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날 곰곰히 나 혼자 생각하다 답도 없는 답을 내렸다.
은정이 누나가 좋긴 하지만 나도 자존심이 있다.
누나는 승주가 준 그 꽃다발을 들고 내 곁을 내겐 시선도 주지 않고 지나쳤다.
내게 좋은 모습 많이 보여주며 내 마음을 빼앗아 간 것은 누나가 외로웠기 때문이었나 보다.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누나 본의에 의해서다.
내게 승주 그 새끼가 가져 온 꽃다발을 원했던 건 나를 그 사람에게 잠시 견주어 본 것.
누나에게 가졌던 마음을 이 쯤에서 접자.
흠, 이제 더 이상 누나 곁에 있는다는 건 무의미하다.
나 승주를 질투한다.
그런 질투심에서 나오는 추잡한 행동들로 난 비겁해질 것 같다.
은정이 누나는 그런 나에게 실망을 하고 날 나쁜 놈으로 정의 내리겠지.
그리고 이름없이 사라져간 누나 인생의 엑스트라들처럼 그렇게 잊혀 질것이다.
나도 내 인생에선 내가 주인공이다.
헛!
헛웃음이 나온다.
누나에게 아직 사랑한다고 말한 적도 없고 사귀는 것도 아니다.
내가 왜 누나를 피해 다니면서 며칠 통학을 했을까?
늘 하던대로 하면 된다.
누나와 친하게 지냈던 그 시간 전의 모습으로 말이다.
은정이 지가 뭔대.
은정이 누나를 봐도 절대 어색한 표정이나 초라한 모습 보이지 말고 당당하자.
그리고 더 이상 누나에게 마음이 가지 않도록 불친절해지자.
옛사랑이 꽃다발 들고 찾아 왔다고 그냥 가버린 여자에게 내가 무슨 의미가 되었겠나.
나는 그냥 친한 후배였을 뿐이다.
나만 홀로 앞서 갔었던 것일 뿐, 누나는 나를 의미있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승주가 그런 모습 보여 준게 고맙다.
내가 하지 못했던 그런 짓, 그래 승주 넌 아주 쪽팔리고 밥 맛 떨어지는 그런 유치한 짓을
했지만 누나나 나에게 잘 한 것이다.
박 철수, 은정이란 나이 많은 여자에게 태연해 지자.
아버지 말씀처럼 나이 많은 여자에게 너무 정주지 말자.
월요일 아침에 새로운 기분으로 학교를 갔다.
아침 수업 포기하고 아주 늦은 아침에 집을 나왔다.
레옹처럼 모자를 쓰고 한 손엔 화분을 들고 전철을 탔다.
롱코트는 없어서 못 입었다.
화분을 들고 자취방으로 들어 가다 은정이 누나 방 문을 쌔게 걷어찼다.
지금 이 시간에 방에 있지는 않겠지.
나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아무리 태연해 지기로 마음 먹었지만 방 문 걷어차는 것은 한 동안 계속 해야 겠다.
걷어 차자 마자 문이 열렸다.
"너, 뭐야?"
"엉?"
은정이 누나의 모습을 보자 많이 반가웠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날 쳐다보는 저 가증스런 얼굴.
내 숨어서 다 봤어.
아휴, 친한 척 하기도 싫다.
그냥 모른 척 내 방쪽으로 갔다.
"야, 박 철수!"
부르면 내가 대답할 것 같냐?
못 들은 척 내 방 문고리에다 열쇠를 꼿았다.
문을 따고 그냥 방으로 들어가는 행동을 보였다.
그래도 한 번 뒤돌아는 봐야 겠지?
멀뚱히 날 보고 서 있는 누나가 얄밉다.
지나간 사랑도 못잊는 바보 같은 뇬.
어디 잘돼나 보자.
이제 내 사랑은 이 화분이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다 화분을 올려 놓았다.
그 승주가 준 266송이의 장미는 한 번 시들면 그 뿐, 다시 피어나지 않겠지만 이 장미나무는 내년에도 후 내년에도 꽃을 피울 것이다.
266송이를 피울 때까지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어린 왕자가 꿈 꾸던 그 장미다.
내 여인이 생기면 이 화분에 핀 장미를 마주 보며 사랑의 속삭임을 나눌 것이다.
에이쒸, 문을 잠궈 버리는 건데.
지 방이여 뭐여.
왜 남의 방을 저렇게 맘대로 들어오냐.
은정이 누나의 옷차림이 외출하려는 모습인데, 갈 길이나 가지 여긴 왜 들어온 겨?.
"왜 남의 방에 맘대로 들어와요?"
"너 또 삐쳤지?"
"내가 뭐요?"
"너 왜 날 또 피하는거야?"
"내가 누나 안 만나면 그게 피하는거에요? 그냥 보기 싫으니까 안 찾는거지. 누가 피했다고 그래."
"그게 그거지. 너 저 번주에 통학했지?"
"통학 하면 안돼나?"
"말투가 왜 그래?"
"이런 말투 한 두번 듣는 것도 아니잖아요?"
"너 그럼 나도 삐친다?"
"삐치던지 말던지. 누나는 좋겠수, 첫사랑이 돌아와서..."
"너 정말. 니가 내 애인이야 뭐야. 그 일로 니가 날 왜 피하는데?"
"피한거 아니라니까. 꽃다발이 좋던가요? 그냥 따라 나가 버리대?"
"그런 상황에서 내가 따라 가지 않았음? 나 사람 많은 그 자리에서 매정히 그 사람 행동을 물릴 칠 수 있을 만큼 나쁘고 독한 여자는 아니야. 자리가 어색했잖아."
"누가 뭐래요? 참내, 예전 태수형에겐 잘만 그러더만. 밥 사준다고 오랬으면서. 첫 눈 오면 눈 쌓인 거릴 같이 걷자고 하고선. 옛 사랑 나타나니까 나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죠? 나는 뭐 사랑하는 사람 생길 때까지의 심심풀이였나봐. 에구 불쌍한 박철수."
"야, 말은 똑바로 해. 니가 내게 뭔대 그런 말을 해? 눈 올때 나 보고 싶었음 니가 연락해야지. 내가 옛사랑을 다시 만나던 니가 무슨 상관이야?"
"누가 상관을 한다고 그래요? 지금 상황은 누나가 내 방 들어와서 따지고 있는 거에요."
"나를 다시는 안 볼 작정이야? 나 지금 심하게 기분 상했어?"
다시는 안 볼거다?
조금 위협적인 말이다.
여기서 지면 난 놀이개감 밖엔 되지 않는다.
"다시 안 볼거다. 왜?"
"뭐야?"
"나 볼 시간이나 있을까? 어색해서 자리 피하는 행동이 그 승주씨가 준 꽃다발을 꼭 껴안고 승주씨 걸음걸이와 보조 맞춰서 간 거였나? 어디가서 뭐 했어요? 보조석에 다소곳이 앉은 모습이 다시 만났으니 어디 멀리 같이 가고 싶어하는 표정이더만..."
"기분 나쁘다 너?"
"나도 기분 나빠요. 누나가 지금 나한테 따지는 태도가 날 아주 어리게 보는 것 같네요? 누나가 누굴 만나던, 어떤 짓을 하던 난 동생이고 후배니까 그냥 계속 누나를 좋아해 주겠지하는 생각. 웃기지 마요. 누나 분명 이 생각도 했을 거야. 승주를 애인이라 생각해도 아닌 척 나와 밋밋한 인연을 남겨 놓고 필요할 땐 부려 먹는다."
"너 그 말 취소해."
"못해."
"너 내가 다른 남자 만날 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잖아."
"이 번 경우는 다르지. 나하고 생일 파티 하고 난 바로 다음 날이야. 아무리 내가 동생이고 후배지만 숨어 있는 걸 봤으면서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지나치냐? 그것도 오라고 해 놓고선. 그 때 마로니에 공원 갔을 때도 마찬가지야. 누나는 그 승주란 사람을 항상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그 걸 잊기 위해 나를 가지고 논 거 잖아."
"말이 심하다 너? 넌 연하잖아. 넌 내가 아끼는 후배야. 승주는 승주고 넌 너야."
누나의 목소리가 갑자기 약간 울먹거리는 투다.
"연하는 뭐 감정도 없어요? 연하는 뭐 남자 아닌가? 승주씨 만났으니까 이제 승주 형 힘들게 하지 말아요. 아무나 보고 꼬리치지 말라구요."
"짝!"
으씨, 씨바.
졸라 아프다.
"너 나뻐!"
누나의 눈동자에 눈물이 조금 고여 있다.
저거 아무래도 자기 분에 못이겨 나온 눈물 같다.
"누나 방 가서 울어요. 누나 이제 안 볼거야 씨."
"너 나보고 사귀잔 말도 한 번 없었잖아. 그래 놓구서는..."
"아휴, 그랬으면 나만 비참한 꼴 당했지. 그리고 난 연상에겐 관심없다 그랬잖아요!"
"그랬으면 그냥 동생처럼 굴어야지."
"동생이라 생각하면 왜 따져요? 순전히 자기 편한대로야."
"나도 너 이제 안 만나."
"아끼는 동생이라고 말했으면서 이런 말 했다고 걷어 차냐? 만나던지 말던지."
"쾅!"
"쾅!"
"쾅!"
앞에 것은 누나가 문을 쌔게 닫아서 난 소리고 바로 뒤에 것은 누나가 내 방문에 발길질해서 난 소리다.
그리고 그 다음 것은 누나 방문 닫히는 소리다.
정희누나 오면 누나 빈자리 매꿔 줄거다.
안 본다고 그러면 내가 쫄 줄 아냐?
나 지금 쫄고 있다.
저 여자가 내게 왜 저럴까?
창 가에 놓여 있는 장미 나무를 보았다.
아까 내 방에 온 그 여자를 생각하고 산 장미 나무다.
내게 삐삐를 쳐 주던 사람, 공주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연락하기를 꺼려 하던 저 여자는 새벽에 우리 집에 전화한 적도 있다.
옥수수 서리 할 때 망을 봐주던 여자.
수영장에서 내 목숨을 구해준 여자.
그리고 내가 사랑한 여자다.
다시 안 보면 내가 상당히 골치 아파질 것 같다.
내가 지금 뭔 짓을 한거야?
어제 괜히 이상한 생각을 해 가지고 말이야.
지금 가서 잘못했다고 한 번 빌어 볼까?
나를 아끼긴 아꼈던 사람이다.
내가 서운한 감정 들어 너무 심한 말을 했던 건 아닐까?
우쒸, 그런 거 같다.
가서 빌자.
사나이 한 번 칼을 뽑았으면 밀고 나가야지.
꼴랑 십분도 지나지 않아 이랬다 저랬다 하냐?
아니다.
이런 생각했다가 나중에 후회한다.
그래, 내가 누나 애인도 아닌데 왜 저딴 대화를 누나와 나누었어야 했나?
그래도 내 자존심도 있으니까 딱10분만 있다가 싹싹 빌러 가야지.
시계 바늘 참 늦게 간다. 누나가 외출을 했을려나?
누나 방문 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누나는 방에 있다. 이제 가자.
"딩동!"
"누나 문 좀 열어 봐요."
대답이 없다.
"내가 잘 못했다니까."
"야이, 홍은정. 문 좀 열어 봐요."
"누나, 승주 형 왔어요."
"야이, 잘난 여자야. 제가 잘 못 했어요."
"진짜 안 본다 그럼."
문 앞에다 대고 독백을 소리내어 지르니까 졸라 쪽팔리다.
쪽팔린게 지금 문제야.
경험상 빨리 빌면 누나는 내게 크게 삐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문이 슬며시 열였다.
누나의 눈동자가 빨갛다.
울었나 보다.
그깐 일로 우냐.
태수형 찰 때 모습과 그 옆동 빌라 사는 놈과 말싸움 할 때도 그렇고 승주형이 다시 왔을 때도 울지 않았던 게.
겨우 나이 어린 나랑 싸웠다고 우냐?
공주 맞어?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의 눈물에 약하다.
여자도 마찬가지일까?
돌아서 손가락에 침을 발라 눈에다 찍었다.
누나가 갑자기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나 다시 너 안 볼거야."
"내가 잘못했어요 누나. 정희 누나가 여기 온다는 말 듣고 내가 간이 커졌나 봐요. 누나가 승주형 만나는 거 아무렇지도 않아요."
"내가 그런 말 듣는다고 맘이 풀어 질 것 같니?"
"누나하고 나하고 좋았던 기억들이 많잖아요."
"너, 말 잘했다. 그래 그 좋았던 기억들이 많은데 난 이유도 모른채 그 기억들을 잊어야 할 뻔 했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니?"
할 뻔 했어?
벌써 풀어 진거네 뭐.
박철수 승리다.
그래도 좀 더 빌어야지.
"내가 아직 어리잖아요. 속이 좁았어요."
"허? 너도 너 유리한 쪽으로 말하네? 그럴때만 연하지?"
"화 풀어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혹시나 니가 이렇게 내 곁을 떠날까 봐 얼마나 가슴 졸였는 줄 아니?"
"누나도 나 좋아하는 거에요?"
"그럼 좋아하지. 아닌 거 같니?"
"흠, 그래도..."
사랑하는 감정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죠?
이렇게 물어 보고 싶은데...
"이번만 참는다?"
"화풀린 거에요?"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너에겐 왜 이렇게 화가 빨리 풀리는지."
"헤, 잘생겼잖아요."
"그래."
누나가 내 볼을 사랑스럽게 어루 만졌다.
아까 때릴 때는 언제고...
사랑스런 모습이다.
승주 그 새끼가 밉다.
왜 나타난겨?
"승주형하고 잘 되길 빌어 줄게요. 이제 옹졸해지지 않으렵니다. 나 참 변덕스럽죠?"
"사람 감정이란게 그렇지 뭐. 나 승주하고 잘 될 수 있을까?"
"왜요?"
"다시 만났지만 예전 감정은 아냐."
"그래도 사랑했던 사람이니까 곧 예전으로 돌아 가겠죠."
"그럴까?"
"누나 방에서 차 한잔 얻어 먹을게요."
"그래, 문 앞에서 우리가 뭐하는 짓이니?"
"누나 시험 잘 봐요. 우리 학교 대학원 다닐 수 있도록 말이에요."
"정희가 오면 더 재밌겠지?"
"헤헤, 그렇겠네요."
재밌을까?
누나하고 단 둘이 있을 때 보다 승주 그 새끼랑 정희 누나가 끼어든 미래가 더 재밌을까?
오늘 나도 쇼를 했다.
친구로 생각하며 누나라 생각하며 감정을 죽이며 이 여자 곁에 버틸수 있을 때까지 버텨 보자.
나는 그 날 밤부터 다시 누나 곁으로 돌아 갔다.
도서관을 나가기 시작했고, 한 동안 예전처럼 지냈다.
뭐 나도 시험 기간이라 도서관을 나가야 했다.
커다란 엿을 두개 샀다.
포크 하나 샀고, 두루마리 휴지 하나 샀다.
"나, 대학원 시험 본다고 이렇게나 많이 사왔어?"
"착각하지 마요. 누나 몫은 이 엿 하나 뿐이야. 나머진 내 동생꺼."
"아참, 너에게 수능 볼 동생이 있지?"
"응. 누나 시험 잘 봐요."
엿 하나를 꺼내 주었다.
"그럴게."
"나는 내일 동생 시험 때문에 이만."
"동생에게 나도 합격 빌어 줬다고 얘기해 줘?"
"우리 동생은 누나 몰라요."
수능 시험 아침에 내가 직접 운전해서 동생을 시험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잘 봐."
"내가 대학 가면 꼭 오빠 애인 만들어 줄게."
"시험 보러 들어가는 애가 쓸데 없는 말 한다."
"오빠는 내 우상이야."
"다른 집엔 두살 터울 남매끼린 많이 싸운다 그러더만."
"어릴 때부터 아빠랑 엄마가 오빠에게 대들면 야단쳤잖아."
"참 신기하지 그치? 난 구박받았고 넌 귀하게 컸는데, 왜 너한테 그렇게 교육시켰을까?"
"그게 좋잖아."
"모르겠단 말이야. 같은 말썽이라도 니가 저지르면 용서가 됐고 내가 저지르면 야단 맞았던 적이 많은데 너하고 나하고 싸우면 널 야단쳤어."
"후후. 나 이제 들어간다? 시험 잘 볼게."
"그래 임마. 올해는 안전하게 원서 함 넣어 보자."
"특차로 합격해 줄게."
내년엔 또 하나의 응원군이 생기겠군요.
우리 여동생 공부 잘하고 이쁜이에요.
내 동생이지만 참 예쁩니다.
앞에 등장하지 않았던 것은 공부하느라 바빴기 때문입니다.
최근 이년간 나하고 대화 나누는 시간이 적었지만 친남매 사이거든요.
내 말 한마디면 꿈벅 죽는애에요.
날 서럽게 했던 여자들아 두고 보자.
내 여동생, 아버지가 참 곱게 길렀어요.
나 처럼 막 키우지 않았거든요.
같은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학창 시절 나 쟤 오빠라는 이유 때문에 제법 거들먹 거리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쟤 중 고등학생일 때 쟤 짝사랑 한 놈들이 우리 집 앞까지 따라 온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에요.
중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아, 대학생도 한 명 따라 온 적 있어요.
이름이 이 하늘이랬나?
내 여동생 따라 온 놈 중 한 놈을 잘 못 팼다가 저 파출소 끌려 간 적 있어요.
우리 여동생 수희는 정희 누나도 인정한 우리 동네 귀염둥이였지요.
그런 내 동생이 올해 못다 이룬 대학 생의 꿈을 내년엔 꼭 이루기를 바랍니다.
제가 좀 기가 죽겠지만, 한의대 거 뭐 좋다고...
걔 성적이면 이대 약대정돈 문제 없을텐데...
참, 우리집이 한약방 하지. 아 그렇구나.
"시험 잘 봤어?"
"응. 오빠, 올 크리스마스는 내가 곁에 있어 줄게."
"치. 오빠도 만날 사람 있어."
"웃기지마."
으이쒸.
나에겐 미소 하나 남겨주고 승주 그 새끼에게로 가 버리는 누나.
누나가 대학원 합격하던 그 날 난 방학이 시작됐는데도 불구하고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자취 생활을 하며 누나를 축하해 주기 위해 학교를 갔었다.
승주 그 새끼가 어떻게 알았는지 율전까지 찾아 왔었다.
시험 치기 전에 엿까지 먹였건만 누나는 내게 어슬픈 미소 하나만을 남겨 준 채 그 새끼에게로 가 버렸다.
섧어라...
또 한 판 싸울까?
성격 좋고 맘씨 착한 내가 참자.
밤에 홀로 내 자취방에 누워 있다.
베개를 베고 누나가 준 커다란 호랑이 인형을 발 밑에 깔고 그렇게 누워 있다.
마지막 달 12월이 벌써 두 날짜를 차버렸다.
"딩동."
"여긴 왜 왔어요?"
"왜 오긴. 너 서울 안 갔어?"
"안 갔으니까 여기있지. 애인 만났으면서 일찍 돌아 왔네요?"
"우리 아직 애인 사이로 만나는 거 아니야."
"그럼 무슨 사인데? 별 이상한 짓 하고 있어."
"너 또 삐칠까 봐 일찍 돌아 왔다. 너 배고프지?"
"라면 끊여 줄까요?"
"이게 뭘까?"
누나가 등 뒤로 숨겼던 넓다란 판때기를 꺼내었다.
피자구만.
나 피자 별로 안좋아하는데...
"무슨 피자에요?"
"슈퍼 슈프림."
"나 피자 별로 안좋아해요."
"난 좋아해."
"그럼 자기가 먹을려고 사온거네."
"응. 나 다 못먹으니까 너도 좀 먹어."
"틈만 주면 자기가 공주라는 걸 일깨우네요?"
"응."
누나하고 내 자취방 방바닥에 신문지 깔고 앉아서 피자를 먹었다.
제법 따끈하다.
꼴랑 승주 만나서 예 근처에서 놀았나 보다.
멀어 봤자 수원이다.
콜라 한병을 옆에 끼고 누나랑 마주 앉아 피자를 먹었다.
호호, 저 여자 피자 먹는 모습이 제법 귀엽다.
혓바닥은 왜 내미냐?
피자도 그런대로 먹을 만 하네.
"애인 만났으면 오래 놀다 와야지?"
"치, 너 아까 표정 보니까 또 질투하는 것 같던데? 넌 바로 근처에 살지만 승주는 멀리서 왔잖니."
"왜 지레 겁먹고 그래요? 나 태연해지기로 했어요. 누나가 애인 만나는데 날 왜 신경쓰나?"
"너 삐치지 마?"
"나 안 삐쳤어요."
"나 합격해서 기쁘지?"
"응. 뭐 자기 학교 대학원도 떨어지면 죽어야지."
"너 씨. 그래도 공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약사 고시나 준비 잘해요. 근데 승주형은 어떻게 알고 왔대요? 갑자기 발표 난거 아닌가?"
"저 번 주부터 계속 연락이 왔었어. 언제 합격 발표 나냐구? 왜만하면 다 합격하는 거라 챙겨주지 않아도 된다 그랬는데, 예전에 자기가 내게 소홀했던 걸 만회하고 싶은지 꼭 오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오라고 연락 했어."
"그렇게 소상히 알려 주지 않아도 돼요."
"너 삐치면 무서워."
"아휴, 높으신 공주분이 절 무서워해요?"
"참, 너 여기 몇 일 더 있다 가라."
"왜요?"
"정희가 한 삼일 정도 내 방 신세를 질거야. 내일 온다고 그러네?"
"그래요? 그럴까? 그러지 뭐."
누나는 더 이상 핏자를 먹지 못하고 내가 먹는 모습을 쳐다 보고만 있다.
"맛있니?"
"누나도 먹어요."
"나는 더 못 먹겠어."
피자 별로 안좋아하지만 자취생이 먹는 걸 마다하리... 누나 꼴랑 두조각 먹었
다. 나머지 다 내가 먹었다.
"다음 부턴 치킨이나 족발 같은 걸로 사오세요."
"다 먹어 놓고선..."
"커억! 어 좋다."
"야, 숙녀 앞에선 고개 돌리고 트림 해."
"누나가 무슨 숙녀야. 나 그냥 동생하기로 했어요. 누나는 내게 있어 더 이상 여자가 아니야."
"그래?"
누나가 약간 서운한 표정이다.
에구, 그런 마음먹고 태연하게 지내고 있지만 곧 또 한계가 올 것 같다.
여자를 어떻게 여자로 안 볼수가 있냐.
은정이 누나가 좋긴 하지만 나도 자존심이 있다.
누나는 승주가 준 그 꽃다발을 들고 내 곁을 내겐 시선도 주지 않고 지나쳤다.
내게 좋은 모습 많이 보여주며 내 마음을 빼앗아 간 것은 누나가 외로웠기 때문이었나 보다.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누나 본의에 의해서다.
내게 승주 그 새끼가 가져 온 꽃다발을 원했던 건 나를 그 사람에게 잠시 견주어 본 것.
누나에게 가졌던 마음을 이 쯤에서 접자.
흠, 이제 더 이상 누나 곁에 있는다는 건 무의미하다.
나 승주를 질투한다.
그런 질투심에서 나오는 추잡한 행동들로 난 비겁해질 것 같다.
은정이 누나는 그런 나에게 실망을 하고 날 나쁜 놈으로 정의 내리겠지.
그리고 이름없이 사라져간 누나 인생의 엑스트라들처럼 그렇게 잊혀 질것이다.
나도 내 인생에선 내가 주인공이다.
헛!
헛웃음이 나온다.
누나에게 아직 사랑한다고 말한 적도 없고 사귀는 것도 아니다.
내가 왜 누나를 피해 다니면서 며칠 통학을 했을까?
늘 하던대로 하면 된다.
누나와 친하게 지냈던 그 시간 전의 모습으로 말이다.
은정이 지가 뭔대.
은정이 누나를 봐도 절대 어색한 표정이나 초라한 모습 보이지 말고 당당하자.
그리고 더 이상 누나에게 마음이 가지 않도록 불친절해지자.
옛사랑이 꽃다발 들고 찾아 왔다고 그냥 가버린 여자에게 내가 무슨 의미가 되었겠나.
나는 그냥 친한 후배였을 뿐이다.
나만 홀로 앞서 갔었던 것일 뿐, 누나는 나를 의미있는 존재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승주가 그런 모습 보여 준게 고맙다.
내가 하지 못했던 그런 짓, 그래 승주 넌 아주 쪽팔리고 밥 맛 떨어지는 그런 유치한 짓을
했지만 누나나 나에게 잘 한 것이다.
박 철수, 은정이란 나이 많은 여자에게 태연해 지자.
아버지 말씀처럼 나이 많은 여자에게 너무 정주지 말자.
월요일 아침에 새로운 기분으로 학교를 갔다.
아침 수업 포기하고 아주 늦은 아침에 집을 나왔다.
레옹처럼 모자를 쓰고 한 손엔 화분을 들고 전철을 탔다.
롱코트는 없어서 못 입었다.
화분을 들고 자취방으로 들어 가다 은정이 누나 방 문을 쌔게 걷어찼다.
지금 이 시간에 방에 있지는 않겠지.
나에게 상처를 주었으니 아무리 태연해 지기로 마음 먹었지만 방 문 걷어차는 것은 한 동안 계속 해야 겠다.
걷어 차자 마자 문이 열렸다.
"너, 뭐야?"
"엉?"
은정이 누나의 모습을 보자 많이 반가웠지만 말은 나오지 않았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날 쳐다보는 저 가증스런 얼굴.
내 숨어서 다 봤어.
아휴, 친한 척 하기도 싫다.
그냥 모른 척 내 방쪽으로 갔다.
"야, 박 철수!"
부르면 내가 대답할 것 같냐?
못 들은 척 내 방 문고리에다 열쇠를 꼿았다.
문을 따고 그냥 방으로 들어가는 행동을 보였다.
그래도 한 번 뒤돌아는 봐야 겠지?
멀뚱히 날 보고 서 있는 누나가 얄밉다.
지나간 사랑도 못잊는 바보 같은 뇬.
어디 잘돼나 보자.
이제 내 사랑은 이 화분이다.
볕이 잘 드는 창가에다 화분을 올려 놓았다.
그 승주가 준 266송이의 장미는 한 번 시들면 그 뿐, 다시 피어나지 않겠지만 이 장미나무는 내년에도 후 내년에도 꽃을 피울 것이다.
266송이를 피울 때까지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내겐 어린 왕자가 꿈 꾸던 그 장미다.
내 여인이 생기면 이 화분에 핀 장미를 마주 보며 사랑의 속삭임을 나눌 것이다.
에이쒸, 문을 잠궈 버리는 건데.
지 방이여 뭐여.
왜 남의 방을 저렇게 맘대로 들어오냐.
은정이 누나의 옷차림이 외출하려는 모습인데, 갈 길이나 가지 여긴 왜 들어온 겨?.
"왜 남의 방에 맘대로 들어와요?"
"너 또 삐쳤지?"
"내가 뭐요?"
"너 왜 날 또 피하는거야?"
"내가 누나 안 만나면 그게 피하는거에요? 그냥 보기 싫으니까 안 찾는거지. 누가 피했다고 그래."
"그게 그거지. 너 저 번주에 통학했지?"
"통학 하면 안돼나?"
"말투가 왜 그래?"
"이런 말투 한 두번 듣는 것도 아니잖아요?"
"너 그럼 나도 삐친다?"
"삐치던지 말던지. 누나는 좋겠수, 첫사랑이 돌아와서..."
"너 정말. 니가 내 애인이야 뭐야. 그 일로 니가 날 왜 피하는데?"
"피한거 아니라니까. 꽃다발이 좋던가요? 그냥 따라 나가 버리대?"
"그런 상황에서 내가 따라 가지 않았음? 나 사람 많은 그 자리에서 매정히 그 사람 행동을 물릴 칠 수 있을 만큼 나쁘고 독한 여자는 아니야. 자리가 어색했잖아."
"누가 뭐래요? 참내, 예전 태수형에겐 잘만 그러더만. 밥 사준다고 오랬으면서. 첫 눈 오면 눈 쌓인 거릴 같이 걷자고 하고선. 옛 사랑 나타나니까 나는 하나도 생각나지 않죠? 나는 뭐 사랑하는 사람 생길 때까지의 심심풀이였나봐. 에구 불쌍한 박철수."
"야, 말은 똑바로 해. 니가 내게 뭔대 그런 말을 해? 눈 올때 나 보고 싶었음 니가 연락해야지. 내가 옛사랑을 다시 만나던 니가 무슨 상관이야?"
"누가 상관을 한다고 그래요? 지금 상황은 누나가 내 방 들어와서 따지고 있는 거에요."
"나를 다시는 안 볼 작정이야? 나 지금 심하게 기분 상했어?"
다시는 안 볼거다?
조금 위협적인 말이다.
여기서 지면 난 놀이개감 밖엔 되지 않는다.
"다시 안 볼거다. 왜?"
"뭐야?"
"나 볼 시간이나 있을까? 어색해서 자리 피하는 행동이 그 승주씨가 준 꽃다발을 꼭 껴안고 승주씨 걸음걸이와 보조 맞춰서 간 거였나? 어디가서 뭐 했어요? 보조석에 다소곳이 앉은 모습이 다시 만났으니 어디 멀리 같이 가고 싶어하는 표정이더만..."
"기분 나쁘다 너?"
"나도 기분 나빠요. 누나가 지금 나한테 따지는 태도가 날 아주 어리게 보는 것 같네요? 누나가 누굴 만나던, 어떤 짓을 하던 난 동생이고 후배니까 그냥 계속 누나를 좋아해 주겠지하는 생각. 웃기지 마요. 누나 분명 이 생각도 했을 거야. 승주를 애인이라 생각해도 아닌 척 나와 밋밋한 인연을 남겨 놓고 필요할 땐 부려 먹는다."
"너 그 말 취소해."
"못해."
"너 내가 다른 남자 만날 때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잖아."
"이 번 경우는 다르지. 나하고 생일 파티 하고 난 바로 다음 날이야. 아무리 내가 동생이고 후배지만 숨어 있는 걸 봤으면서 아무런 말도 없이 그냥 지나치냐? 그것도 오라고 해 놓고선. 그 때 마로니에 공원 갔을 때도 마찬가지야. 누나는 그 승주란 사람을 항상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그 걸 잊기 위해 나를 가지고 논 거 잖아."
"말이 심하다 너? 넌 연하잖아. 넌 내가 아끼는 후배야. 승주는 승주고 넌 너야."
누나의 목소리가 갑자기 약간 울먹거리는 투다.
"연하는 뭐 감정도 없어요? 연하는 뭐 남자 아닌가? 승주씨 만났으니까 이제 승주 형 힘들게 하지 말아요. 아무나 보고 꼬리치지 말라구요."
"짝!"
으씨, 씨바.
졸라 아프다.
"너 나뻐!"
누나의 눈동자에 눈물이 조금 고여 있다.
저거 아무래도 자기 분에 못이겨 나온 눈물 같다.
"누나 방 가서 울어요. 누나 이제 안 볼거야 씨."
"너 나보고 사귀잔 말도 한 번 없었잖아. 그래 놓구서는..."
"아휴, 그랬으면 나만 비참한 꼴 당했지. 그리고 난 연상에겐 관심없다 그랬잖아요!"
"그랬으면 그냥 동생처럼 굴어야지."
"동생이라 생각하면 왜 따져요? 순전히 자기 편한대로야."
"나도 너 이제 안 만나."
"아끼는 동생이라고 말했으면서 이런 말 했다고 걷어 차냐? 만나던지 말던지."
"쾅!"
"쾅!"
"쾅!"
앞에 것은 누나가 문을 쌔게 닫아서 난 소리고 바로 뒤에 것은 누나가 내 방문에 발길질해서 난 소리다.
그리고 그 다음 것은 누나 방문 닫히는 소리다.
정희누나 오면 누나 빈자리 매꿔 줄거다.
안 본다고 그러면 내가 쫄 줄 아냐?
나 지금 쫄고 있다.
저 여자가 내게 왜 저럴까?
창 가에 놓여 있는 장미 나무를 보았다.
아까 내 방에 온 그 여자를 생각하고 산 장미 나무다.
내게 삐삐를 쳐 주던 사람, 공주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먼저 연락하기를 꺼려 하던 저 여자는 새벽에 우리 집에 전화한 적도 있다.
옥수수 서리 할 때 망을 봐주던 여자.
수영장에서 내 목숨을 구해준 여자.
그리고 내가 사랑한 여자다.
다시 안 보면 내가 상당히 골치 아파질 것 같다.
내가 지금 뭔 짓을 한거야?
어제 괜히 이상한 생각을 해 가지고 말이야.
지금 가서 잘못했다고 한 번 빌어 볼까?
나를 아끼긴 아꼈던 사람이다.
내가 서운한 감정 들어 너무 심한 말을 했던 건 아닐까?
우쒸, 그런 거 같다.
가서 빌자.
사나이 한 번 칼을 뽑았으면 밀고 나가야지.
꼴랑 십분도 지나지 않아 이랬다 저랬다 하냐?
아니다.
이런 생각했다가 나중에 후회한다.
그래, 내가 누나 애인도 아닌데 왜 저딴 대화를 누나와 나누었어야 했나?
그래도 내 자존심도 있으니까 딱10분만 있다가 싹싹 빌러 가야지.
시계 바늘 참 늦게 간다. 누나가 외출을 했을려나?
누나 방문 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누나는 방에 있다. 이제 가자.
"딩동!"
"누나 문 좀 열어 봐요."
대답이 없다.
"내가 잘 못했다니까."
"야이, 홍은정. 문 좀 열어 봐요."
"누나, 승주 형 왔어요."
"야이, 잘난 여자야. 제가 잘 못 했어요."
"진짜 안 본다 그럼."
문 앞에다 대고 독백을 소리내어 지르니까 졸라 쪽팔리다.
쪽팔린게 지금 문제야.
경험상 빨리 빌면 누나는 내게 크게 삐치거나 화를 내지 않았다.
문이 슬며시 열였다.
누나의 눈동자가 빨갛다.
울었나 보다.
그깐 일로 우냐.
태수형 찰 때 모습과 그 옆동 빌라 사는 놈과 말싸움 할 때도 그렇고 승주형이 다시 왔을 때도 울지 않았던 게.
겨우 나이 어린 나랑 싸웠다고 우냐?
공주 맞어?
남자는 좋아하는 여자의 눈물에 약하다.
여자도 마찬가지일까?
돌아서 손가락에 침을 발라 눈에다 찍었다.
누나가 갑자기 한심스럽다는 표정으로 바뀌었다.
"나 다시 너 안 볼거야."
"내가 잘못했어요 누나. 정희 누나가 여기 온다는 말 듣고 내가 간이 커졌나 봐요. 누나가 승주형 만나는 거 아무렇지도 않아요."
"내가 그런 말 듣는다고 맘이 풀어 질 것 같니?"
"누나하고 나하고 좋았던 기억들이 많잖아요."
"너, 말 잘했다. 그래 그 좋았던 기억들이 많은데 난 이유도 모른채 그 기억들을 잊어야 할 뻔 했어.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니?"
할 뻔 했어?
벌써 풀어 진거네 뭐.
박철수 승리다.
그래도 좀 더 빌어야지.
"내가 아직 어리잖아요. 속이 좁았어요."
"허? 너도 너 유리한 쪽으로 말하네? 그럴때만 연하지?"
"화 풀어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혹시나 니가 이렇게 내 곁을 떠날까 봐 얼마나 가슴 졸였는 줄 아니?"
"누나도 나 좋아하는 거에요?"
"그럼 좋아하지. 아닌 거 같니?"
"흠, 그래도..."
사랑하는 감정으로 좋아하는 건 아니죠?
이렇게 물어 보고 싶은데...
"이번만 참는다?"
"화풀린 거에요?"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다. 너에겐 왜 이렇게 화가 빨리 풀리는지."
"헤, 잘생겼잖아요."
"그래."
누나가 내 볼을 사랑스럽게 어루 만졌다.
아까 때릴 때는 언제고...
사랑스런 모습이다.
승주 그 새끼가 밉다.
왜 나타난겨?
"승주형하고 잘 되길 빌어 줄게요. 이제 옹졸해지지 않으렵니다. 나 참 변덕스럽죠?"
"사람 감정이란게 그렇지 뭐. 나 승주하고 잘 될 수 있을까?"
"왜요?"
"다시 만났지만 예전 감정은 아냐."
"그래도 사랑했던 사람이니까 곧 예전으로 돌아 가겠죠."
"그럴까?"
"누나 방에서 차 한잔 얻어 먹을게요."
"그래, 문 앞에서 우리가 뭐하는 짓이니?"
"누나 시험 잘 봐요. 우리 학교 대학원 다닐 수 있도록 말이에요."
"정희가 오면 더 재밌겠지?"
"헤헤, 그렇겠네요."
재밌을까?
누나하고 단 둘이 있을 때 보다 승주 그 새끼랑 정희 누나가 끼어든 미래가 더 재밌을까?
오늘 나도 쇼를 했다.
친구로 생각하며 누나라 생각하며 감정을 죽이며 이 여자 곁에 버틸수 있을 때까지 버텨 보자.
나는 그 날 밤부터 다시 누나 곁으로 돌아 갔다.
도서관을 나가기 시작했고, 한 동안 예전처럼 지냈다.
뭐 나도 시험 기간이라 도서관을 나가야 했다.
커다란 엿을 두개 샀다.
포크 하나 샀고, 두루마리 휴지 하나 샀다.
"나, 대학원 시험 본다고 이렇게나 많이 사왔어?"
"착각하지 마요. 누나 몫은 이 엿 하나 뿐이야. 나머진 내 동생꺼."
"아참, 너에게 수능 볼 동생이 있지?"
"응. 누나 시험 잘 봐요."
엿 하나를 꺼내 주었다.
"그럴게."
"나는 내일 동생 시험 때문에 이만."
"동생에게 나도 합격 빌어 줬다고 얘기해 줘?"
"우리 동생은 누나 몰라요."
수능 시험 아침에 내가 직접 운전해서 동생을 시험장까지 데려다 주었다.
"잘 봐."
"내가 대학 가면 꼭 오빠 애인 만들어 줄게."
"시험 보러 들어가는 애가 쓸데 없는 말 한다."
"오빠는 내 우상이야."
"다른 집엔 두살 터울 남매끼린 많이 싸운다 그러더만."
"어릴 때부터 아빠랑 엄마가 오빠에게 대들면 야단쳤잖아."
"참 신기하지 그치? 난 구박받았고 넌 귀하게 컸는데, 왜 너한테 그렇게 교육시켰을까?"
"그게 좋잖아."
"모르겠단 말이야. 같은 말썽이라도 니가 저지르면 용서가 됐고 내가 저지르면 야단 맞았던 적이 많은데 너하고 나하고 싸우면 널 야단쳤어."
"후후. 나 이제 들어간다? 시험 잘 볼게."
"그래 임마. 올해는 안전하게 원서 함 넣어 보자."
"특차로 합격해 줄게."
내년엔 또 하나의 응원군이 생기겠군요.
우리 여동생 공부 잘하고 이쁜이에요.
내 동생이지만 참 예쁩니다.
앞에 등장하지 않았던 것은 공부하느라 바빴기 때문입니다.
최근 이년간 나하고 대화 나누는 시간이 적었지만 친남매 사이거든요.
내 말 한마디면 꿈벅 죽는애에요.
날 서럽게 했던 여자들아 두고 보자.
내 여동생, 아버지가 참 곱게 길렀어요.
나 처럼 막 키우지 않았거든요.
같은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학창 시절 나 쟤 오빠라는 이유 때문에 제법 거들먹 거리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쟤 중 고등학생일 때 쟤 짝사랑 한 놈들이 우리 집 앞까지 따라 온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에요.
중학생에서부터 고등학생까지.
아, 대학생도 한 명 따라 온 적 있어요.
이름이 이 하늘이랬나?
내 여동생 따라 온 놈 중 한 놈을 잘 못 팼다가 저 파출소 끌려 간 적 있어요.
우리 여동생 수희는 정희 누나도 인정한 우리 동네 귀염둥이였지요.
그런 내 동생이 올해 못다 이룬 대학 생의 꿈을 내년엔 꼭 이루기를 바랍니다.
제가 좀 기가 죽겠지만, 한의대 거 뭐 좋다고...
걔 성적이면 이대 약대정돈 문제 없을텐데...
참, 우리집이 한약방 하지. 아 그렇구나.
"시험 잘 봤어?"
"응. 오빠, 올 크리스마스는 내가 곁에 있어 줄게."
"치. 오빠도 만날 사람 있어."
"웃기지마."
으이쒸.
나에겐 미소 하나 남겨주고 승주 그 새끼에게로 가 버리는 누나.
누나가 대학원 합격하던 그 날 난 방학이 시작됐는데도 불구하고 서울로 올라가지 않고 자취 생활을 하며 누나를 축하해 주기 위해 학교를 갔었다.
승주 그 새끼가 어떻게 알았는지 율전까지 찾아 왔었다.
시험 치기 전에 엿까지 먹였건만 누나는 내게 어슬픈 미소 하나만을 남겨 준 채 그 새끼에게로 가 버렸다.
섧어라...
또 한 판 싸울까?
성격 좋고 맘씨 착한 내가 참자.
밤에 홀로 내 자취방에 누워 있다.
베개를 베고 누나가 준 커다란 호랑이 인형을 발 밑에 깔고 그렇게 누워 있다.
마지막 달 12월이 벌써 두 날짜를 차버렸다.
"딩동."
"여긴 왜 왔어요?"
"왜 오긴. 너 서울 안 갔어?"
"안 갔으니까 여기있지. 애인 만났으면서 일찍 돌아 왔네요?"
"우리 아직 애인 사이로 만나는 거 아니야."
"그럼 무슨 사인데? 별 이상한 짓 하고 있어."
"너 또 삐칠까 봐 일찍 돌아 왔다. 너 배고프지?"
"라면 끊여 줄까요?"
"이게 뭘까?"
누나가 등 뒤로 숨겼던 넓다란 판때기를 꺼내었다.
피자구만.
나 피자 별로 안좋아하는데...
"무슨 피자에요?"
"슈퍼 슈프림."
"나 피자 별로 안좋아해요."
"난 좋아해."
"그럼 자기가 먹을려고 사온거네."
"응. 나 다 못먹으니까 너도 좀 먹어."
"틈만 주면 자기가 공주라는 걸 일깨우네요?"
"응."
누나하고 내 자취방 방바닥에 신문지 깔고 앉아서 피자를 먹었다.
제법 따끈하다.
꼴랑 승주 만나서 예 근처에서 놀았나 보다.
멀어 봤자 수원이다.
콜라 한병을 옆에 끼고 누나랑 마주 앉아 피자를 먹었다.
호호, 저 여자 피자 먹는 모습이 제법 귀엽다.
혓바닥은 왜 내미냐?
피자도 그런대로 먹을 만 하네.
"애인 만났으면 오래 놀다 와야지?"
"치, 너 아까 표정 보니까 또 질투하는 것 같던데? 넌 바로 근처에 살지만 승주는 멀리서 왔잖니."
"왜 지레 겁먹고 그래요? 나 태연해지기로 했어요. 누나가 애인 만나는데 날 왜 신경쓰나?"
"너 삐치지 마?"
"나 안 삐쳤어요."
"나 합격해서 기쁘지?"
"응. 뭐 자기 학교 대학원도 떨어지면 죽어야지."
"너 씨. 그래도 공부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약사 고시나 준비 잘해요. 근데 승주형은 어떻게 알고 왔대요? 갑자기 발표 난거 아닌가?"
"저 번 주부터 계속 연락이 왔었어. 언제 합격 발표 나냐구? 왜만하면 다 합격하는 거라 챙겨주지 않아도 된다 그랬는데, 예전에 자기가 내게 소홀했던 걸 만회하고 싶은지 꼭 오겠다고 하더라? 그래서 오라고 연락 했어."
"그렇게 소상히 알려 주지 않아도 돼요."
"너 삐치면 무서워."
"아휴, 높으신 공주분이 절 무서워해요?"
"참, 너 여기 몇 일 더 있다 가라."
"왜요?"
"정희가 한 삼일 정도 내 방 신세를 질거야. 내일 온다고 그러네?"
"그래요? 그럴까? 그러지 뭐."
누나는 더 이상 핏자를 먹지 못하고 내가 먹는 모습을 쳐다 보고만 있다.
"맛있니?"
"누나도 먹어요."
"나는 더 못 먹겠어."
피자 별로 안좋아하지만 자취생이 먹는 걸 마다하리... 누나 꼴랑 두조각 먹었
다. 나머지 다 내가 먹었다.
"다음 부턴 치킨이나 족발 같은 걸로 사오세요."
"다 먹어 놓고선..."
"커억! 어 좋다."
"야, 숙녀 앞에선 고개 돌리고 트림 해."
"누나가 무슨 숙녀야. 나 그냥 동생하기로 했어요. 누나는 내게 있어 더 이상 여자가 아니야."
"그래?"
누나가 약간 서운한 표정이다.
에구, 그런 마음먹고 태연하게 지내고 있지만 곧 또 한계가 올 것 같다.
여자를 어떻게 여자로 안 볼수가 있냐.