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아침에 짐 챙겨서 홀로 서울로 가 버렸었다.
별로 한 것도 없이 괜히 누나에게 부끄러웠다.
책 몇가지와 빨아야 할 옷들만 챙겨서 서울로 왔었다.
전철에서 계속 잤다.
알콜 냄새가 나지 않았나 모르겠다.
자는 동안 삐삐가 여러 통 왔었다.
아직도 내겐 은정이 누나 말고는 삐삐 쳐주는 사람이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기에 외면하고 그냥 잤다.
집에 도착해서 들고 왔던 옷 가지들을 세탁기에 넣고 엄마가 차려 주시는 점심을 맛있게 들고 있는 데 또 삐삐가 왔다.
음성이다.
"너 도대체 어디 간거야. 너 혼자 서울 갔으면 죽을 줄 알어. 십분 내로 연락해."
누군지 밝히지도 않고 자기 말만 하는 누나가 존경스럽다.
말투가 점점 날 닮아 간다.
나 쌈 잘한다고 자주 말해 주었는데, 뭘 믿고 저런 협박을 하는 지 모르겠다.
"왜요?"
"서울 안 갈거야?"
"여기 서울인데요"
"뭐야? 너 혼자 간 거야 그럼?"
"네."
"그래 알았어. 전화 끊어."
"누나는 언제 올라 올거에요?"
"알 필요 없잖아."
"살펴 오세요."
누나의 음성에 서운함이 많았다.
내가 서울에 있다는 말을 듣고 내 뱉은 누나의 음성은 아주 차가웠다.
누나가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다시 전화를 할까?
어제 내 자는 모습이 누나에게 어떤 느낌으로 들어 갔을까?
나는 부끄럽다.
여름 방학이다.
더운 날씨는 그냥 설레임 뿐이다.
추억을 되짚기 보다는 주위의 사람들과 여름의 더운 풍경 속에서 재미있게 어울릴 것이라는 설레임 뿐이
다.
여름은 화려한 계절이다.
화려한 설레임으로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 그렇게 크지는 않다.
지이잉!
이것은 또 삐삐가 왔다는 신호?
누굴까, 또 누나다.
전화 끊을 때 누나의 음성이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 투였다.
"왜요?"
"나 짐이 많아서 혼자 못 가겠어."
방학을 했을 터이니 서울 올라오는 학생들이 많을 것이다.
동아리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 보지.
동아리 방에 가서 누나가 부탁을 하면 거절할 남학생 하나도 없다.
동아리 남학생들, 선후배 관계없이 자기들끼리 있을 땐 은정이 누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할 지라도 누나 앞에선 다 생긋생긋 웃는다.
남자들이 예쁜 여자들에게 약하다는 안타까운 현실은 어쩔수 없나 보다.
"동아리 방에 가면..."
"너 왜 그래? 나에게 화난거 있어?"
없는디...
"에이쒸, 밥 한끼 사줄거에요?"
"갑자기 밥 얘기는 왜 하는거야?"
"짐 챙겨서 기다리고 있어요. 한 시간 후에 그 쪽으로 갈게요."
"진짜?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운전하고 온다는 말이지?"
"네."
"누나가 그럼 방학때도 자주 만나 줄게."
만나 줄게?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만나 주는게 아니다.
그 사람이 보고 싶어 만나는 것이다.
저런 말에도 내가 신경을 쓴 다는 것은 아마도 내 마음이 거의 한계까지 왔나 보다.
내 요즘 연상은 관심없다.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누나! 나 누나를 사랑하게 된 거 같아요.""
""푸하하핫!""
누나가 배를 잡고 웃는 것을 보면 나 자살해 버릴 것 같다.
연상이면 좀 어리숙한 여자이던지, 아니면 나이라도 아주 어려서 세상 물정이나 남자에 대해 잘 모르는 소녀라던지, 많고 많은 여자 중에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 주는 여자가 하필이면 다 연상이고 잘나 보이는 여자들이냐.
정희 누나는 그래도 좀 만만했다.
경운기 뒤를 졸졸 따라 가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본다.
나도 잘난 남자다.
은정이 누나의 연인이 될 수 있다.
젠장, 한 달안에 차일 것 같다.
누나, 동생이니까 지금은 이렇게 친하지만 누나가 제 짝을 만나면 나는 그냥 지나쳐 버릴 것 같다.
경운기를 운전하는 아저씨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앞 질러 가주지.
그래 내가 경운기라면 누나는 고급 승용차일 것이다.
이렇게 쉽게 앞질러 멀어져 버리는 걸.
백미러에서 점점 조그맣게 사라져 버리는 경운기가 애처롭다.
박 철수, 왜 자꾸 쓸데 없는 생각을 하냐.
지금 누나를 만나러 가고 있잖아.
경운기 뒤에 오래 붙어 있었더니 예상 시간 보다 좀 더 걸렸다.
누나가 오피스텔(?) 건물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백 같은 거 하나, 멜빵 가방 하나, 그리고 한 손에 들고 있는 옷이 들어 간 두툼하지만 가벼울 것 같은 종이 가방 두개.
혹시 저게 자기가 챙긴 짐이 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누나는 나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뛰어 와, 뒷 좌석에다 짐을 던져 놓고 내 옆으로 와 앉았다.
문 열어 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는 걸로 봐서 불치의 공주병까진 조금 여유가 있나 보다.
"짐 가지러 안 가요?"
"저게 다야."
"짐이 많다면서요?"
"많잖아."
"저거 들고 혼자 전철 타기가 힘들까요?"
"응."
우리 나라에선 치유가 불가능하겠다.
내가 아무리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우기지만 아직 초보 단계인데, 옆에서 말을 참 많이 시키네요.
"오늘 아침에 왜 그냥 갔어?"
"어디요?"
"내 방에서 왜 그냥 나갔냐구?"
"남자가 여자 방에서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스프라도 끓여 먹여 보낼려구 했더니. 너 머리 안 아파?"
"아직 제 상태는 아니에요. 혹시 음주 단속하면 걸릴 지도 몰라요."
"낮에 단속하는 경우가 어딨니."
"내 방가서 자라고 깨우지 그랬어요."
"물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는데도 일어 나지 않던데 뭘."
"물 수건으로 제 얼굴을 닦았어요."
"응."
"왜요?"
"땀이 나고, 술 마신 거 때문에 좀 지저분 했어."
그건 내가 했어야 되는 건디...
"누나가 베개 받쳐 주고 이불 덮어 준거에요?"
"응. 너 술 주정 하지 않고 그냥 애기처럼 귀엽게 잠만 자더라? 그래 자는 모습이 아기 같기도 했어."
저 여자가 슬픈 말을 했습니다.
이제는 동생도 모자라 아기라고 하는군요.
나는 누나에게 있어 어려 보이는 존재일 뿐이가 봅니다.
성숙해 보이기 위해 교육까지 받고 갔었는데, 난 더 어린 모습으로만 비추어 졌나 봅니다.
"누나 술이 아주 쎈가 봐요?"
"아니야."
"누나!"
"왜?"
"누나가 좋아하는 남성상은 어떤거에요?"
"그건 갑자기 왜?"
"그냥."
"내가 생각하기로 좋아하는 남성상은 만들어지는 것 같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마도 자기가 좋아하는 남성상이 그 사람을 닮아 가겠지."
"연하도 괜찮을까요?"
"왜? 이젠 연상에도 관심이 있나 보지? 너 나에게 맘이 있지?"
"착각하지 마요."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생각해 보지 뭐."
누나를 집에다 모셔 드렸다.
아직 이런 표현 밖에는 쓸 수 없다.
누나를 한 동안 만나지 않았다.
7월달에 누나를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내가 일주일 간은 피해 있었고, 누나가 3주간 독일로 떠나 있었다.
좋겄다 독일에 가까운 친척도 있고... 며칠 간 피해 있으려고 했던 건 내 마음이었지만 삼주일간은 너무 길다.
누나는 전화 한 통으로 외국으로 떠났다.
곧 올 것이지만 멀리 있다 생각하니 더 그립다.
방학 때 자주 만나 준다더니, 언제 만나 주려고 외국을 나갔더냐.
외국 간다는 말도 없었는데...
"갑자기 왜 외국을 나가요?"
"할아버지가 오라고 했어. 그래서 갑자기 나가게 됐어."
"잘 갔다 와요."
"나 보고 싶을텐데 어쩌니?"
"누나 혼자 다 생각하지 마요."
"갔다 와서 보자."
왜 나는 은정이 누나 말고 자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드문거냐?
은정이 누나하고 붙어 다녔으니 더 이상 발전이 없었던 거 같다.
"약재실이 상당히 넓네요."
"응. 차한잔 끓여 줄까?"
"네, 누나 혼자 당직 서는 거에요?"
"아니 한 명 더 있어. 그 언니는 외래에 나가 있어."
"계속 이 병원에 있을 거에요?"
"모르겠다. 친한 언니가 한 명 있는데 자기 아파트 단지 내에 약국을 차릴 생각이래. 나랑 같이 하자고 해서 마음이 동요되고 있긴 해. 여긴 얽매인 시간이 많거든."
일요일 날, 정희 누나가 당직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종일 거기 있었던 적이 있다.
자판기 컵에 자판기 커피보다 맛이 없는 커피를 담고 사람들이 텅 빈 종합병원의 약사부에서 정희 누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여긴 대부분 여자죠?"
"응. 과장님하고 다른 한 분을 제외하곤 모두 여자들이야."
"좋겠다."
"뭐가 좋아. 참, 너 요즘도 은정이 만나지?"
"은정이 누나 독일 갔잖아요."
"그래서 심심해서 나 찾아 온거지?"
맞는 말인거 같기도 하다.
은정이 누나 덕분에 정희 누나는 많이 잊혀지고 있었다.
은정이 누나가 있었더라면 어쩌면 찾아 오지 않았을 것이다.
"누나가 보고 싶어 찾아 왔는데 그런 말 하면 섭하지."
정희 누나는 대화를 하다가 간혹 전화를 받았으며 약들을 챙기러 자리를 뜨기고 했다.
간호사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약을 찾으러 오기도 했으며, 아줌마가 쓰레기 비울거 없냐고 물어 오는 경우도 있었다.
"요즘 은정이와 친한 남자 안 보이지?"
"응. 나랑 자주 다녔어요. 삼월경에 동기 한 명하고 자주 붙어 다니던데, 깨졌어요."
"동기 누구?"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하여튼 그 새끼 때문에 내가 파출소까지 끌려 갔다는 거 아닙니까."
"푸후, 그건 은정이에게 들었다. 동윤이도 괜찮은 앤데."
"다 알면서 내게 왜 물은거야? 은정이 누나가 따로 사귀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걸 왜 내게 묻니? 은정인 봄이 되면 마음이 좀 오락가락 하긴 해. 작년 가을 이후엔 계속 너만 만났지?"
"그 승주씬가 하는 사람하고는 몇 번 만났을걸요."
"거의 깨졌지 뭐. 작년 9월 이후에는 둘이 한 번도 안 만났어. 그건 내가 알아."
은정이 누나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귀가 솔깃해 진다.
관심 때문인가?
"누나?"
"왜?"
"누나는 연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너에 대해서 얘기해 달라는 거지?"
"에?"
"니가 날 좋아 했던 거 알아. 그리고 누나에게 가지는 감정이 아니라 여자에게 가지는 감정이 있었다는 것도 알아. 은정이에게 들었어."
"그 여자가 진짜."
"후훗, 내가 니 마음을 장난처럼 받아 들였다고 상처 받았었니?"
"조금."
"니가 나에게 장난처럼 대했다고 생각지는 않니? 자기가 진지하지 못하면 상대방도 진지해 지기 어려운 거야. 니가 진지했다면 나도 흔들렸을거야.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네 태도를 보고 날 누나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어. 그만큼 넌 장난스러웠어."
"누나는 애인이 있었잖아요."
"그거하고는 상관이 없어.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없고와는 별개의 문제야."
"나쁜 여자네. 나는 그 방법 밖에는 몰랐어요."
"훗, 너 은정이에게 맘이 많이 갔구나."
"에?"
"나에게 많이 담담하잖아. 예전보다 더 담담해진 거 같애."
나이 많은 여자들에겐 마음을 잘 들키는군요.
"내가 장난스럽게 말했던 것은 넌지시 내 맘을 표현한 것과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 보기 위한 거였어요. 누나가 한 번쯤이라도 진지하게 내 마음을 알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후, 그래. 나는 너보다 철규씨가 더 좋아. 하지만 니가 은정이에게 마음이 있다면 나에게 하던 식으로는 하지 마."
"내가 은정이 누나에게 마음이 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응. 너 저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나 만나서 은정이 얘기만 하잖아."
"누나가 먼저 꺼냈잖아요."
"꺼내긴 내가 먼저 꺼내었지만, 너도 기다렸다는 듯이 은정이 얘기만 하고 있잖아."
"우쒸. 은정이 누나는 연하를 좋아할까요?"
"그냥, 널 좋아하게 될까,라고 물어라. 은정이 너 좋아 해."
"그게 아니고, 내가 최근들어 은정이 누나에게 감정이 생기는 것 같아서요. 이거 누나에게 말하면 절대 안돼요."
"알았어. 은정이가 호감을 가지는 사람들을 보면 연하에게 마음을 줄 것 같지는 않아. 은정인 성숙해 보이고 적극적인 사람에게 기댈려는 경향이 있거든. 근데 은정이가 진짜 좋아한 승주씨는 또 그게 아니야. 내가 그 둘을 보기에 은정이가 오히려 승주씨를 감싸주는 입장이었어. 둘이 만나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승주씨가 은정이 보다 약해 보였어."
"그거 말고 연하에게 맘을 줄 것 같냐고 묻잖아요."
"넌 은정이를 잘 챙겨 주는 편이야. 연하니까 은정이가 또 감싸주고 싶어 하는 맘이 생길거야. 서로 서로 챙겨주고, 감싸주고 하면 뭐 쉽게 연인 사이 될 수도 있겠네."
"에이, 연하에 대해 묻는데 진짜. 그리고 말처럼 쉽게 되면 사람 사귀기 참 편하겠다. 현실 문제도 있잖아요."
"은정이 걔는 약간 비현실적이야. 자기 생활에 있어 물질적으로 부족했던 게 없는 애라 아주 이상적으로 사람을 평가 해. 사회에 나가서도 자기 힘으로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애거든. 맘에 들기만 하면 그 사람의 배경이나 다른 조건은 안 따질거야 아마. 아직 어려서 그런가?"
"연하에 대해서 묻잖아요 나는."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해 주었더니. 연하도 다른 조건에 포함되는 거 아닌가? 은정이도 요즘 전화를 하면 네 얘기를 많이 해."
"자주 어울렸잖아요. 동생, 누나 사이지만요."
"너 은정이랑 붙어 다닌게 벌써 일년하고도 반이지? 은정이에겐 그거 대단하거다. 나도 솔직히 좀 놀랬어. 내가 니 칭찬을 좀 했었지만 그렇다고 은정이가 너와 그렇게 붙어 다닐줄은 몰랐어. 그리고 일년 반이야. 승주를 제외하고 그렇게 오래 붙어 다닌 남자는 니가 처음이거든."
"누나, 동생이라서 그런거라니까요."
"그럴수도 있겠지. 은정이가 좀 매력적이긴 하지?"
"응."
"확 잡아 버려. 걔 버릇도 좀 고쳐주고."
"무슨 소리 하는거야?"
"감정이 생기고 있다며? 은정이도 비슷할거야."
"제가 연하거든요."
"연하가 뭐 어때. 확 꼬셔 버려. 널 쉽게 버리지는 못할거야. 걔가 하는 얘기를 들어 보면 확실히 그럴거야."
"내가 많이 부족한데요. 특히나 연한데."
"너 잘 났어. 미팅 나가서 깨졌다고 사기가 많이 죽었지? 하지만 나는 너에게 많이 반해 있었거든?"
"하하, 그렇지요. 절 좀 아는 사람들은 다 나에게 반하지요."
"후후, 그래. 자기가 맘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을 표현하는거야."
"그래, 자신감을 가지자. 하지만 내가 은정이 누나에게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고 있다는 거 누나만 알고 있어요. 은정이 누나에게 이 사실을 말하면 누나고 뭐고 없어요?"
"후후, 알았어."
정희 누나에게서 용기를 얻었다.
그 용기로 인해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감은 딱 일주일을 갔다.
은정이 누나는 자신감이 꺽일 때까지 돌아 오지 않았다.
은정이 누나는 정희 누나하고 많이 틀릴 것 같다.
정희 누나는 한 번 좋아하면 끝까지 좋아하는 타입이지만 은정이 누나는 좀 다르다.
상대해야 할 주위의 남자들도 다르다.
그리고 은정이 누나가 진지한 모습을 보였던 적이 몇 번 있지만 그건 정희 누나가 장난스런 모습을 보일 때보다 더 어색했다.
누나는 내일 온다.
별로 한 것도 없이 괜히 누나에게 부끄러웠다.
책 몇가지와 빨아야 할 옷들만 챙겨서 서울로 왔었다.
전철에서 계속 잤다.
알콜 냄새가 나지 않았나 모르겠다.
자는 동안 삐삐가 여러 통 왔었다.
아직도 내겐 은정이 누나 말고는 삐삐 쳐주는 사람이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기에 외면하고 그냥 잤다.
집에 도착해서 들고 왔던 옷 가지들을 세탁기에 넣고 엄마가 차려 주시는 점심을 맛있게 들고 있는 데 또 삐삐가 왔다.
음성이다.
"너 도대체 어디 간거야. 너 혼자 서울 갔으면 죽을 줄 알어. 십분 내로 연락해."
누군지 밝히지도 않고 자기 말만 하는 누나가 존경스럽다.
말투가 점점 날 닮아 간다.
나 쌈 잘한다고 자주 말해 주었는데, 뭘 믿고 저런 협박을 하는 지 모르겠다.
"왜요?"
"서울 안 갈거야?"
"여기 서울인데요"
"뭐야? 너 혼자 간 거야 그럼?"
"네."
"그래 알았어. 전화 끊어."
"누나는 언제 올라 올거에요?"
"알 필요 없잖아."
"살펴 오세요."
누나의 음성에 서운함이 많았다.
내가 서울에 있다는 말을 듣고 내 뱉은 누나의 음성은 아주 차가웠다.
누나가 그냥 전화를 끊어 버렸다.
다시 전화를 할까?
어제 내 자는 모습이 누나에게 어떤 느낌으로 들어 갔을까?
나는 부끄럽다.
여름 방학이다.
더운 날씨는 그냥 설레임 뿐이다.
추억을 되짚기 보다는 주위의 사람들과 여름의 더운 풍경 속에서 재미있게 어울릴 것이라는 설레임 뿐이
다.
여름은 화려한 계절이다.
화려한 설레임으로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 그렇게 크지는 않다.
지이잉!
이것은 또 삐삐가 왔다는 신호?
누굴까, 또 누나다.
전화 끊을 때 누나의 음성이 다시는 연락하지 않을 투였다.
"왜요?"
"나 짐이 많아서 혼자 못 가겠어."
방학을 했을 터이니 서울 올라오는 학생들이 많을 것이다.
동아리 사람들에게 부탁을 해 보지.
동아리 방에 가서 누나가 부탁을 하면 거절할 남학생 하나도 없다.
동아리 남학생들, 선후배 관계없이 자기들끼리 있을 땐 은정이 누나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할 지라도 누나 앞에선 다 생긋생긋 웃는다.
남자들이 예쁜 여자들에게 약하다는 안타까운 현실은 어쩔수 없나 보다.
"동아리 방에 가면..."
"너 왜 그래? 나에게 화난거 있어?"
없는디...
"에이쒸, 밥 한끼 사줄거에요?"
"갑자기 밥 얘기는 왜 하는거야?"
"짐 챙겨서 기다리고 있어요. 한 시간 후에 그 쪽으로 갈게요."
"진짜? 진작 그렇게 나올 것이지. 운전하고 온다는 말이지?"
"네."
"누나가 그럼 방학때도 자주 만나 줄게."
만나 줄게?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은 만나 주는게 아니다.
그 사람이 보고 싶어 만나는 것이다.
저런 말에도 내가 신경을 쓴 다는 것은 아마도 내 마음이 거의 한계까지 왔나 보다.
내 요즘 연상은 관심없다.라는 말을 거의 하지 않는다.
""누나! 나 누나를 사랑하게 된 거 같아요.""
""푸하하핫!""
누나가 배를 잡고 웃는 것을 보면 나 자살해 버릴 것 같다.
연상이면 좀 어리숙한 여자이던지, 아니면 나이라도 아주 어려서 세상 물정이나 남자에 대해 잘 모르는 소녀라던지, 많고 많은 여자 중에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 주는 여자가 하필이면 다 연상이고 잘나 보이는 여자들이냐.
정희 누나는 그래도 좀 만만했다.
경운기 뒤를 졸졸 따라 가면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해 본다.
나도 잘난 남자다.
은정이 누나의 연인이 될 수 있다.
젠장, 한 달안에 차일 것 같다.
누나, 동생이니까 지금은 이렇게 친하지만 누나가 제 짝을 만나면 나는 그냥 지나쳐 버릴 것 같다.
경운기를 운전하는 아저씨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앞 질러 가주지.
그래 내가 경운기라면 누나는 고급 승용차일 것이다.
이렇게 쉽게 앞질러 멀어져 버리는 걸.
백미러에서 점점 조그맣게 사라져 버리는 경운기가 애처롭다.
박 철수, 왜 자꾸 쓸데 없는 생각을 하냐.
지금 누나를 만나러 가고 있잖아.
경운기 뒤에 오래 붙어 있었더니 예상 시간 보다 좀 더 걸렸다.
누나가 오피스텔(?) 건물 현관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백 같은 거 하나, 멜빵 가방 하나, 그리고 한 손에 들고 있는 옷이 들어 간 두툼하지만 가벼울 것 같은 종이 가방 두개.
혹시 저게 자기가 챙긴 짐이 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누나는 나를 보자 반가운 얼굴로 뛰어 와, 뒷 좌석에다 짐을 던져 놓고 내 옆으로 와 앉았다.
문 열어 달라는 소리는 하지 않는 걸로 봐서 불치의 공주병까진 조금 여유가 있나 보다.
"짐 가지러 안 가요?"
"저게 다야."
"짐이 많다면서요?"
"많잖아."
"저거 들고 혼자 전철 타기가 힘들까요?"
"응."
우리 나라에선 치유가 불가능하겠다.
내가 아무리 베스트 드라이버라고 우기지만 아직 초보 단계인데, 옆에서 말을 참 많이 시키네요.
"오늘 아침에 왜 그냥 갔어?"
"어디요?"
"내 방에서 왜 그냥 나갔냐구?"
"남자가 여자 방에서 해가 중천에 뜰 때까지 자고 있을 수는 없잖아요."
"스프라도 끓여 먹여 보낼려구 했더니. 너 머리 안 아파?"
"아직 제 상태는 아니에요. 혹시 음주 단속하면 걸릴 지도 몰라요."
"낮에 단속하는 경우가 어딨니."
"내 방가서 자라고 깨우지 그랬어요."
"물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 주었는데도 일어 나지 않던데 뭘."
"물 수건으로 제 얼굴을 닦았어요."
"응."
"왜요?"
"땀이 나고, 술 마신 거 때문에 좀 지저분 했어."
그건 내가 했어야 되는 건디...
"누나가 베개 받쳐 주고 이불 덮어 준거에요?"
"응. 너 술 주정 하지 않고 그냥 애기처럼 귀엽게 잠만 자더라? 그래 자는 모습이 아기 같기도 했어."
저 여자가 슬픈 말을 했습니다.
이제는 동생도 모자라 아기라고 하는군요.
나는 누나에게 있어 어려 보이는 존재일 뿐이가 봅니다.
성숙해 보이기 위해 교육까지 받고 갔었는데, 난 더 어린 모습으로만 비추어 졌나 봅니다.
"누나 술이 아주 쎈가 봐요?"
"아니야."
"누나!"
"왜?"
"누나가 좋아하는 남성상은 어떤거에요?"
"그건 갑자기 왜?"
"그냥."
"내가 생각하기로 좋아하는 남성상은 만들어지는 것 같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아마도 자기가 좋아하는 남성상이 그 사람을 닮아 가겠지."
"연하도 괜찮을까요?"
"왜? 이젠 연상에도 관심이 있나 보지? 너 나에게 맘이 있지?"
"착각하지 마요."
"조금 더 시간이 흐르면 생각해 보지 뭐."
누나를 집에다 모셔 드렸다.
아직 이런 표현 밖에는 쓸 수 없다.
누나를 한 동안 만나지 않았다.
7월달에 누나를 본 것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내가 일주일 간은 피해 있었고, 누나가 3주간 독일로 떠나 있었다.
좋겄다 독일에 가까운 친척도 있고... 며칠 간 피해 있으려고 했던 건 내 마음이었지만 삼주일간은 너무 길다.
누나는 전화 한 통으로 외국으로 떠났다.
곧 올 것이지만 멀리 있다 생각하니 더 그립다.
방학 때 자주 만나 준다더니, 언제 만나 주려고 외국을 나갔더냐.
외국 간다는 말도 없었는데...
"갑자기 왜 외국을 나가요?"
"할아버지가 오라고 했어. 그래서 갑자기 나가게 됐어."
"잘 갔다 와요."
"나 보고 싶을텐데 어쩌니?"
"누나 혼자 다 생각하지 마요."
"갔다 와서 보자."
왜 나는 은정이 누나 말고 자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드문거냐?
은정이 누나하고 붙어 다녔으니 더 이상 발전이 없었던 거 같다.
"약재실이 상당히 넓네요."
"응. 차한잔 끓여 줄까?"
"네, 누나 혼자 당직 서는 거에요?"
"아니 한 명 더 있어. 그 언니는 외래에 나가 있어."
"계속 이 병원에 있을 거에요?"
"모르겠다. 친한 언니가 한 명 있는데 자기 아파트 단지 내에 약국을 차릴 생각이래. 나랑 같이 하자고 해서 마음이 동요되고 있긴 해. 여긴 얽매인 시간이 많거든."
일요일 날, 정희 누나가 당직한다는 소식을 듣고 하루 종일 거기 있었던 적이 있다.
자판기 컵에 자판기 커피보다 맛이 없는 커피를 담고 사람들이 텅 빈 종합병원의 약사부에서 정희 누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오붓한 시간을 보냈다.
"여긴 대부분 여자죠?"
"응. 과장님하고 다른 한 분을 제외하곤 모두 여자들이야."
"좋겠다."
"뭐가 좋아. 참, 너 요즘도 은정이 만나지?"
"은정이 누나 독일 갔잖아요."
"그래서 심심해서 나 찾아 온거지?"
맞는 말인거 같기도 하다.
은정이 누나 덕분에 정희 누나는 많이 잊혀지고 있었다.
은정이 누나가 있었더라면 어쩌면 찾아 오지 않았을 것이다.
"누나가 보고 싶어 찾아 왔는데 그런 말 하면 섭하지."
정희 누나는 대화를 하다가 간혹 전화를 받았으며 약들을 챙기러 자리를 뜨기고 했다.
간호사같이 보이는 사람들이 약을 찾으러 오기도 했으며, 아줌마가 쓰레기 비울거 없냐고 물어 오는 경우도 있었다.
"요즘 은정이와 친한 남자 안 보이지?"
"응. 나랑 자주 다녔어요. 삼월경에 동기 한 명하고 자주 붙어 다니던데, 깨졌어요."
"동기 누구?"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하여튼 그 새끼 때문에 내가 파출소까지 끌려 갔다는 거 아닙니까."
"푸후, 그건 은정이에게 들었다. 동윤이도 괜찮은 앤데."
"다 알면서 내게 왜 물은거야? 은정이 누나가 따로 사귀는 사람이 있을까요?"
"그걸 왜 내게 묻니? 은정인 봄이 되면 마음이 좀 오락가락 하긴 해. 작년 가을 이후엔 계속 너만 만났지?"
"그 승주씬가 하는 사람하고는 몇 번 만났을걸요."
"거의 깨졌지 뭐. 작년 9월 이후에는 둘이 한 번도 안 만났어. 그건 내가 알아."
은정이 누나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면 귀가 솔깃해 진다.
관심 때문인가?
"누나?"
"왜?"
"누나는 연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요?"
"너에 대해서 얘기해 달라는 거지?"
"에?"
"니가 날 좋아 했던 거 알아. 그리고 누나에게 가지는 감정이 아니라 여자에게 가지는 감정이 있었다는 것도 알아. 은정이에게 들었어."
"그 여자가 진짜."
"후훗, 내가 니 마음을 장난처럼 받아 들였다고 상처 받았었니?"
"조금."
"니가 나에게 장난처럼 대했다고 생각지는 않니? 자기가 진지하지 못하면 상대방도 진지해 지기 어려운 거야. 니가 진지했다면 나도 흔들렸을거야. 나는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다가도 네 태도를 보고 날 누나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판단했어. 그만큼 넌 장난스러웠어."
"누나는 애인이 있었잖아요."
"그거하고는 상관이 없어.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은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없고와는 별개의 문제야."
"나쁜 여자네. 나는 그 방법 밖에는 몰랐어요."
"훗, 너 은정이에게 맘이 많이 갔구나."
"에?"
"나에게 많이 담담하잖아. 예전보다 더 담담해진 거 같애."
나이 많은 여자들에겐 마음을 잘 들키는군요.
"내가 장난스럽게 말했던 것은 넌지시 내 맘을 표현한 것과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 보기 위한 거였어요. 누나가 한 번쯤이라도 진지하게 내 마음을 알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후, 그래. 나는 너보다 철규씨가 더 좋아. 하지만 니가 은정이에게 마음이 있다면 나에게 하던 식으로는 하지 마."
"내가 은정이 누나에게 마음이 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응. 너 저번에도 그랬고 이번에도 나 만나서 은정이 얘기만 하잖아."
"누나가 먼저 꺼냈잖아요."
"꺼내긴 내가 먼저 꺼내었지만, 너도 기다렸다는 듯이 은정이 얘기만 하고 있잖아."
"우쒸. 은정이 누나는 연하를 좋아할까요?"
"그냥, 널 좋아하게 될까,라고 물어라. 은정이 너 좋아 해."
"그게 아니고, 내가 최근들어 은정이 누나에게 감정이 생기는 것 같아서요. 이거 누나에게 말하면 절대 안돼요."
"알았어. 은정이가 호감을 가지는 사람들을 보면 연하에게 마음을 줄 것 같지는 않아. 은정인 성숙해 보이고 적극적인 사람에게 기댈려는 경향이 있거든. 근데 은정이가 진짜 좋아한 승주씨는 또 그게 아니야. 내가 그 둘을 보기에 은정이가 오히려 승주씨를 감싸주는 입장이었어. 둘이 만나서는 어땠는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승주씨가 은정이 보다 약해 보였어."
"그거 말고 연하에게 맘을 줄 것 같냐고 묻잖아요."
"넌 은정이를 잘 챙겨 주는 편이야. 연하니까 은정이가 또 감싸주고 싶어 하는 맘이 생길거야. 서로 서로 챙겨주고, 감싸주고 하면 뭐 쉽게 연인 사이 될 수도 있겠네."
"에이, 연하에 대해 묻는데 진짜. 그리고 말처럼 쉽게 되면 사람 사귀기 참 편하겠다. 현실 문제도 있잖아요."
"은정이 걔는 약간 비현실적이야. 자기 생활에 있어 물질적으로 부족했던 게 없는 애라 아주 이상적으로 사람을 평가 해. 사회에 나가서도 자기 힘으로 잘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애거든. 맘에 들기만 하면 그 사람의 배경이나 다른 조건은 안 따질거야 아마. 아직 어려서 그런가?"
"연하에 대해서 묻잖아요 나는."
"자신감을 가지라고 말해 주었더니. 연하도 다른 조건에 포함되는 거 아닌가? 은정이도 요즘 전화를 하면 네 얘기를 많이 해."
"자주 어울렸잖아요. 동생, 누나 사이지만요."
"너 은정이랑 붙어 다닌게 벌써 일년하고도 반이지? 은정이에겐 그거 대단하거다. 나도 솔직히 좀 놀랬어. 내가 니 칭찬을 좀 했었지만 그렇다고 은정이가 너와 그렇게 붙어 다닐줄은 몰랐어. 그리고 일년 반이야. 승주를 제외하고 그렇게 오래 붙어 다닌 남자는 니가 처음이거든."
"누나, 동생이라서 그런거라니까요."
"그럴수도 있겠지. 은정이가 좀 매력적이긴 하지?"
"응."
"확 잡아 버려. 걔 버릇도 좀 고쳐주고."
"무슨 소리 하는거야?"
"감정이 생기고 있다며? 은정이도 비슷할거야."
"제가 연하거든요."
"연하가 뭐 어때. 확 꼬셔 버려. 널 쉽게 버리지는 못할거야. 걔가 하는 얘기를 들어 보면 확실히 그럴거야."
"내가 많이 부족한데요. 특히나 연한데."
"너 잘 났어. 미팅 나가서 깨졌다고 사기가 많이 죽었지? 하지만 나는 너에게 많이 반해 있었거든?"
"하하, 그렇지요. 절 좀 아는 사람들은 다 나에게 반하지요."
"후후, 그래. 자기가 맘에 드는 사람이 있으면 마음을 표현하는거야."
"그래, 자신감을 가지자. 하지만 내가 은정이 누나에게 사랑하는 감정이 생기고 있다는 거 누나만 알고 있어요. 은정이 누나에게 이 사실을 말하면 누나고 뭐고 없어요?"
"후후, 알았어."
정희 누나에게서 용기를 얻었다.
그 용기로 인해 자신감이 생겼다.
자신감은 딱 일주일을 갔다.
은정이 누나는 자신감이 꺽일 때까지 돌아 오지 않았다.
은정이 누나는 정희 누나하고 많이 틀릴 것 같다.
정희 누나는 한 번 좋아하면 끝까지 좋아하는 타입이지만 은정이 누나는 좀 다르다.
상대해야 할 주위의 남자들도 다르다.
그리고 은정이 누나가 진지한 모습을 보였던 적이 몇 번 있지만 그건 정희 누나가 장난스런 모습을 보일 때보다 더 어색했다.
누나는 내일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