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빌려간 만화책 연체료 520만원 내라"
까마득히 잊은 도서·비디오 연체료 명목
수십만~수백만원 요구 통지서 날아와
<이 기사는 주간조선 2072호에 게재되었습니다.>
전북 전주에 사는 주부 전모(28)씨는 최근 황당한 통지서를 받았다. 2003년에 빌린 만화책 2권과 비디오 1개를 가져다 주지 않아 연체료가 526만7000원으로 불어났으니 당장 입금하라는 것. 통지서를 보낸 채권추심회사는 “8월 31일까지 아래 계좌번호로 돈을 입금하지 않으면 관할 법원에 지급명령을 신청할 것이고, 신용거래상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고 엄포를 놨다. 전씨는 “만화책의 권당 대여료를 300원, 비디오를 1000원으로 잡아도 대여료가 1600원에 불과하고 책과 비디오 가격을 더해봤자 3만원도 안 되는데 500만원 넘는 연체료라니 말이 안된다”고 했다.
전씨는 지난해에도 연체료 450만원을 내라는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는 “당시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1년 만에 연체료가 70만원 넘게 늘어났고, 내지 않으면 재산을 압류하겠다는 말에 가슴이 조마조마하다”며 “대여점에 연락했지만 이미 폐업한 상태라 6년 전에 빌린 비디오를 진짜 갖다 주지 않았는지조차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 ▲ 일러스트 한규하
최근 전씨처럼 ‘연체료 폭탄 추심’을 당하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대여점에서 빌린 책이나 DVD, 비디오를 돌려주지 않았으니 거액의 연체료를 내라는 통지서가 날아오는 것이다. 요즘 인터넷 포털 게시판에는 연체료 통지서를 받은 소비자들의 질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오래전에 빌려 기억도 없는데 물어내라는 게 말이 되느냐”는 하소연이나 “빌린 기억은 나는데 한번도 달라는 말이 없다가 갑자기 연체료 수백만원을 내라니 말이 안된다”는 푸념이 대부분이다.
이번 사태는 얼핏 보면 폐업한 도서·비디오 대여점들이 연체료를 일부라도 회수하기 위해 신용정보사에 채권을 넘겨 추심을 위임한 것으로 보인다. 어려워진 경제 상황을 반영하듯 적은 금액의 도서·비디오 연체료도 악착같이 받아내는 세상이 됐다는 식의 해석이 가능하다. 하지만 취재 결과 이번 사태에는 일반인의 법에 대한 무지를 악용한 상술과 불법성이 엿보인다.
최근 인터넷에 구체적 사례가 올라온 ‘연체료 폭탄 추심’ 통지서는 대부분 L자산관리대부 주식회사가 보낸 것들이다.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한 무료법률상담 카페에는 이 회사에서 통지서를 받은 사람들의 사연이 숱하게 올라와 있다. 통지서를 받은 사람들의 연령대는 10대 청소년, 20대 주부, 30대 직장인 등 다양하다.
미성년자인 B(여·19)씨는 2002년에 빌린 만화책 4권에 대한 연체료로 130만원을 내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는 “너무 어려서 기억도 나지 않지만 부모님께 여쭤봐도 전혀 모르는 사실이라고 하니 펄쩍 뛸 노릇”이라면서 “가까스로 편지를 보낸 회사에 전화가 닿아 따졌더니 ‘20만원으로 합의해준다’고 해서 더 황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관할 경찰서를 찾아갔지만 성의 없는 답변만 들어서 너무 답답하다”며 “학생 신분에서 130만원을 갚는다는 건 말도 안되지만 신용정보가 남는다니 찜찜하다”고 하소연했다.
군인이라는 ID yongsuk86 역시 “말년휴가를 나와보니 손해배상금 내라고 뭐가 날아와 있었다”며 “안 가져다준 건 잘못이지만 연체료 20만원은 어이가 없다”고 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라는 ID june4322은 “DVD 한 장을 반납하지 않았다고 손해보상금 12만5500원과 이자 4만7449원, 합계 17만2949원이 청구됐다”면서 “한 달 전 통보를 받은 친구녀석은 어머니께서 10만원을 물어줬는데도 다시 이자까지 붙인 채무금을 L사 명의의 통장으로 보내라는 통지서가 날아왔다고 하더라”고 말했다.
지난 9월 1일 L자산관리대부 주식회사에 수차례 전화를 걸었지만 계속 통화 중이어서 연결이 쉽지 않았다. 한참 만에 전화를 받은 이 회사 유모 대표는 “지난 7월 ‘영화◇◇’ ‘△△랜트’ ‘비디오○○’ 등의 비디오 대여점 본사에서 채권을 매입한 뒤 1300여명에게 통지서를 보냈다”며 “액수를 밝힐 수는 없지만 이미 100여명이 돈을 입금한 상태”라고 말했다. 청구한 액수는 한 사람당 수십만원에서 많게는 900만원까지 다양하다고 했다. “비디오를 안 빌렸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많은데 어떤 기준으로 통지서를 보냈느냐”고 묻자 유 대표는 “비디오 대여점 기록에 의존할 뿐”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일반적으로 비디오 대여점 본사가 지점을 두고 영업을 하다가 망해서 폐업 처리를 하게 되면, 각 지점별로 가지고 있던 상품(책, 비디오, DVD 등)과 함께 연체료에 대한 채권은 본사에 회수된다. L자산관리대부는 비디오 대여점 본사가 M에셋에 팔아넘긴 채권을 다시 사들였다고 한다. 연체료를 물어야 할 고객 1300명에 대한 개인정보가 이때 L사로 넘어온 것이다.
- ▲ 인터넷 무료법률상담 카페에 올라온 ‘연체료 폭탄 추심’ 통지서.
유 대표는 “채권을 정당하게 매입했기 때문에 우리가 연체료에 대해 독촉하고 회수할 권리가 있는 것”이라며 “얼마에 채권을 매입했는지는 알려줄 수 없지만 개인 정보가 아닌 상사채권을 매입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요즘에는 정부에서 여러 가지 정책을 내놔서 카드회사나 은행 빚 같은 금융 추심이 어려워져 연체료 추심을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L사의 채권 추심에는 법적 논란의 여지가 있다. 통상 동산의 사용료 채권에 대해 1년간 권리행사를 하지 않는 경우 소멸시효가 완성하기 때문이다. 책이나 비디오의 대여료 역시 이 기준에 해당한다. 5~6년 전에 빌렸다면 소멸시효가 지나도 한참 지난 셈이다. 이에 대해 유 대표는 “소멸시효는 법원에서 따질 문제”라면서 “우리(L사)는 소멸시효에 대한 기준을 연체료 발생시점이 아닌 비디오 가게의 폐업시점으로 보고 독촉장을 보낸 것”이라고 우겼다.
채권 소멸시효 외에도 L사의 연체료 추심 행위에는 불법 요소가 적지 않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신용정보협회 기경민 국장은 “돈받을 사람이나 회사를 대신해 채무자로부터 돈을 받아주는 것이 신용정보회사의 역할이지만 L사는 비디오 대여점을 대신해 채권 추심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채권을 매입했으므로 신용정보회사가 아니라 일종의 대부업이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L사는 2009년 6월 17일 대부업 등록을 한 대부업체였다. 기 국장은 “채권은 자유롭게 매각할 수 있으므로 법적으로는 하자가 없지만, 이 경우 이자율 자체가 과도하게 부과되어 대부업법에 저촉된다”며 “(유씨의 주장처럼) 책이나 비디오 연체료를 가지고 신용정보 전산망에 등록한다는 것도 말이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솔로몬신용정보 박용권 서울지역본부장은 연체 대여료 추심의 법적 효력과 관련 “채무자의 의사 표현이 중요하다”며 “소멸시효가 끝났다는 건 채권 추심에 대한 권리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뜻이지만 (소멸시효가 끝나도) 채권 자체는 존재하기 때문에 ‘못 갚겠다’는 의사표현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본부장은 “책이나 비디오를 대여했다는 증거가 없고 소멸시효가 끝났다면 ‘못 갚겠다’는 의사표현(내용증명을 서면으로 통보)을 해야 더 이상 채권추심을 할 수 없는 것”이라면서 “만약 의사표현을 했는데도 추심을 계속 하면 불법”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시효가 지난 채권임에도 강압적인 법적조치를 들먹여서 채무자를 겁먹게 하는 것은 L사의 잘못”이라면서 “비디오 대여점에서 여러 군데에 채권을 팔아넘기면 이중으로 채권추심이 들어오기도 하고 이미 연체료를 갚은 사람에게도 독촉을 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된다”고 주의를 당부했다.
- ▲ 비디오·DVD 대여점에서 DVD를 고르는 손님들. 최근 수년 전 빌린 도서, 비디오, DVD에 대한 연체료를 내라는 불법 추심이 늘고 있다. / photo 조선일보 DB
H&P법률사무소 홍봉주 변호사는 L사의 연체료 추심에 대해 “법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일반 시민을 상대로 한 악질적인 범죄”라고 잘라 말했다. 홍봉주 변호사는 “L자산관리대부 회사는 정당한 근거도 없이 억지를 부리는 것”이라면서 “싼값에 채권을 사들여 말도 안 되는 연체료를 달라고 한 다음 주면 받고, 아니면 포기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홍 변호사는 “주식회사인 L사는 민간인에게 채권을 추심할 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에 통지서를 보내는 자체가 불법”이라면서 “나아가 채권 양도 자체가 없었다면 사기죄에도 해당한다”고 말했다. 그는 “(L사 대표인) 유씨가 주장하는 것처럼 대여점의 폐점 시점에서 소멸시효가 발생한다는 것은 억지”라면서 “비디오를 빌려준 시점에서부터 따져야 한다”고 반박했다.
홍봉주 변호사는 특히 “채권을 매입했다는 주장은 권리를 넘긴 양도(讓渡)인과 권리를 받은 양수(讓受)인 사이에서만 효력이 발생하기 때문에 L사에 연체료를 지불하고 난 후 비디오 업체에서 다시 연체료를 요구했을 때 이중으로 지불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며 “의심이 될 경우 무조건 돈을 보내지 말고 관할 경찰서 지능팀에 신고하거나 법적인 도움부터 받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연체료 폭탄 추심’ 통지서가 논란을 빚자 경찰도 진상파악에 나섰다. 지난 9월 1일 송파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은 “최근 비디오·도서 연체료 추심과 관련된 민원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면서 “정확히 어떤 사건인지 파악하기 위해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 출처 : 인터넷 조선일보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9/10/2009091001741.htm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