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가......

[이현철] 연하가 어때서(17회)

by 황해원 posted Oct 0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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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끝났군요.
가을의 말미에서 난 한 사람을 잊기로 했습니다.
잠시 스쳐 떠나는 여러 사람들보다 더 큰 내 마음 속 자기만의 공간을 가졌던 친구 하나는 연인이 되려다 잊혀 지기로 했습니다.
내년 가을 때도 생각이 나겠지요.
후 내년 봄에도 설레임으로 남아 있겠지요.
그래도 잊혀 질 겁니다.
잊기로 마음 먹었으니까.
아직도 이해가 안되네요.
사랑한다고 고백한 여자를 그 이유 때문에 부담스러워 했던 것을, 난 승주를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하니 열 받네요.
나같은 미녀가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으면 감격하며 받아 들였어야지, 별로 잘난 것도 없는 게 나에게 상처를 주었어요.
23살 인생을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남자에게 차여봤어요.
사방이 벽으로 둘러 쌓인 도서관 열람실은 다가오는 기말시험 때문에 학생들로 붐비네요.

"미안한데요, 그 자리 주인 곧 들어 오거든요."
"아, 예."

난 메뚜기 하면 그 자리가 내 자리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난 메뚜기를 하면 공대 남학생 자리에 잘 앉아요.
순진한 공대생들은 간혹 내 미모를 의식하고 가방을 빼 버리는 경우가 있지요.
호!호!호!
근데 이 녀석은 어딜 간 거야?
내 옆자리는 철수 그 녀석 자리지요.
제가 자리좀 잡아 달라고 부탁을 했었습니다.
화장실 가는 척하고 나가더니 3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네요.
자꾸 메뚜기들이 녀석의 자리를 탐 내는데, 녀석은 어디로 갔는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녀석이 요즘들어 더 귀엽습니다.
생각보다 순진한 구석이 많아요.
그런 순진한 녀석에게 난 잘못한 게 있습니다.
바로 내 생일 다음 날 새벽이었지요.
내 생일날, 난 승주에게 상처를 받았고 외로웠지요.
그 외로움 때문에 잠시 철수 녀석에게 보상 심리를 느꼈습니다.
승주를 잊기로 한 공허함에서 그리고 뭉개진 자존심 때문에 철수에게 하지 말아야 했을 말을 하고 말았네요.
사귀자고 말했던 것 말입니다.
그 날 기분따라 뱉은 말에 철수가 장난스럽게 받아 들이지 않았다면, 철수는 며칠 동안 내게 연인의 정을 느꼈을 것이고 짧은 시간 후에는 그가 어색해 졌겠지요.
솔직히 철수는 남자로서 매력은 없어요.
너무 어려 보이거든요.
그냥 동생으로 생각하니까 붙어 다니는 거죠.
철수에게 상처를 줄 뻔 했어요.
내기분따라 철수를 아무렇게나 대해서는 아니 되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후훗, 철수 방에서 두 번이나 잤네요.
나 같은 정숙한 여자가 남자 방에서 두 번이나 밤을 보내다니.
날 믿는 울 아빠가 그 사실을 알면 땅을 치겠네요.
처음은 의도한 일이었지만, 두번째는 나도 잘 이해가 되지 않아요.
왜 술취한 상태에서 철수를 찾아 갔었는지, 철수가 내게 뭔가 위안을 줄 거라 생각했을까요.
그래요 철수 때문에 엉망이었던 기분이 많이 풀어 졌어요.
그가 준 잠옷은 예쁘진 않았지만 맘에 드는 것이었지요.
철수의 성의가 참 고마웠습니다.
참, 그러고 보니 그 잠옷을 철수네 방에 그대로 두고 나왔네요.
내가 니 침대에 벗어 논 잠옷 가져 와, 뭔가 어감이 이상하네요.

녀석이 한 시간 째 들어 오지 않습니다.
나도 오래 앉아 있었네요.
잠시 바깥 바람이나 쐬고 와야 겠습니다.

"군대 잘 갔다 와. 내가 그 사자머리 잘 다독거려 줄게."
"이 새끼가. 당구 강의 해 달라더니, 내 군대 가는 얘기는 왜 해? 그리고 의정이 얘기를 또 왜 하냐?"
"걔하고 진짜 연인 사이냐?"
"응."
"걔는 뭐 고무신 거꾸로 신을 일은 없겠다."
"그럼, 내가 제대할 날짜만 기다리면서 내 생각만 할거야."
"미친 놈. 걔가 딴 남자 생각을 해도 딴 남자들이 걔 생각을 안 할거야."
"너, 예쁜 의정이를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결투다!"
"그래, 나 80놓고 칠테니 넌 250 놓고 칠래?"
"미쳤냐? 100대 200."

내가 밖으로 나갔을 때, 난 철수를 바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참 잘 생긴 그의 친구와 함께 별 시덥지 않은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춥지도 않나?
벤취에 구겨진 종이 컵을 각각 들고서 계속 이야기 중이네요.
무슨 얘기를 하는 뒤에서서 들어 봤습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으면 달라진다더니, 나와 비슷한 외모를 가진 잘생긴 네가 그런 독특한 여자를 좋아하게 될 줄이야."
"내가 잘 생긴 건 아는데, 니가 내 정도 된다는 말은 괴변이다."
"나도 잘났어 임마."
"그래서 미팅 나갔다 오면 예외없이 꺼이꺼이 울었냐?"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래도 나는 내가 찍은 여자가 날 찍어 주었어. 유지를 못해서 그렇지."
"그런데 어떻게 사자머리와는 유지가 되었냐?"
"응, 날 위해서 자기를 많이 희생을 하니까. 만날 수록 편해지고 또, 나도 자길 위해 희생할 수 있는 무언가가 생기니까 자꾸 가까워 지더라."
"연인사이에 희생이란 말은 쓰지 마라. 그냥 배려하는 맘이지. 무식한 놈."
"그래, 배려하는 맘. 넌 요즘도 그 나이 든 누나들 따라 다니니?"
"내가 따라 다니는 게 아니지, 친구야. 솔직히 당구 잘치던 그 누나 졸라 예쁘지 않냐?"

철수가 나를 알아 주는군요.

"그런대로."

뭐야 이 자식.
나는 자기를 참 잘생겼다고 생각해 주는데, 뭐 나보고 그런대로?

"그 예쁜 누나가 날 따라다니잖아. 사자머리하고 사귀는 너 하고는 차원이 틀리단 말이야. 내가 연상만 아니었어도. 그 누나가 언젠가 내 발을 잡고 눈물을 뚝뚝 흘리며 연하도 괜찮으니까 제발 좀 사귀자고 그러는 걸, 내가 거절했어. 나 너무 매력적인 놈인가 봐."
"의정이도 그 누나 만큼 예뻐."
"너 장님이냐? 둘을 세워 놓고 지나가는 사람 100명한테 물어 볼래? 사자머리 예쁘다고 하는 사람 세 명만 되어도 내가 니 대신 군대 간다."
"나는 목에 칼이 들어 와도 의정이가 더 예뻐."
"그래 넌 의정이하고 한 평생 살아라. 하여튼 너 정희 누나도 잘 알지? 그 누나도 내가 연하만 아니었어도 자기 애인을 만나지 않았을 거라 말했어. 하지만 버트, 나는 절대 연상에게는 넘어 가지 않지."

뭐 이런 자식이 다 있을까.
이런 놈에게는 내 기분따라 아무렇게나 대해도 순전히 자기 맘대로 해석해서 자기 유리한 쪽으로 생각할 놈이다.
그래도 내가 예쁜 것은 인정을 해 주는군.

"그래, 잘했어. 나이 든 사람은 나이 어린 사람에게 뭔가 꼴리는 게 있는가봐. 절대 유혹에 넘어 가서는 안된다? 내가 우리 누나들에게 시달려 봐서 아는데, 나이 든 여자들이랑 놀면 빨리 늙을 뿐 도움 되는 게 없어. 이제 우리 결투 하러 가자."
"그래. 나 100 놓을 테니까, 넌 250 놔라."
"좋다. 내 선심 한 번 쓸게."

유유 상종이네요.
도대체 한 시간 동안 무슨 얘기를 나누었을까요.
이제 열람실을 들어 와도 상당히 오랜 시간 좌석을 비운게 되는데, 뭐 이제 당구장을 가겠다는 저 놈. 의기 양양하게 일어서는 두 녀석 중 철수의 목덜미를 잡아 챘습니다.

"뭐야, 씨?"
"사귀자고 따라다니지 않을테니까, 이제 열람실로 들어 가시죠 철수씨?"

잘 생긴 철수의 친구가 나를 보며 머쩍게 씩 웃는군요.

"철수야, 내 말 상기하고 꿋꿋하게 버텨."
"야, 같이 가."
"나는 누나들을 상대해 봐서 아는데, 저 누나 모습은 아까 우리들 대화를 모두 들었다는 표정이거든?"

자식이 잘 아네요.
고개를 끄덕거려 주었지요.

"그래서 임마?"
"나 나이 많은 여자들 무서워. 나 먼저 간다."

총알 같이 뛰어 가는 친구를 물끄러미 바라 보다가 철수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며 웃습니다.

"헤헤, 진짜 다 들었어요?"
"응. 내가 눈물을 흘리며 니 발을 잡고 사귀자고 매달렸었니? 기억이 끊겨서 잘 모르겠네."
"나 당구장 가야 되요."
"너 도서관은 왜 나왔니?"
"누나 자리 잡아 줄 목적이었잖아요. 나는 시험 보려면 며칠 더 있어야 되요."
"들어 가서 공부 해."
"누나가 뭔대?"
"정희에게 이른다? 아까 니가 한 말 다 들었어."
"일러요. 목 깃 좀 놓으면 안될까요?"
"싫다."
"나 잡으러 나온거에요?"
"응."
"아무리 그래도 난 연상에겐 관심이 없어요."

철수가 일어섰던 그 벤취에 도로 앉았습니다.
무슨 얘기 하는거야 근데.

"흑흑, 왜 나는 안된다는 거죠? 정희는 고려해 볼 맘이 있다면서."

녀석 때문에 나도 장난스럽게 되 버렸네요. 쩝.

"정희 누나가 내게 그런 말을 하면 그건 진짜 결심한 마음에서 나온 거에요."
"무슨 말 하는거야? 그렇게 말하니까 진짜 정희에게 질투심 생기네."
"정희 누나는 오래전부터 알아 온 사이잖아요. 누나에게 말하지 말아요. 내가 짝사랑 했던 사람이에요 헤헤. 정희 누나가 간혹 내게 연하만 아니었으면 하는 말을 했어요."
"안 들어 갈거야?"
"정희 누나 때문에 연상에겐 잘못된 감정 가지지 말자라고 생각했지요."

녀석이 들어 가기 싫어서 자꾸 다른 말을 하네요.

"내가 사귀자고 했던 말은 장난이었어. 왜 그래 너?"
"내가 생각하기로 연상의 여자가 연하의 남자를 대할 땐 사랑하는 맘이 있어도 가벼운 것 같아요. 가볍다는 것은 어느 누군가 스며 들기가 쉽다는 거겠지요. 나도 한 구석에는 성숙한 면이 있는데, 자꾸 어린 쪽으로만 보더군요. 남자는 다스리려는 심리가 강하고 여자는 기대고 싶은 심리가 강하죠. 내가 누나를 다스리려고 생각한다면 누나가 비웃겠지요? 감싸 주고 싶은 생각도 누나는 그냥 헛웃음으로 던져 버리죠. 여자들은 연하의 남자에게서 보다 나이가 들고 성숙한 남자에게 더 기대기를 원하나 봐요. 그리고 연상의 남자가 자기를 이해하고 더 잘 감싸 줄 것이라 믿나 보죠."

녀석이 자뭇 심각하네요.
이 녀석 정말 정희를 좋아 했나 봐요.
진짜 질투 나네.

"치, 그런 말들을 어디서 줏어 들었니?"
"줏어 듣다니. 많은 연구에 의해서 스스로 깨달은 건데."
"이제 21살짜리가 뭘 안다고 그런 말들을 내 뱉는거니? 내가 나이가 조금 더 들고, 인생 경험이 늘면 그걸 반박해 줄게. 들어가서 공부 해 빨리."
"봐요, 누나도 내가 어리다고 바로 깔아 뭉개잖아. 우쒸. 당구 한 시간만 치고 오면 안될까요?"
"들어 가자? 안 그러면 동아리 방 칠판에다 은정이는 철수와 사귀기로 했음,이라고 적어 놓는다? 그러면 너 학교 다니기 힘들어 질 걸. 정희에게도 니가 짝사랑하고 있다는 말 전한다?"
"정희 누나 반 만 닮아라 씨. 정희 누나도 내가 자길 좋아하는 거 알아요."
"그래, 그건 아는 거 같더라. 들어 가지 이제."
"결투 해야 되는데, 씨."

철수를 결국 도서관으로 데리고 왔지요.
말을 물가에 끌고 갈 수는 있어도, 먹이지는 못한다.
그는 바로 엎드려 자 버리는군요.

한동안 철수와 잘 지내었습니다.
여름 방학 때와는 달리 시험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 간 철수와 자주 만났지요.
철수와 같이 있을 때면 그냥 편하고 재밌고 좋았어요.
심통을 부리긴 하지만 배려하는 맘도 있었고, 말을 잘 듣는 편이었지요.

12월 중순을 넘어선 어느 날, 그와 함께 겨울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나는 그에게 뭔가 종이 상자를 건네었습니다.

"이게 뭐에요?"
"선물."
"선물인건 알겠는데, 뭐냐니까요?"
"뜯어 봐."
"음, 그러지요. 이런다고 내가 누나에게 연민의 정을 가질거라 생각지는 말아요."
"알았어, 알았어."

나는 철수에게 삐삐 하나를 선물 했습니다.
자식에게 연락 할 방법은 집에 전화를 하는 수 밖에 없는데, 녀석의 아버님이 받으시면 뭘 자꾸 꼬치꼬치 물어 보시더라구요.
그리고 집에 없으면 도저히 연락할 길이 없어서요.
올 겨울 크리스마스는 할 수 없이 녀석과 보내야 겠군요.
그냥 당분간 다른 이들에게 다가갈 마음이 생기지 않는군요.
누군가 잊고 싶어서 그런 거지만 철수도 한 몫 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지 못하겠네요.

"삐삐네? 근데 디자인이 너무 여성스럽잖아."
"주면 그냥 고맙게 받아라."
"번호는요?"
"***.272.0865. 달달이 고지서 너에게 줄테니까, 그건 니가 내라."
"알았어요. 이름은 내 이름으로 했지요?"
"응. 주소만 우리 집으로 했어."
"나도 삐삐가 생겼구나. 누나 헨드폰 잠깐 줘 봐요."
"왜?"
"개통식 해야 될 거 아닙니까. 줘 봐요."
"에그, 내가 해 줄게."

녀석 앞에서 삐삐를 쳐 주었지요.

"지이잉!"
"아니 이것은 진동? 푸하하!"

철수는 바로 일어서 쪼로로 어딘가로 달려 갔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제 헨드폰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여보세요?"
"아, 0865로 삐삐 치신 분이요?"

철수는 좀 황당하게 귀여운 녀석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