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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이세상

담아온 글들

연하가......
2005.10.06 22:01

[이현철] 연하가 어때서(3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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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날 철수와 함께 수원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서울로 왔어요.
내 옆에 앉아 있는 철수가 제법 믿음직 하네요.
제법 늦은 밤에 서울에 도착했는데 녀석이 나를 집까지 배웅해 주었지요.
잘 키운 연하 하나 열 연상 안 부럽다?
이렇게 한 번 만들어 볼까요?
나를 집 앞까지 배웅해 주는데 팔짱 정돈 껴 주어야 겠지요.

연인 같은 모습으로 집이 가까워 오는 골목을 걸었습니다.
빌라에 심어 놓은 나무들에서 보기 좋은 낙엽이 내립니다.

"올 겨울은 눈이 자주 왔음 좋겠다."
"왜?"
"내가 여자 친구하고 눈 오는 마로니에 거리를 팔짱 끼고 걷는 게 꿈이잖습니까. 목도리 같은 마후라를 차운 바람에 휘날리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눈 오면 마로니에 거릴 한 번 걷자구요."
"난 네 여자친구가 아닌데?"
"누나는 뭐? 내가 좀 봐주지."
"허허? 뭘 봐줘? 그냥 솔직하게 눈 오는 거리를 나하고 팔짱 끼고 거닐고 싶다 그래라."
"그럴까?"
"내가 선심 써 줄게. 그래 뭐 눈 오면 잘 생긴 철수하고 마로니에 거릴 팔짱 낀 채 한 번 걸어주지. 아니다 지금 날을 잡자. 올 해 첫 눈 오는 날, 그 날 마로니에 거릴 나하고 걷는거야. 괜찮지?"
"응. 하하, 음 내가 잘 생긴 건 사실이니까 잘 생겼단 말은 해 주지 않아도 되구요. 근데 첫 눈이 누나 시험 보는 날 같은 바쁜 때에 오면 어떡해요?"
"후후. 저녁에 시험 보진 않잖아. 정 바쁜 날이라 서울 가기 힘들면 학교를 거닐지 뭐. 학교에 쌓이는 눈이 대학로에 쌓이는 눈 보다 깨끗할거야."
"그래 그러지 뭐. 자, 이제 들어 가요."
"데려다 줘서 고마워."
"뭘요."

손 한번 흔들어 주고 웃으며 돌아가는 철수가 사랑스럽네요.

미소 지은 채 내 방으로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책장 밑에서 양면으로 코팅해 놓은 그림을 꺼내 보았지요.
한 쪽엔 내 얼굴, 다른 한 쪽엔 철수 얼굴입니다.
이렇게 코팅 해 놓으니까 서로 붙어 있어 좋긴 한데 마주 보진 못하네요.
그래도 뭐 그릴 때 나란히 앉아 있었는데요.

자정 무렵에 핸드폰이 울렸습니다.
이 시간에 전화 할 놈이 철수 밖에 더 있겠어요.
밝은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헨드폰이라 수신이 잘 안돼나?
전화 건 사람의 목소리가 한 동안 들리지 않았습니다.

"누구야? 철수니?"
"나, 승주야."

응?
밝았던 내 기분이 가라앉습니다.
하지만 전화를 끊진 못했습니다.
그냥 끊어 버리고도 싶었는데 승주가 왜 전화 했는지 궁금했습니다.
단지 그 이유로 계속 핸드폰을 들고 있었습니다.

"왜 전화 한거야?"
"곧 네 생일이잖아. 작년에 너무 미안해서."
"흠, 내 생일 챙겨 주지 않아도 되니까 이젠 전화 하지마."
"그냥 네 생각이 나서 전화 해 봤어. 잊혀 지는 듯 했는데 요즘은 네 생각이 많이 난다."
"헛, 소극적이던 애가 왠일이니?"
"좋아했었다고 했잖아. 곁에 있을 땐 모르다가 헤어지면 그립다더니 그 말이 맞는 거 같다."
"그런 말 필요없어. 다른 할 말 없으면 전화 끊어."
"그럴게. 참, 네 생일 날 뭐 받고 싶니?"
"지금 와서 괜히 이러지 마."
"작년에도 네 생일 선물 준비 했었어. 작년엔 다가갈 용기가 서지 않더라."
"훗! 삐삐에 답변 전화만 하면 됐었는데? 그것도 못했으면서 올해는 어떻게 전화를 다했어?"
"시간이 흘렀잖아. 일 년은 내 마음을 되짚어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필요 없어."
"그냥 뭐 받고 싶은지만 말해 줘. 받지 않아도 돼."
"내 앞에 나타나지 마."
"후, 뭐 받고 싶냐니까?"

승주가 제법 언성을 높였습니다.
그 같지 않네요.

"지금 네 행동이 너 같지 않은 거 알아?"
"그러니까 받고 싶은 것만 말 해."
"빨간 장미. 내 나이에서 열을 곱한 수 만큼. 거기다가 내 생일 달수 만큼의 노란 장미. 또 내 생일 날 수 만큼의 분홍 장미. "
"그것 뿐이야?"
"그거 제법 많은거다?"
"알았어."

승주가 전화를 했네요.
항상 소극적인 애가 올 해는 왠일일까?
잊자니 미련이 남았을까요?
아니면 그가 지금 외로운가요.
승주가 내 마음을 또 심난하게 만드네요.
왜 전화 한거야?
내가 생각없이 뱉은 장미의 수가 생각해 보니 265송이네요.
들기도 힘들겠다.
그런대도 그는 그것 뿐이야,라고 말했습니다.
진짜 그 수의 장미를 들고 내 앞에 나타날 것도 같습니다.

생각 못한 승주의 전화를 받고 그냥 철수 목소리가 듣고 싶었습니다.
삐삐를 쳤더니 금방 전화가 오네요.

"왜요?"
"너 내 생일 기억하고 있지?"
"응."
"장미 266송이 사 줄수 있어?"
"잠 옷 사달라며?"
"그것하고 따로 장미 266송이 사 줄수 있냐고?"
"진짜 공주해라."
"후후, 그래 잠 옷만 사줘."

녀석에게 혹시 모를까봐 승주에게 부탁한 것보다 한 송이 더 많은 266송이의 장미를 요구해 봤지요.
공주 해라?
니가 그렇지 뭐.

승주가 만약 내 생일 선물을 가지고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난 흔들릴 것입니다.
분명히...
난 승주에게 모질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 여자가 진짜, 집에 잘 들어 가는 것을 봤는데 밤에 뭘 잘 못 먹었나?
야밤에 삐삐쳐서 장미 266송이를 사달라고?
266송이면 몇 그루의 장미나무에서 꽃을 싹쓸이 해야 되는겨?
어린 왕자는 자기 별의 한송이 장미가 정원에 이름없이 핀 수백 송이의 장미보다 소중하다고 했는데.
그 많은 장미를 어따 쓸려고 그럴까?
근데 하필이면 이상한 숫자 266송이여?
뭔가 의미가 있는 숫자인가?
토요일날 용기를 내어 아버지 앞으로 갔다.

"다음 달 용돈 좀 가불해 주십시오."
"뭐 하려고?"
"방학 때 한약방에서 잔신부름 할 테니까 20만원만 빌려주십시오."

작년에 잠 옷을 사 봤기 때문에 대충 겨울 잠 옷 가격을 예상할 수 있었다.

"간판 못 봤냐? 한의원이다."
"그럼 한의원에서 잔신부름 할테니까 20만원만 빌려 주세요."
"어따 쓸려고?"
"나쁜 데 쓰지는 않습니다."
"혹시 그 나이 많은 여자 때문이냐?"
"에?"
"돈은 빌려 주겠는데 나이 많은 여자에게 너무 정 주지 마라."
"예."

혼자 들어가기 졸라 쪽팔렸지만 경험 해본 바 있다.
여성 언더웨이 전문점.
잠옷도 언더웨인가?
누나 잠 옷 입은 모습을 많이 봤는디...
좀 더 밝은 하늘색으로 투피스 잠옷 하나를 샀다.
저 번보다 세련되고 성숙해 보이는 잠 옷이다.
가격이 좀 비쌌다.
용돈 가불한 것에서 꼴랑 2만 5천원 남았다.
이미 각오 했던 일 초연하게 받아 들이자.

기분 좋게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 꽃 집에 눈길이 갔다.
꽃 집 앞 철제 통에 보기 좋게 꼿혀 있는 장미들이 눈에 들어와 버렸다.
266송이.

"아가씨 요즘 장미 한 송이 얼마해요?"
"품종에 따라 조금 다른데?"
"저기 꼿혀 있는 장미들은 한 송이 얼마에요?"
"요즘은 겨울이 가까워 좀 비싸요. 한 송이에 700원씩이에요."
"에? 266송이면 얼마에요?"
"에?"

아가씨야 같이 놀라면 안돼지.

"계산 되요?"
"잠깐만요. 186200원이네요."

아가씨가 계산기를 두들기더니 답을 해 주었다.

"아, 그래요?"
"사시게요? 근데 지금 있는 장미가 그 정도가 되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네요. 됐어요."

물어 보고 그냥 나오기가 좀 그랬다.

"저기 아가씨? 화분에 장미를 키울 수 있어요?"
"그럼요. 화분에 장미 나무 심어 놓은 거 팔아요."
"조그맣겠네요?"
"그래도 두 세송이 피어요. 얼마나 예쁜데요."
"그건 얼만데요?"
"2만원이요."
"오? 그래요?"

장미 한 송이 열리지 않은 장미나무 화분을 하나 샀다.
한 손엔 장미 화분을 들고 다른 한 손에 여자 잠옷이 든 종이 가방을 들고 집으로 돌아 왔다.
가족들 중 한 사람이라도 날 본다면 오늘 나 집에서 좋은 소리 못 들을 것 같아 숨어 들어 갔다.
흐흐, 화분은 꽃이 필 때 누나에게 선물 해야겠다.
그때까지 죽지 말아야 할텐데...

누나의 잠 옷이 든 종이 가방을 고이 감싸서 율전으로 갔다.
그리고 아버지가 술 모아 놓은 곳에서 또 한 병 훔쳤다.
저 번 보다는 비싸 보이지 않았다.
와인이 비싸면 월매나 비쌀겨?

월요일 아침은 특히나 지하철 내에 사람들이 많다.
종이 가방이 구겨지지 않도록 애 많이도 썼다.
술병은 예전처럼 가슴에 꼭 껴안고 갔다.
와인은 냉장고가 없는 관계로 창 밖에 올려 놓았다.

자취방에 들어 와 시 한편 적어 보았다.
그리고 그 시를 적은 종이를 옷 가방에 넣었다.
박철수 많이 발전했다.
이런 짓도 해 보고 말이다.

전설 속에 나오는 선녀는 달빛 위에서 춤을 추고 그 옷자락이 옅은 구름처럼 흘러 내린다.
아른한 빛, 긴 머리칼을 돌리우고 짙은 속 눈섭, 어둠이 비켜 가는 햇결 미소는 어둔 밤 하늘도 사랑할 수 밖에는 없으리라.
하늘에 백일 정성이 닿아 그 선녀는 달 빛 아래 백 년 정화수 떠 놓고 소원을 빈 어느 아낙에 와 안기니 천상의 옷을 벗고 비로소 세상에 울음을 터뜨렸다.
한 송이 수련 같은 아름다운 아기의 모습은 당신의 처음 세상에 나온 모습 그리고 지금 23번째 그 날을 기억하니 오늘 당신은 하늘나라 고운 옷자락을 날리던 선녀의 모습입니다.
하늘에 맺은 축복으로 곱디 고운 당신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음, 이만하면 됐다.
푸하핫!
내가 썼지만 졸라 유치하다.
우히히!
낯 간지러버라.





오늘이 내 생일입니다.
어제 일부러 집에 갔었지요.
그리고 오늘 아침에 미역국을 얻어 먹고 학교로 왔습니다.
부모님에겐 죄송하네요.
오늘 집에 오라는 걸 바빠서 안된다고 했어요.
철수의 웃음이 생각납니다.
후훗, 그리고 이상하게 승주가 날 찾아 왔으면 하는 기대도 해 보았습니다.
저녁 무렵에 철수를 만나 자취방으로 왔습니다.
승주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철수를 만나자 승주를 잊었습니다.

"오늘 조촐하게 우리 둘이서 생일 파티하자."
"그래요."
"내 생일 선물 준비했어?"
"겨울 잠 옷 사오라며?"
"사 온거야?"
"응."
"후후, 나중에 어떤건지 한 번 보자. 아, 저기 제과점에서 케익하나 사 가지고 가자."

생크림 케익을 하나 샀습니다.
옆에서 철수가 씩 웃네요.
그래도 돈은 내지 않습니다.
내 방에 들어 왔습니다.
철수는 자기 방으로 갔다가 종이 가방을 하나 들고 왔어요.
아마 저게 내 생일 선물인가 봅니다.
귀여운 것.
테이블에 케익을 올려 놓고 촛불을 켰습니다.
촛빛이 참 곱네요.
불을 껐어요.
철수가 고운 잔 두개를 꺼내어 가지고 왔습니다.
꼭 자기 집인양 내 방 싱크대에서 잔을 두개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종이 가방에서 와인 한 병을 꺼내더군요.
어디서 많이 봤구만.

"얘야, 와인은 케익하고는 맞지 않아."
"에이 그냥 마시면 되지 뭐."
"컵 바꿔 와라."
"왜요?"
"와인은 손잡이가 있는 컵에 따라 마시는거야. 체온이 와인에 전달되면 맛이 변한데."
"이거 가지고 올 때 가슴에 품고 왔는디?"
"치, 이리 줘 봐."

녀석이 저 번에도 고급 술을 가지고 오더니 이 번에도 마찬가지네요.
보르도 생 쥴리앙에서 생산되는 포도로만 만드는 적색 포도주인 샤또 딸보(Chateau Talbot)입니다.
내가 와인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이건 워낙 유명한 거라 알고 있습니다.
AOC급 중에서도 최고급으로 통하는 와인입니다.
이거 시중에서 사려면 근 20만원 가까이 줘야 되는건데...
병 표면이 차겁습니다.

"좋은 거 같죠?

철수가 잔을 바꿔 오면서 묻네요.
얼굴 표정이 약간 불안합니다.
제대로 가르쳐 줘야겠죠?

"아니 뭐 그냥 그런거야."
"다행이네요."

엉, 다행?

"이거 어디다 보관 했었니?"
"그런대로 차갑죠?"
"응. 이게 아마 15도 쯤에서 먹으면 제 맛을 낼거야."
"지금 바깥 기온이 그것 보다 낮을텐데?"
"딱 좋아."
"따는 것 있어요?"
"없어."
"그럴줄 알고 맥가이버 칼을 준비했죠."

잘 딴다?
코르크를 아예 병 속으로 집어 넣어라.
철수가 진짜로 코르크를 병 속으로 집어 넣어 버렸습니다.
병 따는 실력이 영 형편 없네요.

"야, 분위기 있게 마셔야지. 그런 고급 와인을 그 따위로 밖에 못 따니?"
"그냥 그런거라며?"
"소주 보다는 고급이잖니."
"잔 줘봐요."

철수가 내게 와인 한 잔을 따라 주었습니다.
병 속에서 돌돌 거리는 코르크 마개가 우습네요.
철수가 자기 잔에도 한 잔 가득히 따라 놓습니다.
유리컵에 담긴 루비 빛깔의 포도주.
분위기를 끌어 줍니다.
어두운 실내에 촛불을 켜고 와인
을 앞에 놓으니까 은은함 마저 듭니다.

"노래 불러 줘야지?"
"그것도 해 줘야 돼요?"
"응."
"잘 태어 났니? 고생은 않했니? 왜 살고 있니?..."

세상 살다 저런 가사로 생일 축가 불러 주는 놈은 처음입니다.
촛불을 껐습니다.

"야, 한꺼번에 꺼졌다."

내가 박수를 치니까 철수의 표정이 좀 어이없게 변하네요.

"24살 맞아요?"
"주민등록증 보여 줘? 이제 생일 선물을 받아야지?"
"헤헤, 그렇죠?"

철수가 약간 쑥스러운 표정으로 종이 가방을 건네 줍니다.
녀석이 정말 겨울 잠옷을 사 가지고 왔어요.
곱네요.
제법 가격이 나가겠는데요?
고급 포도주, 거기다가 잠 옷까지.
내 생일 때문에 얘가 알거지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성의가 참 고맙습니다.
생일이라고 쪽지도 하나 들었네요.
읽어 보았습니다.
아까 생일 축가 불러 줄 때의 분위기와 너무 틀립니다.
날 너무 띄워 주는거 아닌가 겁이 날 정도네요.

"너 이렇게 날 띄워주다가 나중에 뭉갤려고 그러지?"
"내 정성을 그렇게 밖에는 못 받아 들여요?"
"흠, 고마워. 곱게 간직할게."
"헤헤, 시가 좀 유치하죠?"
"괜찮아."

오늘 내 생일 파티가 맘에 듭니다.
작년 어느 카페에서의 나쁜 감정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게 화려하고 곱습니다.
철수와 마주 보며 미소 짓습니다.

"생일 축하해요 누나. 건배 한 번 해야죠?"
"그래."

와인도 제법 독하죠?
철수가 자주 웃습니다.
실 방바닥으로 내려 앉으려고 하네요.
그러더가 갑자기 일어 섰습니다.

"벌써 가려구?"
"벌써가 아니에요. 시간이 제법 되었건만."
"내 생일인데?"
"내일 수업있어요. 에, 마지막으로 생일 선물 하나 더 해도 되죠?"
"또 있어? 지금도 나 행복해."
"행복해요? 허허. 듣기 좋네요."
"하나 더 있는 생일 선물이란게 뭔데?"
"뽀뽀 한 번 해도 될까요?"
"응?"
"음, 정희 누나도 해 주었는데요 뭘. 그냥 부담 갖지 말구요."
"헛! 그래, 해 줘."
"눈 감아 봐요."

녀석이 제법 떨지 않고 말을 잘 연결 시키네요.
그래 바라던 바다.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 철수의 입술이 언제 내 입술에 닿을까 기대를 했었습니다.
훗!
철수는 아직은 아닌가 봅니다.
그는 내 이마에 그의 입술을 갖다 대고는 곧 떼어 버렸지요.
그리고 씩 웃습니다.

"잘 자요. 저 갑니다. 다시 한번 생일 축하해요."
"응, 그래."

조금 아쉽네요.

생일 날 밤은 따뜻했습니다.
철수의 미소 덕이었지요.
겨울 잠옷을 입고 방에서 홀로 돌아 보았습니다.
괜찮습니다.
거울에 옷을 비추어 보다 미소 짓고 있는 날 발견했습니다.




아, 어제 그냥 입술에다 뽀뽀를 해 버리는건디.
와인은 그게 문제야.
별로 독하지 않다는 거.
왜 누나의 입술로 가다가 그냥 이마에서 멈추어 버렸을까.
아깝다, 좀만 더 술에 취했으면 프렌치 키스도 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누나와 한 발짝 더 다가서 마주한 느낌이다.
누나의 생일 파티에 단독으로 초대되어 축가도 불러주고 생일 선물도 했다.
음, 현재 누나와 가장 친한 남자는 나다.
하하!
어제 생일 선물도 했는데 오늘 점심은 누나에게 얻어 먹어야 겠다.

수업 시간 중간 쉬는 시간에 누나에게 전화를 했더니 점심 때 약대로 오라고 했다.
가지 뭐.
수업이 끝나자 마자 약대로 신나게 뛰어 갔다.
약대 현관 앞에 몇 몇 사람들이 두 사람에게로 시선이 가 있었다.
현관을 들어 갔다가 어떤 한 새끼 때문에 자판기 뒤로 몸을 숨겨야 했다.
현관 앞 복도에 난 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한 쪽으로 돌린 누나의 모습을 보았다.
매정하게 서 있는 약사복을 입은 누나의 모습 앞에는 승주 그 새끼가 있었다.
뭐하는 짓이냐 쪽팔리게...
그의 두 손에는 아주 많은 장미들이 담긴 큰 꽃다발이 들려 있었다.
안 세어봐도 이백송이는 넘겠다.

"어제는 그 동안 떨어져 있어서 예의상 찾지 못했다. 그래서 오늘 왔어."

새끼가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유치한 대사를 늘어 놓는다.
누나는 말문이 막혔는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누나의 매정한 모습이 좋다.
그래 그런 매정한 모습 지으면 저 새끼 그냥 갈 것이다.
승주 저 새끼가 떨어져 나가면 그때 내가 떡 웃음짓고 나타나는 거야.
누나가 지금 표정과는 다르게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 지어 줄거다.
푸하하!
매정한 모습 지어야 하는데, 누나의 표정이 점점 변해 가고 있다.

"가!"

단 한마디의 말은 매정했으나 어감이 그렇지 않다.
느낄 수 있다.
조금 불안하다.
승주가 건네는 꽃을 받지는 않고 있으나 망설이는 모습이다.
받아서 던져 버려.
갑자기 헛 웃음이 나왔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넋이 나간 듯 한 곳에 시선이 모아졌다.
흠, 나는 저렇게 못한다.
참으로 쪽팔리고 유치하고 보기싫고 초라한 모습이지만 부럽기도 하다.
저렇게 할 수 있는 승주의 모습이 부러웠다.
은정이 누나가 꽃을 받지 않자 승주는 그 사람들 많은 약대 현관 앞 복도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다 들릴만한 소리로 그의 마음을 고백했다.

"몰랐었어. 그때는 그 방법 밖에는 몰랐었어. 뒤에 남는 그리움을 몰랐었단 말이다."

승주의 목소리는 울음이 섞이고 떨렸으나 또박했다.
승주의 손에 들려진 꽃 송이가 혹시 266송이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거 같다.
흠, 누나가 내게 왜 266송이의 장미를 원했는지 짐작이 갔다.
승주가 들고 있는 꽃다발이 얼마 안 있어 누나의 품에 안길것 같다.
그럴 것만 같다.

"너 왜 그래? 부끄럽지 않니? 니가 이러면 내가 난처할 거란 생각은 못해 주니?"

고개 돌렸던 누나가 승주를 내려다 보고 있다.
부끄러우면 사람들 없는 곳으로 도망가면 되잖아.
누나는 승주 곁을 떠나지 않았다.

"부끄러운 거 그거 아무것도 아냐. 그건 금방 지워져 버려."
"너 정말..."

승주 새끼가 누나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꽃을 건네주려고 한다.
누나는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는 듯 받지 않으려고 했으나 승주는 끝내 누나에게 꽃을 전달하고 말았다.
누나야, 던져 버려라.
누나는 꽃을 던져 버리지 않았다.
자리가 어색해서 떠났는지는 모르나 누나는 꽃을 버리지 않고 승주와 함께 나를 지나쳐 밖으로 사라졌다. 멍하니 그 둘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승주 새끼도 차가 있는겨?
둘이가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까지 지켜 보았다.
보조석에 꽃을 안고 있는 누나의 모습 때문에 슬펐다.

오늘 나는 삼류 영화 한 편을 보았다.
허허!
참 슬픈 삼류 영화였다.
그 사건 이후로 누나는 내게 연락이 없었다.
어디가서 무엇을 했는지 모른다.
알고 싶지도 않다.
알게 되면 슬플 것 같다.
삼류 영화를 보고 난 뒤 나는 통학을 했다.
아침 일찍 새벽 기차를 타고 와 공대에서만 놀다 수업 끝나면 바로 집으로 떠났다.
날씨가 춥다.
금요일날 내 방으로 왔을 때까지 누나는 내게 삐삐 한 번 치지 않았다.
멀리 짙은 구름 밑으로 겨울 해가 지고 있다.
저녁에 밥 대신 라면을 끓여 먹고 있는데 동생이 한마디 했다.
그래, 내게도 예쁜 여동생이 있다.
얘가 재수생이라 나와 얼굴 보는 시간이 적어 간혹 생각 못하고 살지만 얘는 평생 나를 기억에 담고 살 애다.

"엿 안 사줄거야?"
"참, 곧 네 시험이 있지?"
"오빠 너무한거 같애."
"미안하다. 큰 걸로 하나 사줄게. 꼭 붙어라."
"그래. 내가 대학 가면 친구 소개 시켜 줄게."
"치, 한의대에 예쁜 여학생이 있니?"
"나도 가는데 뭘."
"그래, 넌 내 동생이지만 참 예쁘긴 예쁘다."
"올해는 꼭 붙을거야."
"그래, 아버지가 너에게 거는 기대가 클거다."
"참, 밖에 눈 오더라."
"응?"
"첫 눈 온다구."
"첫 눈?"

누나가 나에게 약속 했던 것을 기억한다.
삼류 영화 괜히 봤다.
안 봤으면 내가 연락해 억지라도 부릴텐데.
약속 지키라고 말이다.
전화 할 용기가 없다.
삐삐를 호주머니에 넣고 먹던 라면을 그대로 들고 옥상으로 올라 갔다.
소주라도 한 병 사올까?

청담동쪽과 압구정동 쪽, 논현동 쪽 모두 네온사인 불빛들로 아름답다.
잠원동 쪽은 아파트 불빛으로 또한 곱다.
흰눈이 너무나 곱게 내린다.
나 혼자만 있는 옥상이 분위기 있다.
너무 어둡지도 않고 주황빛으로 물든 하늘이 오늘은 율전 깨끗한 하늘보다 더 곱다.
끄억!
눈을 맞으며 라면 국물을 비웠다.
쌓이기 시작하는 눈을 남비에다 담았다.
그리고 밖으로 던졌다.
길 가는 사람들에게 첫 눈의 축복을 내리고 싶어서...

"야, 첫눈이다!"

나 혼자 옥상에서 쇼를 했다.
좀 추웠다.
입에선 입김이 연신 뿜어져 나온다.
그래도 나는 내려가지 않았다.
춤을 추듯 눈 쌓이는 옥상을 뛰어 다녔다.
얼굴이 빨개져선 옥상 난간에 기대어 청담동 쪽을 바라 보았다.
한 손엔 삐삐를 움켜 쥔 채 말이다.
삐삐는 울리지 않았다.
멍하게 바라 보다가 도저히 추워서 더 있을 수 없었다.

"그래 잘 살아라. 에이, 잘 사나 보자."

작은 소리로 중얼 거려 주고는 옥상에서 내려 왔다.
거실에서 아버지의 근엄한 목소리를 들었다.

"와인 니가 꺼내갔지?"
"에?"
"니가 꺼내갔지?"
"네."
"15만원 추가."
"반은 제가 안 마셨어요."

15만원?
포도주 한 병이 뭐 그리 비싸.
우쒸, 아깝다.
은정이 누나에게 내가 왜 내 용돈을 날렸을까?
후후, 그건 별로 아깝지 않다.
내가 설레고 누나 생각하며 웃었던 기대가 너무 아깝다.
삼류 영화 한 편으로 그냥 떠나가 버릴 것을 나는 혹시나 했다.
철부지 생각?
아깝다.

"너 자꾸 양주 꺼내 갈거야?"
"앞으로 그럴 일 없을 겁니다. 죄송합니다."
"표정이 별로 안좋다?"
"추운데 있어서 그래요. 눈 왔잖아요."
"이번엔 봐 줄게."

헤, 15만원 굳었다.
그래도 아깝다 씨.
첫 눈은 왜 이리 빨리 온겨.
누나 생일 날 입술에 뽀뽀하지 않았던 거 천만 다행이다.
그랬다면 오늘 내가 더 초라했을 것 같다.

방에 들어 와 내가 사 놓은 장미 없는 장미 나무를 보았다.
후후, 저기 두 세송이 피어나 봤자 승주 새끼가 들고 온 266송이의 장미와는 비교조차 안되겠지.
그래도 피워 보리라.
내게는 저기서 핀 장미 한 송이가 그 새끼 266송이의 장미 보다 소중하리라.
내게만...
그래서 슬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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