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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이야기] 끝이 없는 지옥의 리스트

by 황해원 posted Jun 0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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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가의 신작을 사러 구내서점에 갔다가

카운터 옆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화려한 사은품을 봤다.

그 탓이었다.

여자는 립스틱과 파우치를 준다는 문구에 현혹되어

'럭셔리 우먼' 을 대놓고 표방하는 어떤 여성 잡지를

덜컥 사버렸던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이렇게 산수를 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했다.

'립스틱과 파우치가 합하면 2만원은 하니까, 

 잡지 가격을 제하고도 만원 이상이 남잖아. 

 난 남는 장사를 한 거라구.'



오랜만에 일찍 집에 들어와 국산 클린싱 워터로 볼을 닦아내고

대형할인마트에서 박스 째 산 비누로 얼굴을 씻어낸 그녀는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에 홍차 한 잔을 놓고

무명천을 씌운 스탠드를 켠 후에, 잡지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세 시간 동안 잡지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그녀는 어느새

다이어리를 꺼내 깨알같은 글씨로 쇼핑해야할 목록을 적고있었다.

당시 그녀의 절박한 심정에 의하면,

그건 쇼핑해야할 목록이 아니라,

쇼핑하지 않으면 인생의 낙오자가 되고 마는

'지옥의 리스트' 와도 같았다.

그녀는 최근 건조해진 피부가

자신의 잘못된 세안습관에 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아로마가 들어간 외제 클린싱 크림과 최신 필링제품을 샀다.

또한 인스턴트 홍차는 웰빙 생활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녀는 유명 디자이너의 딸이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차렸다는

영국산 얼 그레이 샵도 다이어리에 적었다.

그녀의 다이어리에 적힌 것은 그것말고도 많았다.

앤틱이 유행인데 돈은 없고, 결국 택한 것이 앤틱풍 스탠드.

명품 정장의 디자인을 그대로 흉내내 옷을 맞춰준다는 어느 옷수선점.



그녀는 다이어리를 보면서

"지금 당장 일어나 사러가자." 하고 중얼거리다가,

벌면 벌수록 점점 줄어만 가는 통장 잔고가 떠올랐다.

그래서 한 가지만 택하기로 했고, 잡지에서 소개한 가게로 가서

매우 럭셔리한 '짝퉁' 정장만 맞췄다.

잡지 사은품으로 만 원을 벌었지만,

그녀는 방금 30만원을 쓴 것이다.

'하지만 잡지를 보지 않았다면, 

 이 정장을 백 만원이나 주고 샀을지도 몰라.'

하고 생각하면서 여자는 맞춤집 문을 나선다.

이제 홈쇼핑과 인터넷 쇼핑의 유혹만 견뎌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