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코드' 열풍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구교형 목사(ku6699) ku6699@hanmail.net
한 달 전쯤 아주 우연찮은 기회에 친구에게서「다 빈치 코드」(이하 '코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서점가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도무지 처음 듣는 이야기다.
전화를 끊고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니 세상에! 원작 소설은 물론 이 소설에 대한 해설, 사전판 등 관련서적이 5, 6종이 검색되었다. 관심 있던 차에 마침 한 TV 방송국에서 '코드'를 호기심으로 추적하는 프로그램을 한다고 하여 보며 그 열풍을 짐작할 수 있었다.
'코드'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은 이미 많이들 알고 있을 터이니 나는 새삼 다시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사실 이 책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코드' 열풍에서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왜 이 시점에서 이런 단순한 책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으며, 그 폭발적 인기가 주는 의미(교훈)가 무엇인가 숙고하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 이 책 기본 뼈대의 사실성(예수가 결혼해서 그 자손이 현재까지 살고 있다, 성배의 비밀은 막달라 마리아다, 지금까지 교회는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은폐하고 탄압해 왔다 등)은 아주 초보적인 신학적 상식만 갖고 있어도 그저 웃어버리고 말 정도로 유치하고 조잡하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웬 사탄의 자식 같은 놈이 주님과 교회를 난도질하고 있다"며 흥분할 것이 아니라, 그런 황당무계한 내용임에도 (기독교인들까지 포함해서)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의 매력은 무엇인가? 먼저 현대인(특히 젊은이)들의 기본적 정서에 아주 부합하는 형식과 내용을 갖고 있다. 이 책은 무엇보다 호기심과 반항심 많은 현대인(젊은이)들이 전통적인 권위를 파괴하고, 금기에 도전하고 싶은 욕구를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고 있다. 예수의 결혼, 거대종교인 기독교(교회)의 위선과 비밀, 동성애, 창녀의 성화, 여성주의 등 현대인(젊은이)들이 관심가질 만한 권위의 파괴와 금기의 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금기도전의 대리만족이라고 할까.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기독교와 신앙현상이 갖는 극도의 불신감을 표현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아주 공감하며 통쾌해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다 빈치 코드의 비밀'을 어떻게든 감추고 억압하려는 기독교열성분자(교황청, 오푸스 데이)들은 진리와 평화를 말하면서도 진실억압을 위해 암살을 계획하는 예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처럼 그려진다(막 3:1~6). '그래 종교인들이란 음모가가 아니면 이중인격자요, 고집쟁이, 시대착오적인 자들이야.' 반면 전통적인 신앙관이나 교회의 가치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숨겨진 진리를 찾는 자, 진실한 자로 그려진다.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신앙과 교회가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그렇게 위선적으로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황 클레멘트는 CIA 같은 군사 책략을 통해, …무시무시한 교황의 지령이 드러났다. 클레멘트의 편지에는 신이 자신을 찾아와 계시를 내렸는데, 성당기사단이 악마숭배와 동성애, 십자가 모독, 남색, 그 외 불경한 행동의 이단적인 죄들을 범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사들이 사로잡혀 잔인하게 고문당하고, 이단자로서 말뚝에 세워져 화형당했다…."(「다 빈치 코드」247쪽)
중세시대의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된 이런 내용들은 오늘날에도 이방인들에게 한없이 배타적이고 율법주의적인 교회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자연스럽게 이 책에 기록된 많은 다른 근거 없는 기록들마저도 사실인 양 믿게 만든다. 나는 이 책의 진위를 떠나 저자 댄 브라운에게서 다음과 같은 그의 마음을 느낀다.
첫째, 그는 지금의 기독교(교회)가 아주 싫은 사람이다. 무엇보다 현실 기독교의 천박함, 위선, 거짓, 이기주의, 물량주의 등을 끔직스럽게 싫어하는 마음을 느낀다. 또 댄 브라운은 이 책을 통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신앙관)을 거부하고 싶어 한다. 세상의 주인입네 하며 인간보다 위에 앉아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그런 초월자가 아니라, 그저 우리 보통 인간들처럼 결혼해 자식 낳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그런 평범한 신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욕심을 버리고 세상 살아가는 좋은 지혜나 이따금씩 가르쳐 주면 더욱 좋을 그런 신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과 같은 이런 부패하고 위선적이고 권위적인 기독교(교회)는 없어질 것이다.
나는 이 책의 독자들은 은연중에 이러한 저자의 마음에 공감하며 빨려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주요종교성직자들 가운데 목사가 호감도 최하위', '주요종교들 가운데 개신교의 종교 이탈율이 최고인 반면 종교선호도는 최하위'라는 수치가 보여주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코드'가 얼마나 사실성이 결여된 책인가를 신학적으로 밝혀주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생각한다.
'코드'식으로 전통적인 신앙관을 설득력 있게 비판하는 대중서적은 최근만 해도 많이 출간되었다. 「예수는 없다」(오강남, 2001년), 「예수는 신화다」(티모시 프리크, 2002년) 이런 책들에 대응한다고 곧 바로 「예수는 있다」(이국진, 2003년), 「예수는 역사다」(리 스트로벨, 2002년)와 같은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었다.
이와 같이 올해도 역시 '코드'를 제압하려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다 빈치 코드 깨기」(어윈 루처/이하 '깨기')와 「다빈치코드, 진실인가 허구인가 」(행크 헤네크라프)라는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었다. 또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몬트리올 예수'에 대응마로 떠오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같은 것들도 있다.
그러나 난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이런 '깨기'식의 책들로는 결코 기독교 비판적 대중서적들을 온전히 대응할 수 없다. '코드'와 같은 책들은 기독교에 대해 깊은 의식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관심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반면 '깨기'식의 이른바 '대응서적'은 단지 어떠한 경우에도 별로 흔들림이 없는 굳건한 신앙인들에게만 '그러면 그렇지' 하고 안도하게 만드는데 그치고 있다.
'코드'를 읽는 사람들은 신학자가 아니며 신학에는 대개 관심이 없다. 그러나 '깨기'식의 책들은 언제나 대다수 신앙적 회의감을 갖는 사람들은 읽지도 않을 형식으로 신학적 사실성만 강조하며 설득하려고 한다. 이건 '코드'같은 책들이 주는 행간을 읽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결과 '코드' 1, 2권은 한 대형서점 12월 1~3주까지 종합순위 1, 2위를 차지한 반면 「다 빈치 코드 깨기」와 「다 빈치 코드, 진실인가 허구인가 」는 같은 서점, 같은 기간 동안 종합이 아닌 종교부문에서만 '15위, 9위, 12위' 그리고 '23위, 25위, 13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코드'식의 책에 대한 기독교계의 '깨기'식의 대응으로는 언제나 후자의 설득이 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진리(진실)를 움켜쥐고 있으면서도 교회는 세상은커녕 왜 성도들조차 이해시키지 못할까. 단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기독교, 교회)가 믿을 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누차에 걸쳐 바른 말(앎)과 더불어 바른 삶이 함께 가야 할 것을 가르쳤다(마 5:16, 요 13:34, 35, 고전 4:18~20, 약 2:14~17). 그러나 교회는 거대화, 제도화되면서 올바른 삶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에만 집착함으로써(정치적인 이단논쟁, 신학논쟁 등) 민심을 잃어버렸다. 우리가 '코드'식의 책을 진정으로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임기응변이 아니라 저변에서부터의 근본적 자세변화가 있어야 한다.
사실 '코드'류의 책들은 전적으로 교회의 비밀주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소설이다. 성경의 정확무오성, 성경의 생성과정과 성경으로 채택되지 않은 문서들의 존재,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관심 등 교회에서 자상하게 가르칠 수 있는 내용들도 우리는 의심은 물론 언급조차 하지 못하도록 배워왔다. 별 것도 아닌 내용들을 소수 목회자나 신학자들만이 알 수 있는 비밀처럼 독점해 왔고, 그게 자신들의 품위를 지켜주는 대단한 권위처럼 여겨왔다.
그 결과 일반인들은 평소 자신들이 당연한 것처럼 믿어왔던 상식과 조금 별스러운 얘기만 들어도 모든 것이 온통 흔들리고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결국 교회의 비밀주의와 ‘무조건 믿어라’ 식의 맹목적 신앙은 ‘코드’와 같은 또 다른 반대편의 '맹목적 신앙'을 낳았다.
교회가 폐쇄적으로 비밀주의를 고수하는 한 크게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임에도 김용옥, 오강남(「예수는 없다」) 등 상식과 금기를 깨는 약간의 도전만으로도 복음은 온통 의심스러워지게 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세계관적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단지 신학적인 정당성만을 갖고 논쟁을 벌이는데 그런 시도는 처음부터 소득을 얻기 힘든 불리한 싸움에 말려드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 성경, 교회에 대한 신화적(신비적) 비밀주의를 버리고 진리와 사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성실한 의심, 정당한 궁금증을 격려하고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 가령 이 책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마치 비밀인 듯 숨겨져 있는 약간의 사실에 논리적 비약을 거쳐 결국 성경이 신뢰할 수 없는 문서임을 가르친다. "성서는 인간의 작품이란 말일세, 신의 작품이 아니고. 성서는 구름에서 기적적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야. 격동의 시기에 인간들이 만들어낸 역사적인 기록이지. 그리고 그것은 수도 없는 변형과 첨가, 개정 작업을 거치며 진화해 온 것이라네."(「다 빈치 코드」354쪽)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상식 가운데 "성경은 일점일획 모두 성령의 감동을 받았기에 영원불변하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진실과 더불어 오해와 한계를 담고 있다. 즉, 이 말은 기본적으로 모든 성경이 무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당시 배경 속에서 인간의 언어로 취하였기에 불가피한 시대적 제약성마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의 언어라는 제한된 그릇에 담았기에 표현상의 오해, 시대와 문화적인 한계성을 분명히 갖고 있다. 가령 고대 이스라엘과 중동문화의 배경에서 처음 기원한 구약율법이 오늘날에도 문자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만약 성경이 오늘날 쓰여졌다면 그것은 분명 2000~5000년 전의 신구약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변치 않는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 속에서 바른 의미를 찾는 현대적 재해석이 불가피하다. 이걸 억지로 가로막는 한 앞으로 더더욱 경망스러운 예수상(우주인 예수, 동성애자 예수 등)이 나올 것이다. 사실 '예수가 죽지 않았다', '결혼해서 가족을 꾸렸다'는 등의 얘기는 이미 오래된 고전적인 잡음에 불과하지 않은가.
그러나 교회의 개방성, 민주성, 신뢰성 등을 통해 최종적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이단적 사이비 사상은 근절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민심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 불교 오랜 전통의 상징인 조계사가 개축을 하면서 사찰로서의 영성 수행의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인사동이나 탑골공원 등과 연계해 문화체험 코스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외국인이나 일반인들이 친숙하게 찾아올 수 있는 다양한 체험프로그램도 갖추기로 했다. 또 조계종을 이끌고 있는 총무원장을 비롯한 중심적인 승려들이 소년소녀 가장들과 결연을 맺고 연례행사가 아니라 직접 삶의 자리로 찾아가는 활동을 벌이고, 1사찰 1복지시설 결연활동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또 동지를 맞아 여러 사찰들은 팥죽을 끓여 동네주민과 방문객들을 대접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한다. 그런데 교회는 여전히 뾰족 첨탑을 달고 고압적이고 문화이질적인 모습으로 일반인들을 대하기 일쑤니 예수께 다가가기도 전에 우리의 높은 문턱에 막혀 버리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내 말에 의문이 간다면 기독교와 불교를 다룬 영화나 선전, 드라마를 보라. 97년 기독교를 배경으로 만든 코미디 영화 '할렐루야'는 한 청년이 교회를 배경으로 사기 치는 모습을 재미있게 그렸는데, 그 영화에서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매우 이질적인 사람들이거나 겉으로는 좋은 모습으로 치장하지만, 사실상 사기꾼 청년만큼의 순수성도 갖지 못한 사람들로 그려진다. 이와 비슷한 영화라면 2001년 '달마야 놀자'에 이어 올 해 또 개봉된 '달마야 서울 가자'를 들 수 있겠다.
이런 영화에서 나오는 승려들은 뭔가 좀 모자라고 아직도 속세의 때를 완전히 벗지 못한 유치한 모습이지만, 세속인들의 고뇌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함께 어울리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물론 그런 모습은 2003년에 개봉된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 더욱 강조되어 그려진다. 속세와 격리되어 있으면서도 속세의 아픔을 어떻게든 끌어안으려는 불교의 고뇌가 그대로 드러난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동승'(2003년 작), 국제적으로 호평 받은 애니메이션 '오세암'도 불교의 뭔가 신비로우면서도 결코 백성들의 애환을 떠나지 않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요구르트 '불가리스' 선전에서 보이는 큰스님과 동자승의 아름다운 결합도 마찬가지다. 지율스님은 아무도 관심 없는 도롱뇽의 생명을 살리겠다고 벌써 몇 번씩 죽음을 넘나드는 단식을 감행하고 있다. 여름의 대명사 성경학교, 수련회는 온갖 사탕발림으로도 더 이상 사람들을 모으는 게 쉽지 않은 형편이지만, 각 사찰들에서 운영하는 단기출가체험, 일일산사체험, 수행프로그램 등은 불교인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폭넓은 호응을 받고 있다.
한국기독교는 분명 변했다. 한국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주도하고 백성들의 아픈 곳을 찾아가 싸매 주던 이미지는 어느덧 사라지고, 세상의 기득권과 수구주의를 대변하는 모습이 되었다. 한국 불교도 분명 변했다. 1990년대까지 파벌과 이권에 따라 이합집산 하며 국민들의 외면을 받던 한국 불교는 부단한 종단개혁을 통해 새롭게 거듭나 백성들 속으로 파고들어가 폭넓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조용히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민심도 변한 것이다.
'코드'는 티빙의 입을 빌려 성경과 그 기초 위에 세워진 기독교가 왜 믿을만하지 못한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왜곡은 이거라오. 예수가 죽은 지 사백 년이나 지나서 그 위치를 승격시켰기 때문에.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서는 대담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콘스탄티누스는 알고 있었소.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특성을 얘기하는 복음서들은 빼버리고, 그를 신처럼 묘사한 복음서만을 골라 아름답게 윤색했지요. 초기 복음서들은 금지되거나 모아서 불태워졌소."(「다 빈치 코드」359쪽)
나도 위 대목을 아래와 같이 개작하면서 '코드'류의 책들이 주는 의도와 의미, 교훈을 대신하려고 한다.
* 출처 : 뉴스앤조이 ( http://www.newsnjoy.co.kr/news/read.php?idxno=10328 )

한 달 전쯤 아주 우연찮은 기회에 친구에게서「다 빈치 코드」(이하 '코드')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친구의 말을 들어보면 서점가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모양인데 나는 도무지 처음 듣는 이야기다.
전화를 끊고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니 세상에! 원작 소설은 물론 이 소설에 대한 해설, 사전판 등 관련서적이 5, 6종이 검색되었다. 관심 있던 차에 마침 한 TV 방송국에서 '코드'를 호기심으로 추적하는 프로그램을 한다고 하여 보며 그 열풍을 짐작할 수 있었다.
'코드'에서 다루어지는 내용은 이미 많이들 알고 있을 터이니 나는 새삼 다시 언급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사실 이 책 내용이 사실이냐, 아니냐는 '코드' 열풍에서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왜 이 시점에서 이런 단순한 책이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었으며, 그 폭발적 인기가 주는 의미(교훈)가 무엇인가 숙고하는 것이다.
1.「다 빈치 코드」현상의 의미
솔직히 말해 이 책 기본 뼈대의 사실성(예수가 결혼해서 그 자손이 현재까지 살고 있다, 성배의 비밀은 막달라 마리아다, 지금까지 교회는 이러한 역사적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은폐하고 탄압해 왔다 등)은 아주 초보적인 신학적 상식만 갖고 있어도 그저 웃어버리고 말 정도로 유치하고 조잡하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웬 사탄의 자식 같은 놈이 주님과 교회를 난도질하고 있다"며 흥분할 것이 아니라, 그런 황당무계한 내용임에도 (기독교인들까지 포함해서) 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 책의 매력은 무엇인가? 먼저 현대인(특히 젊은이)들의 기본적 정서에 아주 부합하는 형식과 내용을 갖고 있다. 이 책은 무엇보다 호기심과 반항심 많은 현대인(젊은이)들이 전통적인 권위를 파괴하고, 금기에 도전하고 싶은 욕구를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의 형식을 빌려 표현하고 있다. 예수의 결혼, 거대종교인 기독교(교회)의 위선과 비밀, 동성애, 창녀의 성화, 여성주의 등 현대인(젊은이)들이 관심가질 만한 권위의 파괴와 금기의 도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금기도전의 대리만족이라고 할까.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기독교와 신앙현상이 갖는 극도의 불신감을 표현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아주 공감하며 통쾌해한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다 빈치 코드의 비밀'을 어떻게든 감추고 억압하려는 기독교열성분자(교황청, 오푸스 데이)들은 진리와 평화를 말하면서도 진실억압을 위해 암살을 계획하는 예수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처럼 그려진다(막 3:1~6). '그래 종교인들이란 음모가가 아니면 이중인격자요, 고집쟁이, 시대착오적인 자들이야.' 반면 전통적인 신앙관이나 교회의 가치를 의심하는 사람들은 숨겨진 진리를 찾는 자, 진실한 자로 그려진다. 문제는 오늘날 기독교신앙과 교회가 많은 사람들에게 실제로 그렇게 위선적으로 느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황 클레멘트는 CIA 같은 군사 책략을 통해, …무시무시한 교황의 지령이 드러났다. 클레멘트의 편지에는 신이 자신을 찾아와 계시를 내렸는데, 성당기사단이 악마숭배와 동성애, 십자가 모독, 남색, 그 외 불경한 행동의 이단적인 죄들을 범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날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기사들이 사로잡혀 잔인하게 고문당하고, 이단자로서 말뚝에 세워져 화형당했다…."(「다 빈치 코드」247쪽)
중세시대의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기록된 이런 내용들은 오늘날에도 이방인들에게 한없이 배타적이고 율법주의적인 교회의 모습을 연상시키며, 자연스럽게 이 책에 기록된 많은 다른 근거 없는 기록들마저도 사실인 양 믿게 만든다. 나는 이 책의 진위를 떠나 저자 댄 브라운에게서 다음과 같은 그의 마음을 느낀다.
첫째, 그는 지금의 기독교(교회)가 아주 싫은 사람이다. 무엇보다 현실 기독교의 천박함, 위선, 거짓, 이기주의, 물량주의 등을 끔직스럽게 싫어하는 마음을 느낀다. 또 댄 브라운은 이 책을 통해 기독교가 믿는 하나님(신앙관)을 거부하고 싶어 한다. 세상의 주인입네 하며 인간보다 위에 앉아 역사를 좌지우지하는 그런 초월자가 아니라, 그저 우리 보통 인간들처럼 결혼해 자식 낳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그런 평범한 신을 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욕심을 버리고 세상 살아가는 좋은 지혜나 이따금씩 가르쳐 주면 더욱 좋을 그런 신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과 같은 이런 부패하고 위선적이고 권위적인 기독교(교회)는 없어질 것이다.
나는 이 책의 독자들은 은연중에 이러한 저자의 마음에 공감하며 빨려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주요종교성직자들 가운데 목사가 호감도 최하위', '주요종교들 가운데 개신교의 종교 이탈율이 최고인 반면 종교선호도는 최하위'라는 수치가 보여주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코드'가 얼마나 사실성이 결여된 책인가를 신학적으로 밝혀주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다고 생각한다.
2. '다 빈치 코드 깨기'식으로는 '다 빈치 코드' 절대 못 깬다
'코드'식으로 전통적인 신앙관을 설득력 있게 비판하는 대중서적은 최근만 해도 많이 출간되었다. 「예수는 없다」(오강남, 2001년), 「예수는 신화다」(티모시 프리크, 2002년) 이런 책들에 대응한다고 곧 바로 「예수는 있다」(이국진, 2003년), 「예수는 역사다」(리 스트로벨, 2002년)와 같은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었다.
이와 같이 올해도 역시 '코드'를 제압하려는 역사적 사명을 띠고 「다 빈치 코드 깨기」(어윈 루처/이하 '깨기')와 「다빈치코드, 진실인가 허구인가 」(행크 헤네크라프)라는 책들이 잇따라 출간되었다. 또 영화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 '몬트리올 예수'에 대응마로 떠오른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같은 것들도 있다.
그러나 난 단호히 말할 수 있다. 이런 '깨기'식의 책들로는 결코 기독교 비판적 대중서적들을 온전히 대응할 수 없다. '코드'와 같은 책들은 기독교에 대해 깊은 의식이 없어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관심가질 수 있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다. 반면 '깨기'식의 이른바 '대응서적'은 단지 어떠한 경우에도 별로 흔들림이 없는 굳건한 신앙인들에게만 '그러면 그렇지' 하고 안도하게 만드는데 그치고 있다.
'코드'를 읽는 사람들은 신학자가 아니며 신학에는 대개 관심이 없다. 그러나 '깨기'식의 책들은 언제나 대다수 신앙적 회의감을 갖는 사람들은 읽지도 않을 형식으로 신학적 사실성만 강조하며 설득하려고 한다. 이건 '코드'같은 책들이 주는 행간을 읽지 못하는 것이다.
그 결과 '코드' 1, 2권은 한 대형서점 12월 1~3주까지 종합순위 1, 2위를 차지한 반면 「다 빈치 코드 깨기」와 「다 빈치 코드, 진실인가 허구인가 」는 같은 서점, 같은 기간 동안 종합이 아닌 종교부문에서만 '15위, 9위, 12위' 그리고 '23위, 25위, 13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는 '코드'식의 책에 대한 기독교계의 '깨기'식의 대응으로는 언제나 후자의 설득이 패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3. 정말 '다 빈치 코드'를 극복하려면
<진리(진실)를 움켜쥐고 있으면서도 교회는 세상은커녕 왜 성도들조차 이해시키지 못할까. 단적으로 말한다면 우리(기독교, 교회)가 믿을 만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누차에 걸쳐 바른 말(앎)과 더불어 바른 삶이 함께 가야 할 것을 가르쳤다(마 5:16, 요 13:34, 35, 고전 4:18~20, 약 2:14~17). 그러나 교회는 거대화, 제도화되면서 올바른 삶의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에만 집착함으로써(정치적인 이단논쟁, 신학논쟁 등) 민심을 잃어버렸다. 우리가 '코드'식의 책을 진정으로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임기응변이 아니라 저변에서부터의 근본적 자세변화가 있어야 한다.
1) 비밀주의를 걷어치우라
사실 '코드'류의 책들은 전적으로 교회의 비밀주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소설이다. 성경의 정확무오성, 성경의 생성과정과 성경으로 채택되지 않은 문서들의 존재, 예수님의 인성에 대한 관심 등 교회에서 자상하게 가르칠 수 있는 내용들도 우리는 의심은 물론 언급조차 하지 못하도록 배워왔다. 별 것도 아닌 내용들을 소수 목회자나 신학자들만이 알 수 있는 비밀처럼 독점해 왔고, 그게 자신들의 품위를 지켜주는 대단한 권위처럼 여겨왔다.
그 결과 일반인들은 평소 자신들이 당연한 것처럼 믿어왔던 상식과 조금 별스러운 얘기만 들어도 모든 것이 온통 흔들리고 의심스러워지는 것이다. 결국 교회의 비밀주의와 ‘무조건 믿어라’ 식의 맹목적 신앙은 ‘코드’와 같은 또 다른 반대편의 '맹목적 신앙'을 낳았다.
"아가씨, 그때까지 역사에서 예수는 추종자들에게 그저 한 사람의 예언자일 뿐이었다오… 위대하고 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결국 '인간'일 뿐이었지. 죽음을 면할 수 없는."(「다빈치 코드」 357쪽)
교회가 폐쇄적으로 비밀주의를 고수하는 한 크게 새로울 것이 없는 내용임에도 김용옥, 오강남(「예수는 없다」) 등 상식과 금기를 깨는 약간의 도전만으로도 복음은 온통 의심스러워지게 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세계관적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단지 신학적인 정당성만을 갖고 논쟁을 벌이는데 그런 시도는 처음부터 소득을 얻기 힘든 불리한 싸움에 말려드는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 성경, 교회에 대한 신화적(신비적) 비밀주의를 버리고 진리와 사실에 접근할 수 있도록 성실한 의심, 정당한 궁금증을 격려하고 최대한의 호의를 베풀어야 한다. 가령 이 책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마치 비밀인 듯 숨겨져 있는 약간의 사실에 논리적 비약을 거쳐 결국 성경이 신뢰할 수 없는 문서임을 가르친다. "성서는 인간의 작품이란 말일세, 신의 작품이 아니고. 성서는 구름에서 기적적으로 떨어진 것이 아니야. 격동의 시기에 인간들이 만들어낸 역사적인 기록이지. 그리고 그것은 수도 없는 변형과 첨가, 개정 작업을 거치며 진화해 온 것이라네."(「다 빈치 코드」354쪽)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상식 가운데 "성경은 일점일획 모두 성령의 감동을 받았기에 영원불변하다"는 말을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진실과 더불어 오해와 한계를 담고 있다. 즉, 이 말은 기본적으로 모든 성경이 무의미하지 않고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을 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당시 배경 속에서 인간의 언어로 취하였기에 불가피한 시대적 제약성마저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인간의 언어라는 제한된 그릇에 담았기에 표현상의 오해, 시대와 문화적인 한계성을 분명히 갖고 있다. 가령 고대 이스라엘과 중동문화의 배경에서 처음 기원한 구약율법이 오늘날에도 문자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만약 성경이 오늘날 쓰여졌다면 그것은 분명 2000~5000년 전의 신구약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변치 않는 하나님의 본심을 깨닫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변하는 현실 속에서 바른 의미를 찾는 현대적 재해석이 불가피하다. 이걸 억지로 가로막는 한 앞으로 더더욱 경망스러운 예수상(우주인 예수, 동성애자 예수 등)이 나올 것이다. 사실 '예수가 죽지 않았다', '결혼해서 가족을 꾸렸다'는 등의 얘기는 이미 오래된 고전적인 잡음에 불과하지 않은가.
2) 백성들의 마음에 파고들어 민심을 얻어라
그러나 교회의 개방성, 민주성, 신뢰성 등을 통해 최종적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어야만 이단적 사이비 사상은 근절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민심을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 불교 오랜 전통의 상징인 조계사가 개축을 하면서 사찰로서의 영성 수행의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인사동이나 탑골공원 등과 연계해 문화체험 코스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외국인이나 일반인들이 친숙하게 찾아올 수 있는 다양한 체험프로그램도 갖추기로 했다. 또 조계종을 이끌고 있는 총무원장을 비롯한 중심적인 승려들이 소년소녀 가장들과 결연을 맺고 연례행사가 아니라 직접 삶의 자리로 찾아가는 활동을 벌이고, 1사찰 1복지시설 결연활동을 적극 권장하고 있다.
또 동지를 맞아 여러 사찰들은 팥죽을 끓여 동네주민과 방문객들을 대접하는 행사를 벌이기도 한다. 그런데 교회는 여전히 뾰족 첨탑을 달고 고압적이고 문화이질적인 모습으로 일반인들을 대하기 일쑤니 예수께 다가가기도 전에 우리의 높은 문턱에 막혀 버리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내 말에 의문이 간다면 기독교와 불교를 다룬 영화나 선전, 드라마를 보라. 97년 기독교를 배경으로 만든 코미디 영화 '할렐루야'는 한 청년이 교회를 배경으로 사기 치는 모습을 재미있게 그렸는데, 그 영화에서 기독교인들과 목회자들은 세상물정을 모르는 매우 이질적인 사람들이거나 겉으로는 좋은 모습으로 치장하지만, 사실상 사기꾼 청년만큼의 순수성도 갖지 못한 사람들로 그려진다. 이와 비슷한 영화라면 2001년 '달마야 놀자'에 이어 올 해 또 개봉된 '달마야 서울 가자'를 들 수 있겠다.
이런 영화에서 나오는 승려들은 뭔가 좀 모자라고 아직도 속세의 때를 완전히 벗지 못한 유치한 모습이지만, 세속인들의 고뇌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함께 어울리려는 노력을 보이고 있다. 물론 그런 모습은 2003년에 개봉된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에 더욱 강조되어 그려진다. 속세와 격리되어 있으면서도 속세의 아픔을 어떻게든 끌어안으려는 불교의 고뇌가 그대로 드러난다.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동승'(2003년 작), 국제적으로 호평 받은 애니메이션 '오세암'도 불교의 뭔가 신비로우면서도 결코 백성들의 애환을 떠나지 않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요구르트 '불가리스' 선전에서 보이는 큰스님과 동자승의 아름다운 결합도 마찬가지다. 지율스님은 아무도 관심 없는 도롱뇽의 생명을 살리겠다고 벌써 몇 번씩 죽음을 넘나드는 단식을 감행하고 있다. 여름의 대명사 성경학교, 수련회는 온갖 사탕발림으로도 더 이상 사람들을 모으는 게 쉽지 않은 형편이지만, 각 사찰들에서 운영하는 단기출가체험, 일일산사체험, 수행프로그램 등은 불교인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폭넓은 호응을 받고 있다.
한국기독교는 분명 변했다. 한국 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주도하고 백성들의 아픈 곳을 찾아가 싸매 주던 이미지는 어느덧 사라지고, 세상의 기득권과 수구주의를 대변하는 모습이 되었다. 한국 불교도 분명 변했다. 1990년대까지 파벌과 이권에 따라 이합집산 하며 국민들의 외면을 받던 한국 불교는 부단한 종단개혁을 통해 새롭게 거듭나 백성들 속으로 파고들어가 폭넓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조용히 성장하고 있다. 그래서 민심도 변한 것이다.
'코드'는 티빙의 입을 빌려 성경과 그 기초 위에 세워진 기독교가 왜 믿을만하지 못한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왜곡은 이거라오. 예수가 죽은 지 사백 년이나 지나서 그 위치를 승격시켰기 때문에. …역사를 다시 쓰기 위해서는 대담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콘스탄티누스는 알고 있었소.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특성을 얘기하는 복음서들은 빼버리고, 그를 신처럼 묘사한 복음서만을 골라 아름답게 윤색했지요. 초기 복음서들은 금지되거나 모아서 불태워졌소."(「다 빈치 코드」359쪽)
나도 위 대목을 아래와 같이 개작하면서 '코드'류의 책들이 주는 의도와 의미, 교훈을 대신하려고 한다.
"왜곡은 이거라오. 그들('코드'류의 책을 통해 복음과 기독교를 뒤집으려는 사람들)은 기독교가 죽을 쑤며 모든 백성들의 민심을 잃어가는 틈을 타 기독교현상의 불합리한 점들을 폭로함으로써 동시에 모든 복음의 가치 자체도 일거에 믿을 수 없는 허구로 만들어 버렸소. 물론 이러한 왜곡의 밑바탕에는 교회(기독교)의 비밀주의와 민심이반이 숨어 있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마 5:13).
* 출처 : 뉴스앤조이 ( http://www.newsnjoy.co.kr/news/read.php?idxno=1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