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경영연구소」의 공병호 소장이 “한국어가 10년 후에는 쇠퇴하고 영어가 생존 도구가 될것”이라고 주장했더군요. 자기 저서 『10년 후 한국』에 쓴 말인데 〈씨비에스 시사 자키 오늘과 내일〉의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와 가졌던 대담에서 그걸 반복했습니다.
공 소장의 한국어 쇠퇴 주장은 그가 6-7년 전부터 펴온 영어 공용화 주장과 연결됩니다. 한국어가 쇠퇴하니까 영어로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홍콩이나 싱가폴이 중국어와 영어를 나란히 쓰고, 인도가 힌두어와 영어를 공용하는 것처럼, 우리도 한국어와 영어를 나란히 쓰자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어는 정말로 쇠퇴하고 있는 걸까요? 공 소장 주장에서는 한국어 쇠퇴가 영어 공용화의 근거입니다. 영어 공용화를 했는데 한국어가 쇠퇴하지 않으면 꼴이 우스워지잖습니까? 그러니 원인이 사실인지를 먼저 살펴봐야지요.
공 소장이 향후 10년 내에 한국어가 쇠퇴할 것이라고 보는 근거는 세계적으로 '민족어가 쇠퇴 중'이라는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대담에서 공 소장은 프랑스어와 도이치어 같은 민족어가 서양에서 쇠퇴하듯이 동양에서도 한국어가 쇠퇴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공 소장이 말하는 ‘언어가 쇠퇴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 소장에게 “(민족어가) 쇠퇴한다는 이야기는 영어가 사용되는 부분들이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영어 사용이 늘어나면 민족어가 밀려나게 마련인데, 그걸 민족어의 쇠퇴라는 부르는 것이지요.
한국에서 영어 비중이 큰 사실입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영어가 정규 과목이고, 중고등학교에서는 시간이 가장 많은 과목입니다. 대학생의 토플 공부와 직장인의 토익 성적은 취직과 승진을 좌우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한국인들의 엄청난 사교육비의 절반 이상은 영어 공부 비용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그런 현실을 지적하면서 공소장은 말합니다.
“선진이라든지 출세 이런 부분에서 필수적인 도구로 언어를 구사 할 수 있는 능력 같은 부분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해지겠죠. 〔…〕 많이 배우고 국제 사회에 노출이 심한 사람들이 자식들의 선택을 위해 무슨 결정을 내리는가를 보시면 허위의식이 아닌 실질적인 선택을 내리는 것을 우리가 눈치 챌 수 있죠.”
공 소장 말대로 영어가 ‘출세를 위한 필수적인 도구’인 것도 사실이고, 상류층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려고 애쓰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게 곧 한국어의 쇠퇴로 이어질까요? 김 총수도 그 점이 궁금했는지 ‘영어의 필요성이 늘어나는 차원’과 ‘한국어가 쇠퇴한다는 것은 또 다른 얘기’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 소장은 한국어 쇠퇴의 증거를 더 제시합니다.
“소위 한국어라는 그 자체가 지식을 창출하는 기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죠, 다른 창출된 지식을 갖고 유통시키는 정도의 수준이겠죠.”
그래서 공 소장이 말하는 ‘한국어 쇠퇴’는 영어에 밀릴 뿐 아니라 지식 창출 기능이 없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한국어는 새 지식을 창출하지 못하고 다른 언어로 창출된 지식을 번역해 유통시키는 정도의 기능만 갖게 되므로 쇠퇴할 전망이라는 것이지요.
김 총수가 “외래어를 그대로 쓰는, 용어를 한국어로 변화시키지 않고 그것에 해당하는 한국어를 만들지 않는” 현상을 가리키느냐고 묻자, 공 소장은 “우리나라에 쏟아져 나오는 서적의 수만 보시더라도 과거에 비해 번역물이 훨씬 압도되는 그런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건 사뭇 아픈 이야깁니다. 한국어의 지식 창출 기능이 미미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식 창출의 일차적인 책임은 학계에 있겠는데, 그동안 학계는 외국 지식을 번역하는 데에 치중해서 독자적인 지식을 만드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오죽하면 한국 학자들은 외국 학문 소개하면서 구전이나 먹는 ‘지식 중개상’이라고 불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사실 한국어는 문학 부문을 제외한다면 제대로 지식 창출 도구로 쓰여 본 적이 없습니다. 수천 년 구어로 사용됐지만 문자로 정착된 것은 불과 5백50년 전 일인데, 그나마 한문에 밀려서 지식 창출 도구로 쓰이지 못했습니다. 개화되면서 기회를 가질까 싶었는데 나라를 잃는 바람에 일본말에 밀렸습니다. 해방 후에는 서양 지식의 번역 도구로만 사용됐지요. 그러니 한국어의 지식 창출 기능은 ‘없다’라기보다는 인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맞습니다.
어쨌거나 한국어가 영어가 밀릴 뿐 아니라 지식 창출 기능이 ‘떨어진다’는 공 소장의 관찰이 딱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 해도 과연 한국어가 그 때문에 쇠퇴하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공 소장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비약일 뿐 아니라 경험적으로도 오류입니다.
예컨대 공 소장은 프랑스어와 도이치어가 한국어처럼 쇠퇴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프랑스어나 도이치어도 영어에 밀리고 지식 창출 기능이 없어지는 것일까요? 프랑스어나 도이치어가 국제 비지니스 언어로서 영어에 밀린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프랑스에서 프랑스어가 영어에게 밀리고 도이칠란트에서 도이치어가 영어에게 밀린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게다가 프랑스어와 도이치어의 지식 창출 기능이 떨어진다는 주장은 자다가 봉창 뚜들기는 소립니다. 영어가 ‘미개어’ 소리 듣는 동안 그 두 언어는 18-19세기의 서양 합리주의를 태동시켰습니다. 20세기에도 서양 철학의 주류는 이 두 언어권 사상가들에 의해 주도됐습니다. 프로이트, 하버마스, 프롬, 마르쿠제, 알뛰세, 푸꼬, 데리다, 라깡 등은 지식 중개상들 덕분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들입니다.
그런데도 공 소장은 프랑스어와 도이치어가 쇠퇴하고 있답니다. 영어에 밀리지도 않고 지식 창출 기능도 풍부한 프랑스어와 도이치어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쇠퇴하고 있는 중일까요? 그냥 ‘민족어이기 때문에’ 쇠퇴한다는 말밖에는 다른 이유로 제시된 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작 프랑스인들은 공 소장 주장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공 소장이 자유기업센터 소장이던 시절 ‘신유목민주의’로 잘 알려진 쟈끄 아딸리(Jacques Attali)와 대담한 적이 있더군요. 공 소장은 대뜸 “영어가 세계의 공용어로 완전히 자리 잡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질문자가 영어가 세계어이고 프랑스어는 쇠퇴할 것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리가 없는 아딸리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영어가 세계의 공용어로서 세계인이 글을 읽을 때 사용하는 공통적 언어가 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국어를 사용하기를 원하며 영어는 비즈니스를 위한 언어일 뿐입니다. 〔…〕 10년 이내에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자동 번역해 주는 소프트웨어가 개발되리라고 믿으며, 따라서 영어가 완전히 지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0년 내에 영어가 세계어가 되는 대신 자동 번역 소프트웨어가 개발될 것이라는 대답에 공 소장은 머쓱했겠지요. 그래도 공 소장은 포기하지 않고 “프랑스어의 미래도 낙관적으로 보느냐”고 재우쳐 물었습니다. 아딸리는 공 소장의 수준에 맞춰주기 위해서였는지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맥도널드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세계 어디를 가든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맥도널드 햄버거가 인류의 주식이 될 수는 없죠. 사람들은 자신만의 음식을 먹고 싶어 합니다.”
한국 사람의 주식은 밥과 김치와 불고기이며, 프랑스 사람의 주식은 바게뜨와 필레 미뇽입니다. 아무리 미국식 햄버거가 판을 쳐도 그건 간식일 뿐입니다. 음식에도 미국식 세계화가 일어나지 않는 판에 언어의 세계화라는 게 가당한 얘기냐는 겁니다. 영어는 기껏해야 ‘비지니스를 위한 언어’에 불과하다는 거지요. 공 소장의 영어 세계화론과 민족어 쇠퇴론이 한꺼번에 떡이 되는 순간입니다.
한편 한국어처럼 영어에게 밀리면서 지식창출 기능이 별로 없는 언어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일본어입니다. 일본어 국내 상황은 한국어와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한국만큼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교육비의 상당부분이 영어에 들어갑니다. 게다가 일본말도 지식 창출 기능이 거의 없습니다. 서양 지식의 번역/해설어로 주로 쓰이고, 외래어 남발로 치자면 한국어는 저리 가라입니다.
그리고 일본에 철학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유교 사상사에도 중국의 공맹과 정주에 이어 한국의 퇴계와 율곡, 최한기까지 언급되지만 독자적인 체계를 이룬 일본 유학자 이름은 없습니다. 조동일 교수(서울대 국문학)의 『우리 학문의 길』에 보면 일본에는 아예 일본 철학사라는 분야가 없다는군요. 고금을 막론하고 일본어의 지식 창출 기능이 엉망이라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공 소장은 일본어가 쇠퇴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일본인들이 스스로 일본어 쇠퇴를 주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1백50년쯤 전, 메이지유신 직후에 정신없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며 열등감에 젖었던 지식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서양어 중에 하나를 골라서 공식어나 공용어로 쓰자고 했지요.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공용을 주장한 서양어가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프랑스어 공용 주장은 그걸 주장했던 사람들과 함께 무덤으로 가버렸고, 일본은 지금도 민족어인 일본어만 쓰고 있습니다.
공 소장의 주장에 일관성이 없다는 점은 중국어와 아랍어와 스페인어에 대한 그의 견해에도 드러납니다. 이 세 언어는 당연히 민족어이지만 영어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했더군요. 이유는 사용인구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 소장의 ‘민족어 쇠퇴론’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영어 때문에 민족어는 쇠퇴할 것이다. 한국어는 민족어이므로 쇠퇴할 것인데, 영어에 밀리고 지식 창출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어와 도이치어는 영어에 밀리지도 않고 지식 창출 기능도 크지만 그래도 쇠퇴할 것이다. 이유는 따지지 마라. 일본어는 민족어인데다가 한국어처럼 영어에 밀리고 지식 창출 기능도 없지만 그게 쇠퇴할 것인지는 모르겠다. 중국어/아랍어/스페인어는 민족어지만 살아남을 것인데, 이유는 쪽수가 많기 때문이다.”
대입 수험생이 논술고사에서 이런 내용의 답안지를 제출했다면 여러분은 1백점 만점에 몇 점이나 주시겠습니까? 제가 채점자라면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를 선택한데다가(-10), 논리 전개에 일관성이 없고(-15) 주장의 근거까지 박약하다(-15)’는 평가와 함께 60점 정도 줄 수 있습니다.
도대체 60점짜리 주장을 담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김어준 총수가 진행하는 씨비에스 대담 프로그램에 초청을 받는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독자들의 수준이 의심받고 시사 프로그램 격 떨어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10년 내에 영어 세계화가 이뤄지고 민족어들이 쇠퇴할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비영어권 국민이 깡그리 공 소장 생각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아딸리를 비롯한 세계 지성들도 공 소장의 혜안에 감동해서 자발적으로 ‘민족어 버리고 영어 세계화 운동’에 참여하면 됩니다. 그러면 정부들도 국민의 뜻을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영어를 공식어, 혹은 공용어로 채택하겠지요.
그래서 제안 하나 할까요? 공병호 경영연구소의 공 소장이, 경제학 박사이며 소르본느 대학 교수와 미떼랑 대통령 특별보좌관, 유럽부흥개발은행 초대 총재를 역임하고, 아딸리 앤 어쏘시에(Attali & Assocoes) 대표 겸 플레닛 뱅크 총재로 활동 중인 쟈끄 아딸리와 토론으로 맞붙어서 10년 내에 프랑스어가 쇠퇴할 것이라는 주장을 납득시키면 저도 한국어 쇠퇴론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게 좀 어렵겠다고요? 그렇다면 경제학 박사이신 공 소장이,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로 계시면서 한국어의 지식 창출 기능을 높이려고 고군분투하시는 조동일 박사님을 설득해서 한국어는 쇠퇴할 것이므로 쓸데없는 수고하지 마시고, 그 대신 영어 공용화를 위해 함께 일하자고 제안해 보시지요. 조동일 선생님이 공 소장 주장에 동의하시면 저도 기꺼이 대열에 동참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딸리나 조동일을 설득해 내지 못하면, 택도 없이 자극적인 모국어 비하 발언으로 주목 끌어서 60점짜리 책이나 팔아먹으려는 사이비 지식기사 소리를 듣더라도 끽소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계어 영어라면 또 모를까, 민족어 한국어로 글 쓰면서 자꾸 한국어를 비하하는 걸 보면 ‘한국어가 저런 사람 때문에 망가지는구나’ 하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평미레 / www.seoprise.com]
* 출처 : 미디어다음 Agora ( http://agorabbs1.media.daum.net/griffin/do/debate/read?bbsId=D109&articleId=5806&pageIndex=1&searchKey=&searchValue= )
공 소장의 한국어 쇠퇴 주장은 그가 6-7년 전부터 펴온 영어 공용화 주장과 연결됩니다. 한국어가 쇠퇴하니까 영어로 보완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홍콩이나 싱가폴이 중국어와 영어를 나란히 쓰고, 인도가 힌두어와 영어를 공용하는 것처럼, 우리도 한국어와 영어를 나란히 쓰자는 겁니다.
그런데 한국어는 정말로 쇠퇴하고 있는 걸까요? 공 소장 주장에서는 한국어 쇠퇴가 영어 공용화의 근거입니다. 영어 공용화를 했는데 한국어가 쇠퇴하지 않으면 꼴이 우스워지잖습니까? 그러니 원인이 사실인지를 먼저 살펴봐야지요.
공 소장이 향후 10년 내에 한국어가 쇠퇴할 것이라고 보는 근거는 세계적으로 '민족어가 쇠퇴 중'이라는 그의 믿음 때문입니다. 대담에서 공 소장은 프랑스어와 도이치어 같은 민족어가 서양에서 쇠퇴하듯이 동양에서도 한국어가 쇠퇴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공 소장이 말하는 ‘언어가 쇠퇴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볼 필요가 있습니다. 공 소장에게 “(민족어가) 쇠퇴한다는 이야기는 영어가 사용되는 부분들이 점점 늘어날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영어 사용이 늘어나면 민족어가 밀려나게 마련인데, 그걸 민족어의 쇠퇴라는 부르는 것이지요.
한국에서 영어 비중이 큰 사실입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영어가 정규 과목이고, 중고등학교에서는 시간이 가장 많은 과목입니다. 대학생의 토플 공부와 직장인의 토익 성적은 취직과 승진을 좌우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한국인들의 엄청난 사교육비의 절반 이상은 영어 공부 비용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그런 현실을 지적하면서 공소장은 말합니다.
“선진이라든지 출세 이런 부분에서 필수적인 도구로 언어를 구사 할 수 있는 능력 같은 부분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해지겠죠. 〔…〕 많이 배우고 국제 사회에 노출이 심한 사람들이 자식들의 선택을 위해 무슨 결정을 내리는가를 보시면 허위의식이 아닌 실질적인 선택을 내리는 것을 우리가 눈치 챌 수 있죠.”
공 소장 말대로 영어가 ‘출세를 위한 필수적인 도구’인 것도 사실이고, 상류층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려고 애쓰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게 곧 한국어의 쇠퇴로 이어질까요? 김 총수도 그 점이 궁금했는지 ‘영어의 필요성이 늘어나는 차원’과 ‘한국어가 쇠퇴한다는 것은 또 다른 얘기’가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 소장은 한국어 쇠퇴의 증거를 더 제시합니다.
“소위 한국어라는 그 자체가 지식을 창출하는 기능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죠, 다른 창출된 지식을 갖고 유통시키는 정도의 수준이겠죠.”
그래서 공 소장이 말하는 ‘한국어 쇠퇴’는 영어에 밀릴 뿐 아니라 지식 창출 기능이 없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한국어는 새 지식을 창출하지 못하고 다른 언어로 창출된 지식을 번역해 유통시키는 정도의 기능만 갖게 되므로 쇠퇴할 전망이라는 것이지요.
김 총수가 “외래어를 그대로 쓰는, 용어를 한국어로 변화시키지 않고 그것에 해당하는 한국어를 만들지 않는” 현상을 가리키느냐고 묻자, 공 소장은 “우리나라에 쏟아져 나오는 서적의 수만 보시더라도 과거에 비해 번역물이 훨씬 압도되는 그런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이건 사뭇 아픈 이야깁니다. 한국어의 지식 창출 기능이 미미한 것은 사실입니다. 지식 창출의 일차적인 책임은 학계에 있겠는데, 그동안 학계는 외국 지식을 번역하는 데에 치중해서 독자적인 지식을 만드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오죽하면 한국 학자들은 외국 학문 소개하면서 구전이나 먹는 ‘지식 중개상’이라고 불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사실 한국어는 문학 부문을 제외한다면 제대로 지식 창출 도구로 쓰여 본 적이 없습니다. 수천 년 구어로 사용됐지만 문자로 정착된 것은 불과 5백50년 전 일인데, 그나마 한문에 밀려서 지식 창출 도구로 쓰이지 못했습니다. 개화되면서 기회를 가질까 싶었는데 나라를 잃는 바람에 일본말에 밀렸습니다. 해방 후에는 서양 지식의 번역 도구로만 사용됐지요. 그러니 한국어의 지식 창출 기능은 ‘없다’라기보다는 인되지 않았다’고 보아야 맞습니다.
어쨌거나 한국어가 영어가 밀릴 뿐 아니라 지식 창출 기능이 ‘떨어진다’는 공 소장의 관찰이 딱히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게 사실이라 해도 과연 한국어가 그 때문에 쇠퇴하는 걸까요? 결론부터 말하면 공 소장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비약일 뿐 아니라 경험적으로도 오류입니다.
예컨대 공 소장은 프랑스어와 도이치어가 한국어처럼 쇠퇴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프랑스어나 도이치어도 영어에 밀리고 지식 창출 기능이 없어지는 것일까요? 프랑스어나 도이치어가 국제 비지니스 언어로서 영어에 밀린다는 말은 들어봤지만 프랑스에서 프랑스어가 영어에게 밀리고 도이칠란트에서 도이치어가 영어에게 밀린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은 없습니다.
게다가 프랑스어와 도이치어의 지식 창출 기능이 떨어진다는 주장은 자다가 봉창 뚜들기는 소립니다. 영어가 ‘미개어’ 소리 듣는 동안 그 두 언어는 18-19세기의 서양 합리주의를 태동시켰습니다. 20세기에도 서양 철학의 주류는 이 두 언어권 사상가들에 의해 주도됐습니다. 프로이트, 하버마스, 프롬, 마르쿠제, 알뛰세, 푸꼬, 데리다, 라깡 등은 지식 중개상들 덕분에 우리에게도 익숙한 이름들입니다.
그런데도 공 소장은 프랑스어와 도이치어가 쇠퇴하고 있답니다. 영어에 밀리지도 않고 지식 창출 기능도 풍부한 프랑스어와 도이치어는 도대체 무슨 이유로 쇠퇴하고 있는 중일까요? 그냥 ‘민족어이기 때문에’ 쇠퇴한다는 말밖에는 다른 이유로 제시된 게 없습니다.
그렇다면 정작 프랑스인들은 공 소장 주장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공 소장이 자유기업센터 소장이던 시절 ‘신유목민주의’로 잘 알려진 쟈끄 아딸리(Jacques Attali)와 대담한 적이 있더군요. 공 소장은 대뜸 “영어가 세계의 공용어로 완전히 자리 잡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물었습니다. 질문자가 영어가 세계어이고 프랑스어는 쇠퇴할 것이라고 떠들고 다니는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리가 없는 아딸리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영어가 세계의 공용어로서 세계인이 글을 읽을 때 사용하는 공통적 언어가 된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모국어를 사용하기를 원하며 영어는 비즈니스를 위한 언어일 뿐입니다. 〔…〕 10년 이내에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자동 번역해 주는 소프트웨어가 개발되리라고 믿으며, 따라서 영어가 완전히 지배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0년 내에 영어가 세계어가 되는 대신 자동 번역 소프트웨어가 개발될 것이라는 대답에 공 소장은 머쓱했겠지요. 그래도 공 소장은 포기하지 않고 “프랑스어의 미래도 낙관적으로 보느냐”고 재우쳐 물었습니다. 아딸리는 공 소장의 수준에 맞춰주기 위해서였는지 비유로 설명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맥도널드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고 말합니다. 세계 어디를 가든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맥도널드 햄버거가 인류의 주식이 될 수는 없죠. 사람들은 자신만의 음식을 먹고 싶어 합니다.”
한국 사람의 주식은 밥과 김치와 불고기이며, 프랑스 사람의 주식은 바게뜨와 필레 미뇽입니다. 아무리 미국식 햄버거가 판을 쳐도 그건 간식일 뿐입니다. 음식에도 미국식 세계화가 일어나지 않는 판에 언어의 세계화라는 게 가당한 얘기냐는 겁니다. 영어는 기껏해야 ‘비지니스를 위한 언어’에 불과하다는 거지요. 공 소장의 영어 세계화론과 민족어 쇠퇴론이 한꺼번에 떡이 되는 순간입니다.
한편 한국어처럼 영어에게 밀리면서 지식창출 기능이 별로 없는 언어가 또 하나 있습니다. 일본어입니다. 일본어 국내 상황은 한국어와 거의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한국만큼 될지는 모르겠지만 사교육비의 상당부분이 영어에 들어갑니다. 게다가 일본말도 지식 창출 기능이 거의 없습니다. 서양 지식의 번역/해설어로 주로 쓰이고, 외래어 남발로 치자면 한국어는 저리 가라입니다.
그리고 일본에 철학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유교 사상사에도 중국의 공맹과 정주에 이어 한국의 퇴계와 율곡, 최한기까지 언급되지만 독자적인 체계를 이룬 일본 유학자 이름은 없습니다. 조동일 교수(서울대 국문학)의 『우리 학문의 길』에 보면 일본에는 아예 일본 철학사라는 분야가 없다는군요. 고금을 막론하고 일본어의 지식 창출 기능이 엉망이라는 증거입니다. 하지만 공 소장은 일본어가 쇠퇴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일본인들이 스스로 일본어 쇠퇴를 주장한 적이 있었습니다. 1백50년쯤 전, 메이지유신 직후에 정신없이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며 열등감에 젖었던 지식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서양어 중에 하나를 골라서 공식어나 공용어로 쓰자고 했지요.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공용을 주장한 서양어가 영어가 아니라 프랑스어였다는 점입니다. 일본의 프랑스어 공용 주장은 그걸 주장했던 사람들과 함께 무덤으로 가버렸고, 일본은 지금도 민족어인 일본어만 쓰고 있습니다.
공 소장의 주장에 일관성이 없다는 점은 중국어와 아랍어와 스페인어에 대한 그의 견해에도 드러납니다. 이 세 언어는 당연히 민족어이지만 영어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했더군요. 이유는 사용인구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공 소장의 ‘민족어 쇠퇴론’은 이렇게 요약됩니다.
“영어 때문에 민족어는 쇠퇴할 것이다. 한국어는 민족어이므로 쇠퇴할 것인데, 영어에 밀리고 지식 창출 기능이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어와 도이치어는 영어에 밀리지도 않고 지식 창출 기능도 크지만 그래도 쇠퇴할 것이다. 이유는 따지지 마라. 일본어는 민족어인데다가 한국어처럼 영어에 밀리고 지식 창출 기능도 없지만 그게 쇠퇴할 것인지는 모르겠다. 중국어/아랍어/스페인어는 민족어지만 살아남을 것인데, 이유는 쪽수가 많기 때문이다.”
대입 수험생이 논술고사에서 이런 내용의 답안지를 제출했다면 여러분은 1백점 만점에 몇 점이나 주시겠습니까? 제가 채점자라면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를 선택한데다가(-10), 논리 전개에 일관성이 없고(-15) 주장의 근거까지 박약하다(-15)’는 평가와 함께 60점 정도 줄 수 있습니다.
도대체 60점짜리 주장을 담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김어준 총수가 진행하는 씨비에스 대담 프로그램에 초청을 받는 이유를 알 수가 없습니다. 독자들의 수준이 의심받고 시사 프로그램 격 떨어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10년 내에 영어 세계화가 이뤄지고 민족어들이 쇠퇴할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비영어권 국민이 깡그리 공 소장 생각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아딸리를 비롯한 세계 지성들도 공 소장의 혜안에 감동해서 자발적으로 ‘민족어 버리고 영어 세계화 운동’에 참여하면 됩니다. 그러면 정부들도 국민의 뜻을 존중하기 위해서라도 영어를 공식어, 혹은 공용어로 채택하겠지요.
그래서 제안 하나 할까요? 공병호 경영연구소의 공 소장이, 경제학 박사이며 소르본느 대학 교수와 미떼랑 대통령 특별보좌관, 유럽부흥개발은행 초대 총재를 역임하고, 아딸리 앤 어쏘시에(Attali & Assocoes) 대표 겸 플레닛 뱅크 총재로 활동 중인 쟈끄 아딸리와 토론으로 맞붙어서 10년 내에 프랑스어가 쇠퇴할 것이라는 주장을 납득시키면 저도 한국어 쇠퇴론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게 좀 어렵겠다고요? 그렇다면 경제학 박사이신 공 소장이,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로 계시면서 한국어의 지식 창출 기능을 높이려고 고군분투하시는 조동일 박사님을 설득해서 한국어는 쇠퇴할 것이므로 쓸데없는 수고하지 마시고, 그 대신 영어 공용화를 위해 함께 일하자고 제안해 보시지요. 조동일 선생님이 공 소장 주장에 동의하시면 저도 기꺼이 대열에 동참하겠습니다.
그러나 아딸리나 조동일을 설득해 내지 못하면, 택도 없이 자극적인 모국어 비하 발언으로 주목 끌어서 60점짜리 책이나 팔아먹으려는 사이비 지식기사 소리를 듣더라도 끽소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계어 영어라면 또 모를까, 민족어 한국어로 글 쓰면서 자꾸 한국어를 비하하는 걸 보면 ‘한국어가 저런 사람 때문에 망가지는구나’ 하는 결론을 피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평미레 / www.seoprise.com]
* 출처 : 미디어다음 Agora ( http://agorabbs1.media.daum.net/griffin/do/debate/read?bbsId=D109&articleId=5806&pageIndex=1&searchKey=&searchValu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