스도 프 살해 위협 소동. 경찰 출동.
부상이후 슬럼프. 이때도 역시 한국언론 차범근 씹기 발동. KICKER지 이일로 <한심한 한국인들> 이라는 기사. 곧 슬럼프 회복.
83년
레버쿠젠으로 트레이드. 프랑크푸르트 팬들 울음바다.
85~86 시즌
분데스리가 MVP! 득점 4위.
86년
한국대표팀 선수로 멕시코 월드컵 출전
88년
다시 UEFA컵 출동.
차붐 스페인 에스파뇰을 맞아 극적인 3:3 동점골 터뜨림. 5만 관중 차붐! 환호.
승부차기로 레버쿠젠 역시 팀 창단 이래 처음으로 UEFA컵 우승.
신문 톱기사 <지구 최고의 선수 '차붐'>
KICKER지 <차붐, 팀 창단 첫 UEFA 우승 두번이나 이끌다,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의 영웅이자 분데스리가의 최고스타>
분데스리가 308경기 98골로 외국인 최다출장 최다골 기록
참고로 말씀드리면 당시 분데스리가는 현재 이탈리아의 세리에 A를 능가하는 세계 최고의 리그였고, UEFA 컵은 유럽의 최고 클럽들이 모이는 대회로, 이 대회의 우승은 월드컵 우승보다 더 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걸 차범근은 팀을 옮겨가며 두 번이나 한 거죠.
또 차범근의 득점랭킹이 4~7위 정도인데, 당시 차범근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가 아니라 윙이었습니다. 만일 차범근이 동양인이 아니라 독일인이었으면 마테우스 이상의 인기를 얻었겠죠.
이러한 스포츠영웅이 단지 한국의 축구 현실을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국내에서도 못있고 외국으로 떠돌아야 했다는 사실이 정말 한심하기만 합니다. 아직도 유럽에는 코리아보다 차붐을 먼저 알고, 코리아는 차붐의 나라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그리 인정받지 못했지만, 유소년 축구 육성에 힘쓰는 등, 누구보다도 우리나라 축구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죠.
그러한 사람이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겨우 네델란드전 참패의 주역으로 밖에 인식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와서 이렇게 이런 글을 올려봤습니다. 차범근이 지금 그 당시 독일로 귀화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면, 과연 우리에게 축구팬의 자격이 있을까요?
덧붙임. 최근 스포츠 웹진인 후추에서 차범근에 대한 특집을 마련했더군요. 이 글보다 훨씬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으니 한 번 가보세요.^^
2001.1.17
*출처 : 노말시티 ( http://www.ncity.org/home2/reads/reads.php?mode=view&item=3 )
요즘 박찬호가 메이저리그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국민적인 영웅 대접을 받고 있죠.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곳에서 한국 선수가 통쾌하게 삼진을 잡는 모습을 보면 스트레스가 풀릴 만도 하죠.
만일 그런 박찬호가 야구계의 현실을 비판했다고 해서 야구계에서 제명을 당한 다면? 국민들이 가만히 있지 않겠죠. 하지만, 야구로 따지면 사이영상까지 받은 국민적 영웅임에도 축구계에서 징계를 받고 결국 외국으로 떠난 사람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바로 차범근입니다.
어렸을 때, 차범근의 플레이를 직접 볼 기회는 거의 없었지만, 그 명성에 차범근이 나오면 축구는 무조건 이기는 줄 알았더랍니다. 그래서, 멕시코 월드컵때 차범근이 나왔음에도 1승도 못 거두는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 실망을 많이 했지요. ^^;;
그 당시엔 그냥 차범근이 유명한 선수인 줄로만 알았지, 얼마나 대단했는가는 잘 몰랐습니다. 아마 지금도 축구에 웬만큼 관심이 없으면 자세한 경력은 모르는 사람이 많을 걸로 생각됩니다. 그러니 겨우 나카타 정도의 선수와 비교를 하는 사람도 나오는 거겠죠.
그래서 차범근에 대한 경력을 찾아서 이렇게 올려 봅니다. 아마 보시면 정말 놀라울 정도라는 생각이 드실 겁니다.^^ 원글은 benign(서형욱)님의 글입니다. 어느 통신사인지 모르겠군요.
77년
대통령배 축구대회(Park's Cup).
말레이지아 전 1:5로 뒤지던 상황.
종료 5분 남겨놓고 4골의 소나기 골.
79년 8월
프랑크 푸르트 입단으로 분데스리가 데뷔
데뷔전 상대는 도르트문트.
스타팅으로 75분까지 뜀. 어씨스트 기록.
최고권위 축구전문지 'KICKER'紙 선정 주간 베스트11.
세번째 경기 슈투트가르트 전.
헤딩으로 승리 결정 골. KICKER지 선정 이주일의 골.
네번째 경기 바이에른 뮌헨 전.
그라보스키 어씨스트로 선취골.
다섯번째 경기 최강호 보루시아MG 전.
한가운데 돌파에 이어 찬 공, 왼쪽 포스트 맞고 골. 선취골. 세경기 연속 골.
이날 KICKER지, 처음으로 <차붐>이라는 단어 씀.
9월
강호 함부르크 전.
페차이의 어씨스트를 받아 강슛. 그라보스키 센터링, 헤딩 슛. 30M 중거리 슛. 첫 해트트릭 기록.
11월
일본의 오데쿠라가 소속된 쾰른 전.
두 동양인의 대결로 관심 집중. 차 선취골, 결승골로 두골 기록. 오쿠데라 헛발질 7번. 차붐 대승.
프랑크푸르트 3:1로 승리.
일간스포츠 톱기사 <차범근 두골! 오쿠데라 누르다> 이때 부터 MBC 차범근 경기 녹화방송 시작. 매주 월요일 밤. 시청률 최고.
80년 3월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1차전.
당시 20세의 나이로 '게르만의 혼'이라 불리던 로타 마테우스(90년 월드컵 MVP), 갈색 폭격기 '차붐' 전담마크 특명. 신문 <마테우스! 차붐을 막아라> 톱기사.
경기 마테우스의 완승. 차붐 속수무책. 2:3 패.
UEFA 컵 결승전. 보루시아 MG와 2차전.
역시 마테우스 차붐 전담 마크. 이번엔 마테우스 속수 무책. 차붐 대활약. 우측사이드 마테우스 여유롭게 제치고 어씨스트. 1:0 프랑크푸르트 승리.
차붐, 이날의 선수. 원정팀 득점 우선권으로 프랑크푸르트 창단이후 첫 UEFA컵 우승.
경기 후 신문 마테우스 인터뷰 "나는 아직 어리다. 하지만, 차는 현재 세계 최고 공격수이다."
79~80 시즌
득점 랭킹 7위 랭크. 테레사 수녀와 함께 세계 상승세 베스트 4 선정됨. 세계축구 베스트 11 선정됨. 연봉 독일에서 세번째 액수. 협상 타결.
독일 대표팀 감독 차붐 귀화 추진. 실패.
81년
레버쿠젠과의 경기에서 겔스도프에게 육탄공격 받아 심한 부상. 프랑크푸르트 팬들 레버쿠젠까지 가서 겔스도 프 살해 위협 소동. 경찰 출동.
부상이후 슬럼프. 이때도 역시 한국언론 차범근 씹기 발동. KICKER지 이일로 <한심한 한국인들> 이라는 기사. 곧 슬럼프 회복.
83년
레버쿠젠으로 트레이드. 프랑크푸르트 팬들 울음바다.
85~86 시즌
분데스리가 MVP! 득점 4위.
86년
한국대표팀 선수로 멕시코 월드컵 출전
88년
다시 UEFA컵 출동.
차붐 스페인 에스파뇰을 맞아 극적인 3:3 동점골 터뜨림. 5만 관중 차붐! 환호.
승부차기로 레버쿠젠 역시 팀 창단 이래 처음으로 UEFA컵 우승.
신문 톱기사 <지구 최고의 선수 '차붐'>
KICKER지 <차붐, 팀 창단 첫 UEFA 우승 두번이나 이끌다, 프랑크푸르트와 레버쿠젠의 영웅이자 분데스리가의 최고스타>
분데스리가 308경기 98골로 외국인 최다출장 최다골 기록
참고로 말씀드리면 당시 분데스리가는 현재 이탈리아의 세리에 A를 능가하는 세계 최고의 리그였고, UEFA 컵은 유럽의 최고 클럽들이 모이는 대회로, 이 대회의 우승은 월드컵 우승보다 더 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그걸 차범근은 팀을 옮겨가며 두 번이나 한 거죠.
또 차범근의 득점랭킹이 4~7위 정도인데, 당시 차범근의 포지션은 스트라이커가 아니라 윙이었습니다. 만일 차범근이 동양인이 아니라 독일인이었으면 마테우스 이상의 인기를 얻었겠죠.
이러한 스포츠영웅이 단지 한국의 축구 현실을 비판했다는 이유만으로, 국내에서도 못있고 외국으로 떠돌아야 했다는 사실이 정말 한심하기만 합니다. 아직도 유럽에는 코리아보다 차붐을 먼저 알고, 코리아는 차붐의 나라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감독으로서의 역량은 그리 인정받지 못했지만, 유소년 축구 육성에 힘쓰는 등, 누구보다도 우리나라 축구 발전에 기여한 인물이죠.
그러한 사람이 이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겨우 네델란드전 참패의 주역으로 밖에 인식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와서 이렇게 이런 글을 올려봤습니다. 차범근이 지금 그 당시 독일로 귀화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면, 과연 우리에게 축구팬의 자격이 있을까요?
덧붙임. 최근 스포츠 웹진인 후추에서 차범근에 대한 특집을 마련했더군요. 이 글보다 훨씬 자세한 내용을 볼 수 있으니 한 번 가보세요.^^
2001.1.17
*출처 : 노말시티 ( http://www.ncity.org/home2/reads/reads.php?mode=view&item=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