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가 어때서 16회
아하, 늦 가을 날씨 한 번 좋다.
살갗을 애이는 바람은 냉정한 여인의 뒷모습같아 좋았고, 낡은 잎들만 조금 달고 있는 활엽수의 가지들은 내 모습 같아 좋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비수 같은 하늘은 그 자체로도 환상이다.
은정이 누나 생일날의 날씨라서 한 번 분위기를 잡아 보았다.
아름다운 숙녀라는 말까지 적고 예쁘게 포장된 잠옷 상자를 종이 가방에 넣고 기분 좋게 학교로 갔다.
약대 근처 이과대와 농대 주위를 다 뒤졌지만 누나의 차가 없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그 비싼 헨드폰에다 전화를 해 보았지만 받지를 않는다.
"에이, 꼭 찾으면 없어요. 누나 생일 축하 해요. 푸하하!"
다섯 번째도 그냥 끊을려다 음성 하나 남겨 주었다.
수업도 끝이 나고 늦은 오후가 되었지만 누나는 발견 할 수 없었다.
동아리 방에는 늙어 보이는 후배들만 보이길래 얼른 도망 나왔다.
저것들이 밥 사주라고 하면 낭패기 때문이다.
선배체면에 잠옷 산 바람에 돈 없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잠옷이 든 종이 가방, 당구장에서 뺏길 뻔 했다.
그냥 치자고 할 때는 언제고, 게임비 물리니까 돈 되는 것은 다 내놓고 가란다.
삭막한 놈들이다.
그러니까 니네들은 공돌이 수준을 못 벗어나는거야.
오늘따라 방 청소가 하고 싶었다.
깨끗하게 부는 가을 바람 때문이었으리라.
밤은 깊어 가지만 내 방은 깨끗해져 가고 있다.
방 바닥을 깨끗이 닦았다.
오늘 아침에 본 가을 하늘 같다.
창을 열고 싸늘한 밤 바람을 맞았다.
공기 한 번 좋다.
바람 부는 그 깨끗한 방바닥에서 금방 삶은 따끈한 강냉이 두개를 먹었다.
전원 생활의 낭만이다.
그렇다고 내가 여기 내려 온 것을 좋아할쏘냐.
천만의 말씀이다.
서울 가고 싶다 씨.
졸라 심심하다.
호랑이 인형을 발 받침대로 쓰고 푹신한 베개를 벤 채 침대에 누웠다.
발이 편해야 잠이 잘 오지 암.
앞으로 인형은 발 받침대다.
누나는 오늘 학교를 나오지 않은 것 같다.
만날 사람이 많아서 아침부터 바빴나 보다.
부럽다.
내 생일 때는 동아리에서도 챙겨 주는 사람이 없다.
시험 기간이라서.
하기야 지금도 시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지만, 그래도 시험 기간은 아니다.
아까 동아리 방 칠판에 보니까 오늘이 은정이 누나 생일이라는 것을 누가 적어 놓았더라.
챙겨 주는 사람들 많은 은정이 누나는 좋겠다.
잠이 들 찰나였다.
12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딩동."
"누구세요?"
대답이 없다.
겁이 조금 났지만 예전 만큼은 아니다.
강냉이 서리 하면서 내 담력이 많이 세졌다.
"딩동!"
"에이씨, 이런 야심한 시간에 누구야?"
"똑똑!"
누구야 진짜.
문을 열어 보았다.
"안녕, 헤헤."
좌우로 흔들리는 은정이 누나가 나를 보자 씩 웃었다.
그리고 그냥 내 방으로 들어 왔다.
약간 당황이 되어 말 문이 막혔다.
술냄새가 난다.
얼굴이 불그스럼하다.
그렇지만 술취한 행동을 보이진 않는다.
오늘이 지 생일이었다고 옷차림이 멋있다.
최신 유행하는 검은 스타킹과 약간 짧은 검정 스컷이 잘 어울린다.
스카프와 실크 브라우스가 멋있다.
멋있는 옷차림은 흩어 지지 않고 단정했다.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고 내 방으로 들어 선 누나는 나를 보고 씩 웃고는 쟈켓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스카프도 가지런히 걸어 놓는다.
차라도 한 잔 하러온 걸까?
"누나, 이런 늦은 시간에 여긴 왜 왔어요?"
"응? 으응..."
날 보며 실실 웃던 누나가 침대에 덜썩 앉았다.
아니 저 모습은?
에로 영화에서 자주 보던 장면이다.
치마 조금 올려 스타킹 말아 내리기.
졸라 섹시했다.
오늘도 장난치는 것일까?
지 생일이라서 순진한 내게 장난치는 것이라면 눈을 돌리기 보단 빤히 쳐다 봐야 된다.
그래서 빤히 쳐다 보았다.
검은 스타킹 속에는 곱고 하얀 누나의 다리가 있었다.
뭐하는 거야 씨.
스타킹 두짝을 다 벗은 누나는 그냥 침대에 몸을 누이고 이불을 덮었다.
"누나 지금 뭐하는 거야?"
"음냐."
장난인 것 같아서 한 참을 옆에 서 있었다.
오랜 시간 누나는 자는 척 했다.
누나에게 다가가 볼을 찔러 보았다.
우쒸, 진짜 잔다 이거!
이건 나를 믿기 보다는 나를 무시하는 행동이다.
새벽이다.
나는 방 바닥에 이불을 깔고 호랑이를 베고 누워 있다.
내 침대를 어떤 아름답고 선녀같고 또 섹쉬하고 마음씨 고운 여자가 술을 먹고 꼬장을 부린건지, 장난으로 하는 짓인지 모르겠지만 당당하게 뺏어 갔다.
억울하다.
잠을 청하려다 도저히 분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누나가 장난치는 거 같다.
불을 켜 보았다.
누나의 고운 다리 하나가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
누나는 한쪽으로 돌아 누워서는 이불을 감고 잠이 들어 있었다.
진짜 잠이 든 것이 맞는 거 같다.
화장을 지우지 않은 옆으로 돌아 누운 그녀의 얼굴이 측은하다.
측은해 보였던 것은 돌아 누운 누나의 얼굴 모양새가 밝지 못했고, 눈에 눈물이 새고 있었기 때문.
오늘 무슨 일 있었나?
대단해 보이던 사람이라도 누나와 같이 있을 때 보면 별거 아닌 것 처럼 된다.
조금 불안해 보일 때가 있으나 누나는 상처를 주는 쪽이지, 받는 쪽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누나의 지금 표정은 왠지 상처 받은 모습이다.
흠, 내가 마로니에 공원 얘기를 자주 하는 것은 어릴 때 본 영화 때문이다.
겨울 나그네였다.
아마 명륜동 그 학교가 배경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말고... 거기 보면 마후라, 그러니까 목도리지.
그걸 메고 눈을 맞는 주인공의 모습은 더없이 멋있어 보였다.
자전거에 걸려 넘어 진 여자 주인공의 겨울 모습에도 분명 목도리가 있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냐 하면 침대에 누워 있는 누나의 모습이 거기 나온 여자 주인공이 그 누군가를 그리워 할 때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누나를 바로 눕혀 주었다.
이불도 바로 덮어 주었다.
이 여자가 진짜.
누나는 자꾸 돌아 누우며 이불을 감아 한쪽으로 안았다.
나 지금 전공책에 수건 말아 베개로 사용하고 있다.
혹시나 해서 누나에게 호랑이를 줘 보았다.
그러자 누나는 이불을 감지 않고 대신 인형을 안았다.
누나가 이불을 바로 덮고 자게 하기 위해서 나는 그나마 베개 대용으로 남아 있던 것까지 뺏겼다.
내 방에 여자가 자고 있기 때문에 빨리 잠이 들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정신 없이 지나쳤다.
조금 야한 생각도 해 보았다.
여자가 깊이 잠 들었을 때, 가슴을 만지면 반응을 보일까.
잠시 동안만 했다.
나를 이상한 놈으로 생각지는 말기를...
침대 옆 방바닥에 누워 이 여자가 왜 여길 왔을까,란 생각으로 빨리 잠이 들지 못했다.
그래도 분명 잠이 들었었다.
그런데 씨.
"우욱!"
잘 자던 나는 봉변을 당했다.
누가 내 배를 사정없이 밟았다.
"누구 있어요?"
뭐야?
"발 좀 치워요. 아파요."
"누구?"
"누구긴 이 방 주인이지."
"철수? 철수니?"
"네. 발 좀 치워요."
"니가 여긴 왜 있는거야?"
"내 방이라니까."
"엉?"
누나는 놀란 음성이다.
"왜 깼어요?"
"내가 왜 니 방에 있는거니?"
"씨, 지 발로 떳떳하게 찾아 왔을 때는 언제고..."
"내가 찾아 왔어? 너 아무짓도 안 했지?"
"물에 빠진 놈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 찾아 내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게 아니구만."
"뭐야? 불 좀 켜 봐."
"자다가 중간에 깨면 배 고픈데 씨."
불을 켜 주었다.
누나는 자기 옷 모양을 바로 하면서 밝은 불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니 방을 찾아 왔구나."
방 주위를 살피더니 인정을 하는 듯 차분한 음성이다.
"진짜 술 취했던 거에요?"
"응. 아직 머리가 아파. 니 방을 찾아 와서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에요. 술 취해 남자 방 찾아 온 게 다행이야?"
누나는 머리가 아픈지 상을 찡그렸지만 나에게는 미소를 보여 주었다.
"니 생각이 났었나 보다. 넌 내가 믿잖아."
"참 내, 어제 생일이었다면서 누가 챙겨 주지 않던가요? 생일 파티하면서 술을 제법 많이 마셨나 보네?"
"나 어제 혼자 술 마셨어."
"에? 그 많던 남자들이 아무도 안 챙겨 주던가요? 맞다, 그 승주라는 사람도
안 챙겨 줬어요?"
누나의 표정이 밝지 못하다.
승주 그 사람 애기를 하자 그나마 짓고 있던 미소도 가셨다.
"나 이제 잊을거야. 진짜 다시는 생각하지 않을거야."
"무슨 말이에요?"
"내 생일 챙겨주려는 많은 사람들 다 물리치고 그 사람 혼자를 기다렸는데, 근데...주위에 여러 사람 있는 것 보다 필요한 한 사람 있는게 낫다고 생각했었는데..."
누나가 갑자기 왈칵 눈물을 쏟아 냈다.
우쒸, 나는 여자가 울면 마음이 아프다.
동생하고 말다툼 하다가도 걔가 울려고 하면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빈다.
여자가 울면 당혹스럽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기 때문, 그리고 여자가 우는 모습은 이유없이 슬프다.
누나는 제법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난 그냥 내 자던 자리에 앉아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왜? 그 사람이 약속 잡아 놓고 나오지 않았던가요?"
"아니야, 그 사람 삐삐에 음성만 남기고 기다렸어. 헨드폰도 꺼두고 그냥 기다렸지. 그 사람이 수원 오면 간혹 같이 갔던 카페에서 마냥 기다렸어. 혹시 내게 음성이 들어 왔을까 확인은 했지만 그 사람 목소리가 없어서, 오겠지 하고 그냥 기다렸어. 흠, 네 목소리 들었어. 고마워."
"못 들을 수도 있잖아요."
"열 번 가까이 남겼는 걸. 나 어제 양주 한 병을 다 마셨다? 비싼 거 마셨어. 기분이 엉망이었거든."
"에? 뭐 마셨는데?"
"발렌타인 21년산. 작은 거였지만..."
"그 독한 걸 다 마셨어요?"
"응."
"가만, 여기 올 때 뭐타고 왔어요?"
"운전하고 왔어."
"엉? 그럼 음주 운전이잖아. 이 여자가 사고 났으면 어떡했을라고... 그리고
술 먹는데 가면서 운전을 하고 가?"
"처음엔 커피 마셨어. 술은 속상해서 마셨다."
"얼마나 있었어요?"
"오후 한 시부터 밤 11시까지. 나 어제 무서웠어."
"뭐가?"
"어떤 남자가 내게 자꾸 추근 됐거든. 난 술에 취해 갔구, 취한 정신에 그 남자를 따라 갈 뻔 했어. 진짜 따라 갈 뻔 했어. 그 사람이 내 다리를 만지고 입술에 키스 하려고 해도 별 거부 반응을 보이지 못했었어."
"뭐에요? 이 여자가 진짜. 자기 몸뚱아리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그래, 내가 모르는 남자에게 어디로 끌려 갈지도 모르는데,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그런 나를 외면하고 어디서 무얼 하는 지 나타나지 않았어. 화가 났어. 그 자식 때문에 화가 나니까 정신이 들더라. 그리고 무서웠어. 그 사람이 날 자꾸 따라 왔거든. 정신은 자꾸 흐려져 가고. 정신을 잃으면 그 사람을 따라 갈 것만 같았어. 그래서 바로 차를 몰아 무작정 그 곳을 떠났는데. 니네 방에 왔네. 왜 정희네로 가지 않고 네 방으로 왔지?"
"이씨, 누나! 오늘 추근 된 사람하고 그럼 키스한거야?"
"모르겠어."
"뭐야. 왜 그러냐? 누나 혹시 술 먹으면 아무 남자하고나 키스하고, 음... 그
래, 아무 남자나 생각 나는 사람 있으면 찾아 가고 그래요?"
"기분 나쁘다 너. 난 널 믿고 찾아 왔는데. 너 내가 술 취하고 맘이 외로우면
아무 남자와 자고 하는 그런 여자로 보는 거니?"
"좀 그렇잖아요. 오늘도 봐요. 나도 남잔데 내 방을 떡 찾아 온 것도 그렇고,
자기가 추행당한 일도 꺼리낌 없이 말하잖아요. 오늘 그 남자가 진짜 누나에게 키스도 하고 추태 부렸는지 모르잖아요."
"흠, 그 정도 까지 정신 잃진 않았어. 너 좀 과민 반응 보인다? 너 나를 남자로서 좋아하는 거니?"
"마음으로 걱정해 주면 좀 진지하게 받아 들여요."
"키스까진 당하지 않았어. 그리고 나, 사랑하는 사람과는 감정에 충실하다 보면 같이 잘 수 있다는 생각은 해도, 아무하고나 기분 따라 키스하고 잠자리 같이 하는 그런 여자는 아니다. 나 아직까지 한 사람 하고만 키스 해 봤어."
"누구요? 승주 그 사람?"
"흠, 그 사람이 그럴 용기라도 있으면..."
"그럼 누군데?'
"그냥 급습에 당해서 한 번 뺏겼었지. 다음날 바로 헤어진 사람이라 이름도 기억 못하겠어."
"어떻게 첫키스 한 사람 이름도 기억 못하냐?"
"못할 수도 있지."
"몸가짐 잘 해요. 불쑥 불쑥 남자방 찾지 말고."
"넌 남자로 보이지 않는데?"
"날 무시하는 행동이다."
"니가 먼저 연상은 싫다고 했잖아. 널 보니까 기분이 좀 풀린다."
"치, 머리 많이 아파요? 타이네놀 드릴까요?"
"나 속도 안좋아. 토할 것 같아."
"그럼, 화장실 가요."
"등 두들겨 줄래?"
"여자들은 남자에게 등 두들겨 달란 소리 안하던데?"
"자꾸 자기가 남자인 걸 강조한다 너? 나하고 사귀고 싶은거야? 그 사람 잊기로 했는데, 이제 연하하고 사귀어 볼까? 철수야 우리 사귈래?"
"그렇게 웃지 마요. 내가 무슨 바본 줄 알아요. 얼굴에 바로 이건 장난이다라
는 웃음이 맺혀 있거만."
"그럼 진지하게 말하면 사귈래?"
"연상은 싫다니까 씨. 빨리 화장실이나 가요."
누나는 약간의 오바이트를 한 다음, 깨끗하게 세수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뭔가를 바라더군요.
"나 좀 더 자야되는데..."
"나보고 차에 가서 자라구?"
"그건 아니야. 나 이빨 닦아야 되거든. 근데 치솔이 없다?"
"나보고 지금 나가서 사오라구? 아예 필요한 거 다 말해요."
"기분 나쁜 표정이다?"
"그럼 이런 꼭두 새벽에..."
"사다 줘. 그럼 널 남자로 생각해 줄게."
"나 남자 맞아요."
"이빨닦고 일어나면 갈비탕이라도 사줄 참이었는데..."
"가그린하고 컨디션도 사올까요?"
"그래 주면 고맙구. 그리고 뭐 추리닝 같은 거 없니?"
"아, 맞다 참."
"뭘?"
"내 책상 밑에 보면 누나 생일 선물 사 놓은거 있거든요. 나 칫솔하고 다른 거 사올 동안 봐 보세요."
"참, 철수야 열쇠 줄테니까. 내 차 어딨는 지 좀 찾아보고 근처에 제대로 주차시켜 줄래?"
"나 면허증 나온 거 어떻게 알았어요?"
"후후, 열쇠 여기?"
새벽 날씨는 몸시 추웠다.
학교 앞에 딱 하나 있는 편의점까진 상당히 멀다.
차 주차 참 잘 시켜 놓았다.
사고 안나고 온게 정말 하늘이 도왔나 보다.
차는 내 오피스텔 자취방 건물 현관 바로 앞에 비딱하게 주차시켜져 있었다.
저걸 타고 갔다 올까?
음, 내 처녀운전을 외제차를 가지고 할 줄이야.
자리가 좀 좁다.
가자 은정아.
편의점 점원들이 날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 보았다.
그럼, 이 밤에 외제차 몰고 편의점 오는 사람은 이 근방에선 없을 것이다.
"저 차 은정이 선배 차인거 같은데?"
"에?"
"우리과 선배 누나 차라구요."
점원 새끼가 그걸 왜 물어보냐?
하긴 귀한 차라 눈에 띄기는 하는구나.
"어제 술 마셨다고고 차를 제게 맡겨 놓고 갔어요. 은정이 누나 보면 제가 차
탔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어떤 사이에요?"
이 새끼가 뱀 눈을 하고 보네.
애인이면 어떡할겨 니가?
확 죠패 버릴까 보다.
"전 동아리 후배에요."
"차 긁지 마요."
이 새끼가 진짜.
차를 주차시키는 것도 초짜치곤 잘 했다.
옆 차 때문에 난 보조석 좌석 문으로 내렸다.
옆 차에 너무 붙여 주차를 시켰다.
나는 뒤로는 주차시키기가 힘들어 앞으로 주차시켰걸랑.
옆 차 주인도 아침에 보조석으로 타야 될거다.
거의 예술적 으로 주차를 시켜 놓았다.
하하.
방에 들어 가서 꿈적 놀랐다.
"예쁘지?"
너무 밋밋한 거 같다.
그냥 남자 잠옷하고 별로 차이가 없는 잠옷이다.
점원이 귀여운 잠옷이라 했는데...
누나는 잠옷으로 갈아 입고 밝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자랑을 했다.
진짜 웃기게 됐다.
남자 방에서 잠옷까지 갈아 입고, 저 누나는 뭐가 저리 기쁜 표정이냐?
다른 사람들에게 저 모습 들키면 시집가기 어려울 텐데...
나도 마찬가지다.
이제 손은 좀 내리지.
진짜 공주다.
내가 멀뚱 멀뚱 쳐다만 보고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자, 계속해서 양팔을 벌인 채 잠옷 자랑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구름 무늬만 없고 좀 더 짙은 푸른 색이고 단추에 인형 모양이 없으면 저건 딱 죄수복이다.
저게 면이 좀 고급이긴 하지.
섹쉬한 걸로 살 걸 그랬나?
"예뻐요."
거짓말 한 번 했다.
"고마워."
"뭘요."
아휴, 나는 바깥 바람을 먹었더니 잠이 들지 않는데, 누나는 참 잘도 잔다.
꼭 자기 방에 있는 것 처럼 말이다.
누나가 내 방을 떠난 건 10시가 넘어서였다.
바쁘다면서 그리고 미안했다면서, 또 그리고 고맙다면서 일어나자 마자 날 내 쫓고는 자기 몸단장을 했다.
30분도 넘게 밖에서 추위에 떨었다.
누나는 갈비탕 사주지 않고 수업이 있다며 학교로 달려 갔다.
지 선물이라고 준 잠옷은 고이 개어 침대 위에 올려 놓고선 갔다.
내 발에 깔고 자는 인형도 예쁘게 다독거려 침대 베개 옆에 세워 놓았다.
잠 옷은 왜 안가져 갔을까?
어제 내가 속으로 생각한 것들을 읽었을까?
다음에 가져가라고 해야지.
그나저나 누나 때문에 수업하나 땡땡이 쳤다.
아하, 늦 가을 날씨 한 번 좋다.
살갗을 애이는 바람은 냉정한 여인의 뒷모습같아 좋았고, 낡은 잎들만 조금 달고 있는 활엽수의 가지들은 내 모습 같아 좋았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비수 같은 하늘은 그 자체로도 환상이다.
은정이 누나 생일날의 날씨라서 한 번 분위기를 잡아 보았다.
아름다운 숙녀라는 말까지 적고 예쁘게 포장된 잠옷 상자를 종이 가방에 넣고 기분 좋게 학교로 갔다.
약대 근처 이과대와 농대 주위를 다 뒤졌지만 누나의 차가 없었다.
마음을 굳게 먹고 그 비싼 헨드폰에다 전화를 해 보았지만 받지를 않는다.
"에이, 꼭 찾으면 없어요. 누나 생일 축하 해요. 푸하하!"
다섯 번째도 그냥 끊을려다 음성 하나 남겨 주었다.
수업도 끝이 나고 늦은 오후가 되었지만 누나는 발견 할 수 없었다.
동아리 방에는 늙어 보이는 후배들만 보이길래 얼른 도망 나왔다.
저것들이 밥 사주라고 하면 낭패기 때문이다.
선배체면에 잠옷 산 바람에 돈 없다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잠옷이 든 종이 가방, 당구장에서 뺏길 뻔 했다.
그냥 치자고 할 때는 언제고, 게임비 물리니까 돈 되는 것은 다 내놓고 가란다.
삭막한 놈들이다.
그러니까 니네들은 공돌이 수준을 못 벗어나는거야.
오늘따라 방 청소가 하고 싶었다.
깨끗하게 부는 가을 바람 때문이었으리라.
밤은 깊어 가지만 내 방은 깨끗해져 가고 있다.
방 바닥을 깨끗이 닦았다.
오늘 아침에 본 가을 하늘 같다.
창을 열고 싸늘한 밤 바람을 맞았다.
공기 한 번 좋다.
바람 부는 그 깨끗한 방바닥에서 금방 삶은 따끈한 강냉이 두개를 먹었다.
전원 생활의 낭만이다.
그렇다고 내가 여기 내려 온 것을 좋아할쏘냐.
천만의 말씀이다.
서울 가고 싶다 씨.
졸라 심심하다.
호랑이 인형을 발 받침대로 쓰고 푹신한 베개를 벤 채 침대에 누웠다.
발이 편해야 잠이 잘 오지 암.
앞으로 인형은 발 받침대다.
누나는 오늘 학교를 나오지 않은 것 같다.
만날 사람이 많아서 아침부터 바빴나 보다.
부럽다.
내 생일 때는 동아리에서도 챙겨 주는 사람이 없다.
시험 기간이라서.
하기야 지금도 시험 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지만, 그래도 시험 기간은 아니다.
아까 동아리 방 칠판에 보니까 오늘이 은정이 누나 생일이라는 것을 누가 적어 놓았더라.
챙겨 주는 사람들 많은 은정이 누나는 좋겠다.
잠이 들 찰나였다.
12시가 다 된 시간이었다.
"딩동."
"누구세요?"
대답이 없다.
겁이 조금 났지만 예전 만큼은 아니다.
강냉이 서리 하면서 내 담력이 많이 세졌다.
"딩동!"
"에이씨, 이런 야심한 시간에 누구야?"
"똑똑!"
누구야 진짜.
문을 열어 보았다.
"안녕, 헤헤."
좌우로 흔들리는 은정이 누나가 나를 보자 씩 웃었다.
그리고 그냥 내 방으로 들어 왔다.
약간 당황이 되어 말 문이 막혔다.
술냄새가 난다.
얼굴이 불그스럼하다.
그렇지만 술취한 행동을 보이진 않는다.
오늘이 지 생일이었다고 옷차림이 멋있다.
최신 유행하는 검은 스타킹과 약간 짧은 검정 스컷이 잘 어울린다.
스카프와 실크 브라우스가 멋있다.
멋있는 옷차림은 흩어 지지 않고 단정했다.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고 내 방으로 들어 선 누나는 나를 보고 씩 웃고는 쟈켓을 벗어 옷걸이에 걸었다.
스카프도 가지런히 걸어 놓는다.
차라도 한 잔 하러온 걸까?
"누나, 이런 늦은 시간에 여긴 왜 왔어요?"
"응? 으응..."
날 보며 실실 웃던 누나가 침대에 덜썩 앉았다.
아니 저 모습은?
에로 영화에서 자주 보던 장면이다.
치마 조금 올려 스타킹 말아 내리기.
졸라 섹시했다.
오늘도 장난치는 것일까?
지 생일이라서 순진한 내게 장난치는 것이라면 눈을 돌리기 보단 빤히 쳐다 봐야 된다.
그래서 빤히 쳐다 보았다.
검은 스타킹 속에는 곱고 하얀 누나의 다리가 있었다.
뭐하는 거야 씨.
스타킹 두짝을 다 벗은 누나는 그냥 침대에 몸을 누이고 이불을 덮었다.
"누나 지금 뭐하는 거야?"
"음냐."
장난인 것 같아서 한 참을 옆에 서 있었다.
오랜 시간 누나는 자는 척 했다.
누나에게 다가가 볼을 찔러 보았다.
우쒸, 진짜 잔다 이거!
이건 나를 믿기 보다는 나를 무시하는 행동이다.
새벽이다.
나는 방 바닥에 이불을 깔고 호랑이를 베고 누워 있다.
내 침대를 어떤 아름답고 선녀같고 또 섹쉬하고 마음씨 고운 여자가 술을 먹고 꼬장을 부린건지, 장난으로 하는 짓인지 모르겠지만 당당하게 뺏어 갔다.
억울하다.
잠을 청하려다 도저히 분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누나가 장난치는 거 같다.
불을 켜 보았다.
누나의 고운 다리 하나가 이불 밖으로 나와 있었다.
누나는 한쪽으로 돌아 누워서는 이불을 감고 잠이 들어 있었다.
진짜 잠이 든 것이 맞는 거 같다.
화장을 지우지 않은 옆으로 돌아 누운 그녀의 얼굴이 측은하다.
측은해 보였던 것은 돌아 누운 누나의 얼굴 모양새가 밝지 못했고, 눈에 눈물이 새고 있었기 때문.
오늘 무슨 일 있었나?
대단해 보이던 사람이라도 누나와 같이 있을 때 보면 별거 아닌 것 처럼 된다.
조금 불안해 보일 때가 있으나 누나는 상처를 주는 쪽이지, 받는 쪽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 누나의 지금 표정은 왠지 상처 받은 모습이다.
흠, 내가 마로니에 공원 얘기를 자주 하는 것은 어릴 때 본 영화 때문이다.
겨울 나그네였다.
아마 명륜동 그 학교가 배경이었던 것 같다.
아니면 말고... 거기 보면 마후라, 그러니까 목도리지.
그걸 메고 눈을 맞는 주인공의 모습은 더없이 멋있어 보였다.
자전거에 걸려 넘어 진 여자 주인공의 겨울 모습에도 분명 목도리가 있었다.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하냐 하면 침대에 누워 있는 누나의 모습이 거기 나온 여자 주인공이 그 누군가를 그리워 할 때의 모습과 닮았기 때문이다.
누나를 바로 눕혀 주었다.
이불도 바로 덮어 주었다.
이 여자가 진짜.
누나는 자꾸 돌아 누우며 이불을 감아 한쪽으로 안았다.
나 지금 전공책에 수건 말아 베개로 사용하고 있다.
혹시나 해서 누나에게 호랑이를 줘 보았다.
그러자 누나는 이불을 감지 않고 대신 인형을 안았다.
누나가 이불을 바로 덮고 자게 하기 위해서 나는 그나마 베개 대용으로 남아 있던 것까지 뺏겼다.
내 방에 여자가 자고 있기 때문에 빨리 잠이 들지 않았다.
이런 저런 생각들이 정신 없이 지나쳤다.
조금 야한 생각도 해 보았다.
여자가 깊이 잠 들었을 때, 가슴을 만지면 반응을 보일까.
잠시 동안만 했다.
나를 이상한 놈으로 생각지는 말기를...
침대 옆 방바닥에 누워 이 여자가 왜 여길 왔을까,란 생각으로 빨리 잠이 들지 못했다.
그래도 분명 잠이 들었었다.
그런데 씨.
"우욱!"
잘 자던 나는 봉변을 당했다.
누가 내 배를 사정없이 밟았다.
"누구 있어요?"
뭐야?
"발 좀 치워요. 아파요."
"누구?"
"누구긴 이 방 주인이지."
"철수? 철수니?"
"네. 발 좀 치워요."
"니가 여긴 왜 있는거야?"
"내 방이라니까."
"엉?"
누나는 놀란 음성이다.
"왜 깼어요?"
"내가 왜 니 방에 있는거니?"
"씨, 지 발로 떳떳하게 찾아 왔을 때는 언제고..."
"내가 찾아 왔어? 너 아무짓도 안 했지?"
"물에 빠진 놈 구해 주었더니 보따리 찾아 내라는 속담이 괜히 있는게 아니구만."
"뭐야? 불 좀 켜 봐."
"자다가 중간에 깨면 배 고픈데 씨."
불을 켜 주었다.
누나는 자기 옷 모양을 바로 하면서 밝은 불 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니 방을 찾아 왔구나."
방 주위를 살피더니 인정을 하는 듯 차분한 음성이다.
"진짜 술 취했던 거에요?"
"응. 아직 머리가 아파. 니 방을 찾아 와서 다행이다."
"뭐가 다행이에요. 술 취해 남자 방 찾아 온 게 다행이야?"
누나는 머리가 아픈지 상을 찡그렸지만 나에게는 미소를 보여 주었다.
"니 생각이 났었나 보다. 넌 내가 믿잖아."
"참 내, 어제 생일이었다면서 누가 챙겨 주지 않던가요? 생일 파티하면서 술을 제법 많이 마셨나 보네?"
"나 어제 혼자 술 마셨어."
"에? 그 많던 남자들이 아무도 안 챙겨 주던가요? 맞다, 그 승주라는 사람도
안 챙겨 줬어요?"
누나의 표정이 밝지 못하다.
승주 그 사람 애기를 하자 그나마 짓고 있던 미소도 가셨다.
"나 이제 잊을거야. 진짜 다시는 생각하지 않을거야."
"무슨 말이에요?"
"내 생일 챙겨주려는 많은 사람들 다 물리치고 그 사람 혼자를 기다렸는데, 근데...주위에 여러 사람 있는 것 보다 필요한 한 사람 있는게 낫다고 생각했었는데..."
누나가 갑자기 왈칵 눈물을 쏟아 냈다.
우쒸, 나는 여자가 울면 마음이 아프다.
동생하고 말다툼 하다가도 걔가 울려고 하면 무조건 내가 잘못했다고 빈다.
여자가 울면 당혹스럽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기 때문, 그리고 여자가 우는 모습은 이유없이 슬프다.
누나는 제법 많은 눈물을 흘렸다.
난 그냥 내 자던 자리에 앉아 물끄러미 쳐다만 보았다.
"왜? 그 사람이 약속 잡아 놓고 나오지 않았던가요?"
"아니야, 그 사람 삐삐에 음성만 남기고 기다렸어. 헨드폰도 꺼두고 그냥 기다렸지. 그 사람이 수원 오면 간혹 같이 갔던 카페에서 마냥 기다렸어. 혹시 내게 음성이 들어 왔을까 확인은 했지만 그 사람 목소리가 없어서, 오겠지 하고 그냥 기다렸어. 흠, 네 목소리 들었어. 고마워."
"못 들을 수도 있잖아요."
"열 번 가까이 남겼는 걸. 나 어제 양주 한 병을 다 마셨다? 비싼 거 마셨어. 기분이 엉망이었거든."
"에? 뭐 마셨는데?"
"발렌타인 21년산. 작은 거였지만..."
"그 독한 걸 다 마셨어요?"
"응."
"가만, 여기 올 때 뭐타고 왔어요?"
"운전하고 왔어."
"엉? 그럼 음주 운전이잖아. 이 여자가 사고 났으면 어떡했을라고... 그리고
술 먹는데 가면서 운전을 하고 가?"
"처음엔 커피 마셨어. 술은 속상해서 마셨다."
"얼마나 있었어요?"
"오후 한 시부터 밤 11시까지. 나 어제 무서웠어."
"뭐가?"
"어떤 남자가 내게 자꾸 추근 됐거든. 난 술에 취해 갔구, 취한 정신에 그 남자를 따라 갈 뻔 했어. 진짜 따라 갈 뻔 했어. 그 사람이 내 다리를 만지고 입술에 키스 하려고 해도 별 거부 반응을 보이지 못했었어."
"뭐에요? 이 여자가 진짜. 자기 몸뚱아리를 도대체 어떻게 생각하는 거야?"
"그래, 내가 모르는 남자에게 어디로 끌려 갈지도 모르는데,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그런 나를 외면하고 어디서 무얼 하는 지 나타나지 않았어. 화가 났어. 그 자식 때문에 화가 나니까 정신이 들더라. 그리고 무서웠어. 그 사람이 날 자꾸 따라 왔거든. 정신은 자꾸 흐려져 가고. 정신을 잃으면 그 사람을 따라 갈 것만 같았어. 그래서 바로 차를 몰아 무작정 그 곳을 떠났는데. 니네 방에 왔네. 왜 정희네로 가지 않고 네 방으로 왔지?"
"이씨, 누나! 오늘 추근 된 사람하고 그럼 키스한거야?"
"모르겠어."
"뭐야. 왜 그러냐? 누나 혹시 술 먹으면 아무 남자하고나 키스하고, 음... 그
래, 아무 남자나 생각 나는 사람 있으면 찾아 가고 그래요?"
"기분 나쁘다 너. 난 널 믿고 찾아 왔는데. 너 내가 술 취하고 맘이 외로우면
아무 남자와 자고 하는 그런 여자로 보는 거니?"
"좀 그렇잖아요. 오늘도 봐요. 나도 남잔데 내 방을 떡 찾아 온 것도 그렇고,
자기가 추행당한 일도 꺼리낌 없이 말하잖아요. 오늘 그 남자가 진짜 누나에게 키스도 하고 추태 부렸는지 모르잖아요."
"흠, 그 정도 까지 정신 잃진 않았어. 너 좀 과민 반응 보인다? 너 나를 남자로서 좋아하는 거니?"
"마음으로 걱정해 주면 좀 진지하게 받아 들여요."
"키스까진 당하지 않았어. 그리고 나, 사랑하는 사람과는 감정에 충실하다 보면 같이 잘 수 있다는 생각은 해도, 아무하고나 기분 따라 키스하고 잠자리 같이 하는 그런 여자는 아니다. 나 아직까지 한 사람 하고만 키스 해 봤어."
"누구요? 승주 그 사람?"
"흠, 그 사람이 그럴 용기라도 있으면..."
"그럼 누군데?'
"그냥 급습에 당해서 한 번 뺏겼었지. 다음날 바로 헤어진 사람이라 이름도 기억 못하겠어."
"어떻게 첫키스 한 사람 이름도 기억 못하냐?"
"못할 수도 있지."
"몸가짐 잘 해요. 불쑥 불쑥 남자방 찾지 말고."
"넌 남자로 보이지 않는데?"
"날 무시하는 행동이다."
"니가 먼저 연상은 싫다고 했잖아. 널 보니까 기분이 좀 풀린다."
"치, 머리 많이 아파요? 타이네놀 드릴까요?"
"나 속도 안좋아. 토할 것 같아."
"그럼, 화장실 가요."
"등 두들겨 줄래?"
"여자들은 남자에게 등 두들겨 달란 소리 안하던데?"
"자꾸 자기가 남자인 걸 강조한다 너? 나하고 사귀고 싶은거야? 그 사람 잊기로 했는데, 이제 연하하고 사귀어 볼까? 철수야 우리 사귈래?"
"그렇게 웃지 마요. 내가 무슨 바본 줄 알아요. 얼굴에 바로 이건 장난이다라
는 웃음이 맺혀 있거만."
"그럼 진지하게 말하면 사귈래?"
"연상은 싫다니까 씨. 빨리 화장실이나 가요."
누나는 약간의 오바이트를 한 다음, 깨끗하게 세수를 하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뭔가를 바라더군요.
"나 좀 더 자야되는데..."
"나보고 차에 가서 자라구?"
"그건 아니야. 나 이빨 닦아야 되거든. 근데 치솔이 없다?"
"나보고 지금 나가서 사오라구? 아예 필요한 거 다 말해요."
"기분 나쁜 표정이다?"
"그럼 이런 꼭두 새벽에..."
"사다 줘. 그럼 널 남자로 생각해 줄게."
"나 남자 맞아요."
"이빨닦고 일어나면 갈비탕이라도 사줄 참이었는데..."
"가그린하고 컨디션도 사올까요?"
"그래 주면 고맙구. 그리고 뭐 추리닝 같은 거 없니?"
"아, 맞다 참."
"뭘?"
"내 책상 밑에 보면 누나 생일 선물 사 놓은거 있거든요. 나 칫솔하고 다른 거 사올 동안 봐 보세요."
"참, 철수야 열쇠 줄테니까. 내 차 어딨는 지 좀 찾아보고 근처에 제대로 주차시켜 줄래?"
"나 면허증 나온 거 어떻게 알았어요?"
"후후, 열쇠 여기?"
새벽 날씨는 몸시 추웠다.
학교 앞에 딱 하나 있는 편의점까진 상당히 멀다.
차 주차 참 잘 시켜 놓았다.
사고 안나고 온게 정말 하늘이 도왔나 보다.
차는 내 오피스텔 자취방 건물 현관 바로 앞에 비딱하게 주차시켜져 있었다.
저걸 타고 갔다 올까?
음, 내 처녀운전을 외제차를 가지고 할 줄이야.
자리가 좀 좁다.
가자 은정아.
편의점 점원들이 날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 보았다.
그럼, 이 밤에 외제차 몰고 편의점 오는 사람은 이 근방에선 없을 것이다.
"저 차 은정이 선배 차인거 같은데?"
"에?"
"우리과 선배 누나 차라구요."
점원 새끼가 그걸 왜 물어보냐?
하긴 귀한 차라 눈에 띄기는 하는구나.
"어제 술 마셨다고고 차를 제게 맡겨 놓고 갔어요. 은정이 누나 보면 제가 차
탔다는 말은 하지 마세요."
"어떤 사이에요?"
이 새끼가 뱀 눈을 하고 보네.
애인이면 어떡할겨 니가?
확 죠패 버릴까 보다.
"전 동아리 후배에요."
"차 긁지 마요."
이 새끼가 진짜.
차를 주차시키는 것도 초짜치곤 잘 했다.
옆 차 때문에 난 보조석 좌석 문으로 내렸다.
옆 차에 너무 붙여 주차를 시켰다.
나는 뒤로는 주차시키기가 힘들어 앞으로 주차시켰걸랑.
옆 차 주인도 아침에 보조석으로 타야 될거다.
거의 예술적 으로 주차를 시켜 놓았다.
하하.
방에 들어 가서 꿈적 놀랐다.
"예쁘지?"
너무 밋밋한 거 같다.
그냥 남자 잠옷하고 별로 차이가 없는 잠옷이다.
점원이 귀여운 잠옷이라 했는데...
누나는 잠옷으로 갈아 입고 밝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자랑을 했다.
진짜 웃기게 됐다.
남자 방에서 잠옷까지 갈아 입고, 저 누나는 뭐가 저리 기쁜 표정이냐?
다른 사람들에게 저 모습 들키면 시집가기 어려울 텐데...
나도 마찬가지다.
이제 손은 좀 내리지.
진짜 공주다.
내가 멀뚱 멀뚱 쳐다만 보고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자, 계속해서 양팔을 벌인 채 잠옷 자랑 포즈를 취하고 있다.
구름 무늬만 없고 좀 더 짙은 푸른 색이고 단추에 인형 모양이 없으면 저건 딱 죄수복이다.
저게 면이 좀 고급이긴 하지.
섹쉬한 걸로 살 걸 그랬나?
"예뻐요."
거짓말 한 번 했다.
"고마워."
"뭘요."
아휴, 나는 바깥 바람을 먹었더니 잠이 들지 않는데, 누나는 참 잘도 잔다.
꼭 자기 방에 있는 것 처럼 말이다.
누나가 내 방을 떠난 건 10시가 넘어서였다.
바쁘다면서 그리고 미안했다면서, 또 그리고 고맙다면서 일어나자 마자 날 내 쫓고는 자기 몸단장을 했다.
30분도 넘게 밖에서 추위에 떨었다.
누나는 갈비탕 사주지 않고 수업이 있다며 학교로 달려 갔다.
지 선물이라고 준 잠옷은 고이 개어 침대 위에 올려 놓고선 갔다.
내 발에 깔고 자는 인형도 예쁘게 다독거려 침대 베개 옆에 세워 놓았다.
잠 옷은 왜 안가져 갔을까?
어제 내가 속으로 생각한 것들을 읽었을까?
다음에 가져가라고 해야지.
그나저나 누나 때문에 수업하나 땡땡이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